입시 공부 때문에 미뤄뒀던 책들, 그냥 끌리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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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9년 02월 19일에 저장
구판절판
1959년 11월 캔사스에서 일어난 일가족 4명의 살인 사건과 수사기록을 다룬 논픽션. 논픽션이지만 소설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살인자와 희생자, 그 이웃들의 맨얼굴이 흥미진진하다.
레벨7 - 하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2월 06일에 저장

나쁜 건 아니지만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미야베 미스터리구나 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야베 미유키 베스트3는 <화차>, <이유>, <나는 지갑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중엔 전직 신문사 운전수인 신교지 요시오 씨가 제일 마음에 든다.
25세 기자와 37세 전업주부의 위험한 불륜 얘기도 좀 재미있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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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01일에 저장

<전집>이라는 말이 주는 뿌듯함~ ^^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이걸로 전부 다 읽었군. 대립하는 인물들끼리의 논쟁들이 퍽 재미있다. 명언이라고 할만한 경구들도 많고.
금단의 팬더
타쿠미 츠카사 지음, 신유희 옮김 / 끌림 / 2008년 8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09년 01월 29일에 저장
품절

표지 그림이 제일 멋지다. 주인공 형사의 캐릭터에 조금 더 공을 들였더라면 좋을 뻔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미숙한 느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간사이벤을 경상 방언으로 번역했는데, 경상도 출신인 나는 가까스로 기분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넘어갔지만, 이런 시도는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완전 망하는 거다. 웬만하면 그냥 서울말로 하는 게 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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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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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 쓰여졌을 당시, 파시즘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회 집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이상'을 조직하여 대표하는 '정당'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판단에 따르면, 파시스트당이 폭력을 ㅇ용하거나 '정치적 책략'을 통하여 파시즘을 도입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나는 많은 계층, 인종, 민족의 사람들과 다양한 종교의 추종자들을 치료한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파시즘'이 단지 특정 인종이나 국가 또는 특정 정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평범한 인간의 성격구조가 조직화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성격적 의미에서 보면 파시즘은 권위적인 기계문명과 이 문명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의 억압을 받은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우리 시대 인간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파시스트당을 만든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잘못된 정치적 생각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파시즘은 독일인이나 일본인의 민족적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최초의 오류들로부터 다른 모든 잘못된 해석들이 나오게 된다.
(아래에 계속)-12-13쪽

(위에서 계속)
파시즘은 자유를 성취하려는 진정한 노력에 해를 끼치는 작은 반동적 당파의 독재로 인식되었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이런 오류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것은 실제 사태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파시즘은 사실 국제적인 현상이며, 인간 사회의 모든 신체와 국가에 퍼져 있는 현상이다. 이 결론은 지난 15년간의 국제적 현상들과 일치한다.
오히려 나는 자신의 성격구조 속에 파시스트적 감정과 생각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성격분석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운동으로서 파시즘은 그것이 인민대중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되었기 때문에 다른 반동적 정당과는 다르다.-12-13쪽

얼마나 많은 중산계층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를 했든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우파 정당에 투표를 했든지 간에 우리가 산출한 '이데올로기적 분포'가 1932년의 선거수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눈길을 끈다. 즉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1천2백만에서 1천3백만표를 획득한 반면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은 약 1천9백만에서 2천만표를 획득했다. 이는 시렞 정치가 경제적 분포가 안라 이데올로기적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44-45쪽

대중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군국주의의 효과는 본질적으로 리비도적인 매커니즘에 의존한다. 제복의 성적 효과, 성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리드미컬한 군대식 걸음걸이의 효과, 군국주의적 의식의 전시효과적 특성 등은 학식 있는 정치가보다는 상점의 여성 종업원이나 평범한 회사원에 의해 더 실제적으로 이해되었다. 정치적 반동세력은 이런 성적 관점을 오히려 의식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남자들을 위하여 공작 깃털 같은 산뜻한 제복을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여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중략)
자유를 향한 의지를 억압하는 성적 도덕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이해에 순응하는 힘 역시 그 에너지를 억압된 성욕에서 얻는다. 이제 우리는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반작용'이라는 과정의 핵심부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을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反)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68-69쪽

