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한길그레이트북스 30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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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종교적 인간이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대지의 중앙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는 자신들의 도시가 우주의 배꼽을 구성한다는 것, 더욱이 신전이나 궁전이 진정한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집이 중심에 존재하고 세계의 모상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실상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집이란 세계의 중심에 있고 소우주적 차원에서 우주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 사회의 인간은 위로 열려져 있는 공간, 즉 상징적으로 지평의 단절이 보증된, 따라서 다른 세계, 초월적 세계와의 접촉이 의례를 통해 가능한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항상 중심에 살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친밀함을 느끼는 공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 어떤 차원에 속하든지 간에 종교적 인간은 항상 전체적이고 조직된 세계 속에, 즉 코스모스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우주는 그 중심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우주는 그 배꼽인 중심점에서부터 확장되어 나간다.-71쪽

'우리의 세계'는 코스모스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의 어떤 공격이든 카오스로 변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신들의 모범적인 작업인 우주 창조를 모방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를 공격하는 적은 신들의 적, 악마, 특히 악마의 두목, 태초에 신들에게 정복당했던 원초적인 용(龍)과 동일시되었다. '우리의 세계'에 대한 공격은 신들의 작업인 코스모스에 저항하여 그것을 무(無)로 돌려버리려는 신화적인 용의 복수 행위에 해당했다. '우리의' 적은 카오스 세력에 속한다. 어떤 도시의 파괴는 카오스로의 전락을 의미한다. 침입자에 대한 승리는 용(즉 카오스)에 대한 신들의 모범적 승리를 재현하는 것이다.-74쪽

종교적인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중에서 더 중요한 성스러운 시간은 순환적, 가역적, 회복 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인 면으로 나타나고 의례를 통하여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종의 신화적인 영원의 현존을 나타낸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을 구분하기에 충분하다. 종교적 인간은 근대적인 용어로 역사적 현재에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어떤 점에서는 영원성과 동일시될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을 다시 획득하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90쪽

신이나 문화 영웅은 이제껏 속된 행위를 계시해 본 적이 없다. 신이나 선조들이 행한 것, 따라서 신화가 그들의 창조 행위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은 성스러움의 영역에 속하고, 그러므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의 발의에 따라 행하는 것, 어떤 신화적 모델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속된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헛되고 허망한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비현실적 행위이다. 인간은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인도할 모범적 모델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된다. 말을 바꾸면, 인간은 종교적으로 되면 될수록 실재에 더 많이 들어가게 되고, 비모범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결국 그릇된 행동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여기서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는 신화의 측면이다. 신화는 절대적인 성스러움을 계시한다. 그것은 신들의 창조 행위를 말하고 신들의 작업의 신성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신화란 성스러운 것이 세계 속으로 다양하게, 때때로 극적으로 침투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108쪽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는 그 신앙 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멀리 있는 감추어진 신(dei otiosi)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신은 마치 창조라는 거대한 일에 그 힘을 전부 사용해 버린 것과 같이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해 버려서 일종의 권태를 느낀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은 하늘로 은퇴하고, 창업을 완성하기 위해 그 아들 혹은 조물주를 지상에 남겨둔다. 차차 그의 지위는 신화적 선조, 모신, 풍요신 등과 같은 다른 신격들로 대체되었다. (중략)최고 존재자가 그 본래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유목 민족뿐이다. 그것은 일신교적 경향을 갖는 종교(아후라-마즈다) 혹은 명확한 일신교(야훼, 알라)에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중략)
대다수 아프리카 종족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천신, 지고존재자, 전능한 창조주는 부족의 종교 생활에서 사소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혹은 너무 선하기 때문에 일부러 숭배할 필요가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닥칠 때에는 마지막 원천으로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다.-125쪽

성스러운 지식, 일반적으로 지혜는 가입식의 성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나 그리스에서도 분만의 상징이 의식의 각성과 결부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조산원에 비유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인간'을 분만시켰던 것이다. 불교의 전통 가운데서도 동일한 상징이 발견된다. 비구는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붓다의 아들'(sakya-putto)이 되는데, 그것은 그가 '성인의 한 사람으로(ariya) 태어났기' 때문이다.-179-180쪽

비유적 해석 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고대 말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스토아 학파였다. 이 방법이 신화적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재평가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신화는 사물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견해나 윤리적 원리를 계시해 준다. 신들의 수많은 이름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격이 여러 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며, 모든 종교는 단지 용어만 다양할 뿐 동일한 기본적 진리를 나타낸다. 스토아 학파의 비유적론적 방법은 모든 고대의 전통 혹은 전통을 하나의 보편적인 언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이 방법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후대에도 자주 사용되었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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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여성 - 젠더와 한국의 민족주의
최정무 외 지음, 박은미 옮김 / 삼인 / 2001년 8월
품절


벨 훅스(bell hooks)는 피식민지국 여성들이 지배국에 의해, 또 같은 종족의 남성들에 의해 이중으로 식민화된다는 통찰력 있는 견해를 내놓는다. 흑인 민족주의의 경험을 검토한 벨 훅스는, 피식민지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식민 지배자의 입장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지배국인 미국을 모방하는 가운데 피식민지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적 주체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을 억압한다. 이들은 거세되고 유아화된 자기 이미지를 떨쳐 버리고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을 포함한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려 한다. 즉 식민지 남성과 식민 지배자는 식민지 여성을 억압하는 동지적 관계를 이룬다. 달리 말하면 민족의 남성성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내거는 반식민 민족주의의 신성한 사명감 속에서 식민지 여성은 이중의 억압을 받는 것이다.
-최정무 <한국의 민족주의와 성(차)별 구조>-30쪽

정권에 저항하는 편에 서 있는 한국의 남성 민족주의자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물질적으로 위위에 있으며 남성적인) 미국 문화에 친숙하므로 지배적인 외세에 동조하기 쉽다는 이유 때문에, 이 여성들에게 여성 혐오적인 시선을 보낸다.
-최정무, 위의 글-45쪽

한승조는 또 단군의 휴머니즘과 함께 유교의 민본주의 사상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중략) 민주주의에 대해 온정주의적이고 도덕적인 특징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정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민본주의라는 이념에는 개념상 몇 가지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민본주의에는 누가, 어떤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지를 결정하고 실행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침묵은 토크빌이 언급했던 관리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정치 과정에 민중이 참여할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민중은 당면한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면 탈정치화될 것이다. 게다가 유교 이념은 정치가 민중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민중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요소가 갖춰지지 못한 민본주의는 개인간의 평등에 기초한 민주적인 정치로 나아가지 못한다.
-문승숙 <민족 공동체 만들기>-72-73쪽

바라건대, 남성에 대한 실망과 분노 또한 개별적인 남성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남성성을 창출해 내어 승인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국가, 그리고 그렇게 실행되도록 성적 차별을 요구