히틀러의 성격구조와 생애는 민족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상의 소시민적 기원이 자신들의 성격구조와 대체로 일치했기에 대중들이 그 사상을 열렬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흥미롭다. 모든 반동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소시민 계층에 그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다. 민족사회주의는 소시민계층의 대중심리를 특징짓는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75쪽

경제적 상황과 구조적 상황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권위적 가족은 모든 종류의 반동적 사유를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소이다. 가족은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반동적 구조를 생산하는 공장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의 보호', 즉 권위적이고 자녀가 많은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모든 반동적 문화정책의 첫번째 계울이다. '국가, 문화, 문명의 보호'라는 구절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105쪽

대중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는 민족의 화신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대중들의 민족감정에 조응하여 실제로 민족의 화신이 될 때만 그에 대한 개인적 유대가 생성될 수 있다. 또한 그 지도자가 대중들 개개인에게 정서적인 가족적 유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이해했을 때만, 그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상을 획득할 수 있다. 그 지도자는 엄격하지만 보호를 제공하는, (아이들이 보기에) 품위 있는 예전의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정서적 태도를 끌어낸다. 매우 모순적인 나치당 강령의 이행불가능성에 대하여 열성적인 민족사회주의자와 토론하다보면, 히틀러는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바라는 아이의 태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사회적 현실에서,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할' 권력을 주는 것은 바로 보호를 받으려는 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감이다. (아래에 계속)-107-109쪽

(위에서 계속)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자주관리, 즉 합리적인 독립성과 협동을 방해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중들의 태도에 그 토대를 둘 수 없으며, 두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대중들 개개인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대중들 개개인이 무력해지도록 양육되면 지도자와의 동일시는 더 뚜렷이 나타나며,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이런 동일시 경향이 민족적 나르시시즘, 즉 각 개인들이 '민족의 위대함'에서 빌려온 자존심의 심리적 토대이다. 반동적인 소시민계층은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동일시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이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느낌은 그가 '대중들'을 경멸하고 대중들과 개인적으로 맞서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데, 이 역시 지도자와의 동일시에 기반한 것이다. (아래에 계속)-107-109쪽

(위에서 계속)물질적, 성적으로 비참한 그의 상황은 자신이 지배인종에 속해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고양된 사상으로 완전히 가려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충성 속으로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빠져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전문성을 의식하고 있는 노동자, 즉 자신의 순종적인 성격구조가 작동하지 못하게 막아낸 노동자는 자신을 지도자와 동일시하는 대신에 자신의 일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자신을 민족적 고향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전세계의 노동하는 대중들과 동일시한다. 지도자와의 동일시라는 토대가 아니라 사회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는 자신이 지도자라고 느끼는 것이다. -107-109쪽

만약 소시민계층이 산업노동자와 상류계층 중간의 경제적 지위를 상실하듯이 성도덕적인 태도마저 상실하게 된다면, 이것은 독재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시민계층 속에도 '커다란 뱀'의 속성이 잠복해 있어서 속박을 분쇄하고 반동적 경향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재 권력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도덕성'과 '결혼과 가족의 결속 강화'를 위한 선전을 보완하는 것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다리는 바로 권위주의적 가족이다.-151-152쪽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하고 경건하게 굴종을 견뎌내는 인도나 중국의 쿨리는 견디기 힘든 만물의 질서를 알고 있는, 즉 노예제도에 의식적으로 반발하는 쿨리보다 내적으로 덜 고통을 겪는다. 인도적인 이유에서 쿨리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진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신비주의자, 쿨리의 파시스트적인 고용주 그리고 중국의 사회위생 교수 몇 사람만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인도주의'는 비인간성을 영속화하는 동시에 은폐하는 것이다.-275쪽

노동하는 거대한 대중에 속하는 사람이 비정치적이 되면 될수록 정치적 반동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기는 더욱 쉬워진다. 비정치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수동적인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능동적인 태도로서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한 방어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만약 이런 사람이 깊은 믿음과 신비주의적 수단을 가진, 즉 성적이고 리비도적인 수단을 가지고 일하는 파시스트를 만나게 되면, 그는 파시스트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계획이 자유주의의 계획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와 지도자 이데올로기에 헌신함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영속적인 내적 긴장에서의 해방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3-295쪽

수천 년 동안 생동하는 삶이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과업이다.-316쪽

대중들에게 자유의 공간은 부여될지 몰라도, 실제적인 사회적 과제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국민 대중들이 오늘날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나중의) 사회적 직무 역시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국가-정치 사상은 원래 대중에 반하는 위계적인 국가대의제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에 관해 외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와 로마 노예제 국가의 사유체계에 고착되어 있다. -357쪽

자연스러운 사랑, 삶에 필수적인 노동, 그리고 자연과학은 합리적인 삶 기능이다. 이것들은 그 속성상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에 가장 큰 적이 된다. 진정한 정신의학의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을 오염시키고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정치적 비합리주의는 사회적 삶을 규제하고 결정하는 데에 있어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제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삶의 도착인 것이다.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적-권위적 통치는 인민대중들의 습성이 되어버린 비합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모든 독재적 정치의 관점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사랑, 노동, 그리고 지식의 기능을 그것을 누가 대표하든 상관없이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이것들은 공존할 수 없다. 독재는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단지 억압하거나 자신의 지배목적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독재는 결코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촉진, 보호하거나 스스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독재는 몰락하게 된다.-430쪽

파시스트 독재자는 인민대중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고 권위를 갈망하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노예근성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다라서 전체주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정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세상을 고통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 모든 독재자들이 억압받는 인민대중 출신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인민대중들의 이런 질병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사건과 발전에 대한 통찰력, 긔고 진실과 연구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사실들을 변화시키려는 생각 역시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 형식적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인민대중들의 자유로워질 능력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보다 환상적인 것으로 가정했으며,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동안 인민대중들의 내면에서 자유로워질 능력과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확립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들은 재앙에 빠져버렸고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446쪽

정치가들의 영향을 받는 인민대주들은 각각의 권력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즉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수산업가에게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죄가 있다고 알려진 정신질환에 걸린 장군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것은 책임 전가이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바로 전쟁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손에 쥐고 있던 인민대중들에게 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무관심으로 부분적으로는 수동성으로 또 부분적으로는 능동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대재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인민대중들의 이러한 잘못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그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들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인민대중들에 대한 동정은 그들을 초라하고 무기력한 어린아이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진정한 자유투쟁가가 지니고 있는 태도이며 후자는 권력을 갈구하는 정치가들이 지니는 태도이다.-472쪽

인간이라는 동물이 아무리 가학적이고 신비적이고 수다스럽고 양심이 없고 무절제하고 허위적이고 피상적이고 쓸모없는 잡담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노동기능에서 합리적이 되 수 있는 성향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 비합리주의가 이데올로기적 과정과 신비주의를 가지고 자신을 발산하고 전파하듯이 인간의 합리성은 노동과정을 통해서 활동하고 전파된다.-5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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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0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자가 말하는 '성의 해방'을 너무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 인간성의 긍정... 그런 것들이 결국 책임 있는 자유와 진정한 해방을 불러오게 되고, 타인의 노예가 되는 운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자신과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기쁨이야말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파시스트로의 추락을 막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의견 중에 노동을 통한 인간의 해방이라든지 민중의 각성을 유도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대안인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의 성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싶고. 십대 아이들과 드잡이질하며 보낸 요 몇년,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 같다.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절판


1990년대 들어 민비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세계 무대에서 각광을 받더니 최근에는 사극 <명성황후>의 인기에 힘입어 화려하게 무덤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 아마 이런 것들이 지금 유포되고 있는 민비에 대한 표상들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이런 식의 표상의 근저에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 다시 말해, 민비가 최고 통치자로서 열강의 각축 속에서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엇을 수행했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가장 냉철하게 증언하고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오하기문> 등을 통해 볼 때, 민비는 한 번도 개혁의 주체가 된 적이 없다. 그가 대원군과의 권력 투쟁을 위해 대거 기용한 민씨 척족들은 탐관오리와 부패하고 무능한 매판관리의 전형들이었다. 근대 계몽기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매체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시들의 부패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발되고 있다. (민씨 중에 '영'자 돌림의 탐관오리 여덟 명을 풍자하는 <민씨팔영>이 별도로 부렸으 정도이다. (아래에 계속)-21-23쪽

(위에서 계속) 또 당시 각축하던 열강들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조선의 개혁을 위해 그들을 적절히 활용한 예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릴 때마다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바빴을 따름이다.
물론 추종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일본의 암살 목표가 되어사실 자체가 바로 민비가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싸운 증거가 아니겠는냐고. 하지만 이건 정말 옹색하기 짝이 없는 의견이다. 우선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가 자신이 능동적으로 수행한 어떤 치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적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심각한 결락이 아닐 수 없을뿐더러, 그녀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한 맥락도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에서 청의 지배는 종결되었지만, 일본은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을 시도함으로써 승리의 대가를 가로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민비를 포함은 조선의 지배층들은 잽싸게 러시아 세력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고자 했다. 잘 알다시피 러시아는 조선의 근대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황혼의 제국'이었다.(계속)-21-23쪽

(위에서 계속)
어찌 보면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 곧 1894년에서 1905년 까지 약 10년 동안은 열강들의 힘의 공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외세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더라면 조선은 위로부터의 혁명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적대적 긴장을 활용하기보다 러시아에 완전 밀착함으로써 개혁의 기회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일본을 자극하는 결과만 낳고 만 셈이다. 민비는 이런 맥락에서 시해되었다. 일본과 맞서 조선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었다는 통념과 이런 정치적 정세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지.
문제는 이 구체적인 힘의 배치를 읽으려 하지 않고, 오직 일본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데 있다. 즉, 민비가 명성황후라는 새로운 기호로 부각되는 현상의 근저에는 반일=국수=지선(至善)이라는 관념이 있다. 일본에 반하는 것은 무조건 애국적인 것이라는 이 지독한 강박증!-21-23쪽

최근 출간된 <이완용 평전>은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주도층이었고, <독립신문.에 애국적인 관리로 집중 조명될 만큼 유능한 관리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그 역시 날 때부터 매국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또한 다른 계몽기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애국적 열정 속에서 출발했으며, 다만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계속 정치적 변전을 거듭했을 뿐이다. 이완용은 물론 매국노다. 그런데 그가 매국노의 상징이 된 것은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고종이 폐위되는 순간부터 총리대신이 되어 다른 라이벌들을 몰아내고 합방조인서에 도장을 찍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 매체를 살펴보노라면 정말 '매국노들의 경연대회'를 목도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제순, 송병준, 이준용, 이지용 등. 이들이 저지른 행위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이완용의 행적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모두 면책되었는가? 나는 그것이야말로 우리 식민지 역사가 만들어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완용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내세워 모든 매국의 악덕을 몰아넣은 다음 스스로 면제부를 받는 식의.-25-26쪽

기독교는 국경이나 민족을 넘어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종교이고, 마르크스주의 또한 세계 혁명을 지상과제로 삼는 이념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담론들이 한국에서는 민족이라는 절대적 기호의 기반을 조금도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충격적인 테제를 정립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한 학자의 입을 빌려 "민족주의 이론은 맑스주의의 역사적 대실패를 대표한다"고 단언한 바 있다.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여준 그 지독한 민족지상주의(그 정점이 주체사상일 터이다)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정파로 난립한 1980년대의 좌파들이 최후까지 견지하고 있었던 것 역시 민족이라는 주술이다.-26-27쪽

우리는 흔히 민족의식은 단군 시절 이래 면면히 계승되어온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반만년 역사, 단군의 후예, 한민족의 은근과 끈기 등의 익숙한 언표가 대변하듯이. 그래서 통일신라가 당과 결탁하여 고규려를 멸망시킨 것을 아직도 굴욕적 사대주의로 수치스러워하고, 그에 대한 심리적 보상으로 거의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발해를 한국사의 지평에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시대보다는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더 즐겨 사용한다.
이것은 일단 역사를 하나의 레일 위를 달려오는 '단수화된 서사'로 상정하는 태도의 산물이다. 즉, 20세기 이후 형성된 민족에 대한 관념을 저 아득한 시간대로 소급하여 태고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상상하고 싶은 것이다. 기원이 멀면 멀수록 그 정통성은 더 한층 확고해진다는 듯이.
(아래에 계속)-35-40쪽

(위에서 계속)
20세기 한국 인문학읙 ㅏ장 강력한 담론체계인 실학파 담론이야말로 그러한 내적 연속성론이 가장 두드러지게 작동하는 방법론적 거처이다. 그것은 조선 후기 지식인 그룹을 '실학파'라는 유형으로 절단함과 동시에 그들의 텍스트 속에서 민족의식의 맹아들을 다양하게 채취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쳐왔다. 실학파라는 명명이 가능한가도 회의적이지만, 조선 후기의 맥락에서 민족적, 민중적이라는 척도가 얼마나 텍스트의 잠재력을 드러낼 것인지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의 담론 체계에서 진정 의미 있는 것은 개별 낱말들의 조각들이 아니라 개념들이 움직이는 배치이다. 이 작동의 메카니즘을 간과한 채, 오직 낱말의 의미를 우선 규정해놓고 일의적 해석을 가하는 것은 일종의 동일성의 폭력이다. 역설적인 것은 병자호란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소중화론'이 실학과는 대척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자주성의 진보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전도된 양상이야말로 민족이라는 동일성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래에 계속)-35-40쪽

(위에서 계속)
연속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서 조선 후기 사상사를 재검토해보면, 거기에는 근대적 민족주의와는 아주 다른 진경이 펼쳐져 있다. 당시의 지배적 담론인 소중화론은 중화 문명의 초월성을 그대로 수락한 채, 대상만을 중국에서 조선으로 이동함으로써 중화(中華), 이적(夷狄)의 구별을 더더욱 완강하게 견지한 것이었다. 따라서 18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담론들은 바로 그 소중화론이 기대고 있는 초월적 전범성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소중화론의 입장에 서면 청나라는 금수와 같은 오랑캐들의 국가일 뿐이다. 얼마나 단순명료하고 도식적인가. 그러면 소중화론을 깨기 위해서 새로운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던가? 연암 박지원은 소중화론을 정면으로 부인하기모다 그와 유사한 지평에서 출발하되, 계속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균열을 일으키는 방식을 시도한다. (중략) 이옥이 주장하는 바의 요점은 어떤 하나의 심급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개체들의 차이이다. 동이럿응로 포획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에의 강렬한 환기!(중략) 이것은 다방면에서 소수성 minority'을 긍정하는 논리로 얼마든지 원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35-40쪽

(위에서 계속)
더욱이 이덕무나 이용휴, 박제가 등 당시 새롭게 부상한 문제적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시도했던 것도 바로 하나의 최종심급에 포획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의 분자적 흐름에 대한 환기였다. 조선적인 것에 대한 옹호는 그러한 인식론적 배치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에 반해 근대 계몽기의 민족 담론은 그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일단 서구, 일본, 조선의 삼각관계를 기본으로 삼음으로써, 중화를 향했던 시선이 이제는 서구 문명을 향하게 된다. 중화와 서구 문명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하지만, 담론적 배치의 측면에서 볼 때 초월적 전범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위상을 차지한다. 앞서 등장한 <매일신문>이 잘 보여주듯 민족국가는 서구 문명의 위력에 의지해, 그들의 시선에 의거해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성에 대한 열렬한 희구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민족적 자각이 강렬할수록 사실 근대 문명화론의 궤도를 충실히 따라가야만 하는 역설이 생겨난다. (아래에 계속)-35-40쪽

(위에서 계속) 이것은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의 태내에서 제국주의를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 나아가 주체를 강조할수록 그것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타자와 포개져야 하는 운명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근대성의 외부'로 달아날 가능성이 전면 봉쇄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 실학판 담론과 근대 계몽기 민족 담론 사이에는 연속성보다는 차라리 불연속적 간극이 두드러진 셈이다. -35-40쪽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근대적 국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봉건적 신분제라는 대지에서 탈영토화해야 한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인의 평등, 개체로서의 자유 등 새로운 근대적 주체가 되기 위한 몇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 한다. 근대적 체제의 확립에 긴 시간이 걸린 유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압축적 형태로 근대를 겪은 일본도 짧기는 하지만 이른바 민권주의 시대를 통과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보다 더 압축적인 방식으로 근대적 궤도에 들어서는 바람에 민권이나 개인의 자유를 사고할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유일한 민권주의 시대인 독립협회 활동에서도 개인, 개체의 문제는 계몽의 지평에 떠오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 계몽의 수면 위로 급부상한 민족 담론에는 민족을 구성하는 개별 구성원들의 자유나 해방의 문제는 일체 배제되어 있다. (중략( 1909년 11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 '자기 일신을 위하여 살기를 구하지 말지어다'라는 글이다. 여기서 보듯, 개인주의는 오직 일신을 위해 민족을 망치는 근성으로만 규정되어 있다.-41-42쪽

이 시기에는(20세기초 애국계몽기-인용자 주) 민족과 인종이 그다지 큰 변별성을 지니지 않은 채 혼용되어 쓰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민족의 핵심적 지표가 인종적 순수함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뒷날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으면서, 인종, 인종주의가 파시즘적 악마성과 직접 포개어지기 전까지 이 두 용어는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있었다. (증략)
위의 글(신채호의 '꿈하늘'-인용자주)의 경우, 매국노, 탐관오리 등과 '적국놈에게 시집가는 년'과 '적국의 년에게 장가가는 놈'들이 유사한 위상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등가화인 셈인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러한 동일서으이 논리에는 인종적 순수함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성 윤리에 대한 태도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다른 인종이 섞여서는 절대 안된다는 이런 식의 집착은 우리 민족은 순수한 단일 혈통을 면면히 이어왔다는 역사 관념과 함께 작동한다.-5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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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지만, 평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쉽고도 간결하고 분명한 언어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대하니 기뻤다. 저자가 추천한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다.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랑 카라타니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부터.
 
[연필 하나로 시작하는 일러스트 연습장] 서평단 알림
연필 하나로 시작하는 일러스트 연습장 - 연필 하나만 있으면 상상하던 그림을 그대로 그릴 수 있다!
유모토 사치코 지음, 류현정 옮김 / 한빛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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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과 같이 그림 잘 그리는 아이를 에워싸고, 종이를 내밀며 “뭔가 그려줘.” 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쓱쓱 그리는데 순식간에 예쁜 그림이 되는 것이 신기했다. 집에 와서 흉내 내 그려 보려 해도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사람이나 동물을 그리면 뻣뻣하고 어색한 형태가 나오곤 했다. 그 후 중학교에 가서 미술 ‘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림 그리기에 대한 욕망은 마음 깊은 곳으로 봉인해 버렸다.


이 책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종이와 볼펜을 다시 꺼냈다. 뽀글뽀글한 선과 구불구불한 선부터. 책에다 직접 그리는 것이 망설여져서 기본 그림을 연습장에 베껴 그리고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베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림들은 선도 형태도 간단해서 초보자도 쉽게 따라할 수 있다. 그런데도 뭔가 멋져 보이니 신기하다.


특히 사람의 자세를 표현하기 위해, 먼저 골격을 zola맨처럼 그려 놓고 그걸 보면서 목표하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운 것은 큰 수확이다. 거짓말처럼 벽에 기대 있는 사람, 걸어 가는 사람, 쪼그리고 앉은 사람이 그려진다. 종이 위에 하나하나 형태가 만들어질 때마다 뿌듯하고 기쁘다.


최근 마음에 괴로운 일이 있는데, 문 닫고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만은 평화와 위로가 찾아오는 것을 느낀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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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우리말 달인 건방진 우리말 달인 시리즈 1
엄민용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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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달아, 안녕?

봉두난발에 수염이 숭숭 난 얼굴, 세모꼴 눈에 사람을 비웃는 표정을 하고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네 이름이 우달이였지. 책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에는

"자칭 타칭 건방진 우리말 달인. 취미는 잘못된 우리말 상식 찾아내서 잘난 척하기, 밤새도록 소주 마시기, 우리말 지식 겨루기, 교과서와 사전의 오류 골라내기, 20여 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말을 전파하고 있는 천상 우리말 지킴이"

라고 나와 있구나. 그 아래에는 네 개에 대한 소개도 있네. 

"우리말 달인의 애견. 이름은 달코. 주인을 닮아 소주 마시기를 좋아하고 남 일에 참견하기를 즐긴다. 특기는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람을 만나면 주인과 함께 혼쭐 내주기. 주인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실제로 이 책에는 우달이 네가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너 스스로도 우리말을 잘못 쓰다가 네 개에게 맞는 그림들이 많아. 재미있으라고 그려 넣은 것이겠지만...어떻게 하니? 난 전혀 재미가 없었어.

애당초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람은 혼쭐을 내줘야 한다'는 사고 방식 자체가 큰 문제라고 난 생각하거든. 메뉴판을 잘못 쓴 식당에서는 주인에게 항의를 해야 한다든가, 남에게 "칠칠하다"는 칭찬을 하라든가... 네가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들이 나는 잘 이해가 안 간다. 언어 생활에서 규범을 정확히 지키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며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자세가 결핍되어 있다면 아무리 규칙을 잘 알더라도 결코 '달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런 까닭으로, 책을 읽는 내내 난 참 불쾌했어. 읽기 편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반말을 썼다고 너는 말하지만, 너의  반말이 "건방진" 태도와 결합해서 빚어내는 효과는 최악이었단다. 나도 우리말 규범에 관심이 많고 되도록 정확한 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을 빌려 읽지도 않았겠지.) 곁에 두고 늘 찾아볼 우리말 참고서로 이 책을 고르고 싶진 않네.

(덧붙임) 네가 하는 얘기 중에'으 불규칙 활용'(101p)이나 'ㄹ 불규칙 용언'(218p) 같은 것은 틀린 말이란다. '불규칙 활용'은 같은 음운 환경에 있는 말들이 서로 다른 형태로 활용할 때 쓰는 문법 용어거든. 예를 들어, "길이 굽다"와 "생선을 굽다"의 경우 똑같은 '-어' 어미 앞에서 전자는 "굽어", 후자는 "구워"가 되지? 이게 불규칙 활용이야. 어간의 끝 모음 'ㅡ'가 어미 '-어' 앞에서 탈락하는 것이나, 어간의 끝 자음 'ㄹ'이 ㄴ,ㄹ,ㅂ,시,오' 앞에서 탈락하는 것은 특정 음운 환경에서 항상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규칙 활용이란다. 또 하나,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과 '우리말=한국어'는 다른 거야. 넌 두 가지를 자꾸 혼용하는데,  차이점을 확실히 알아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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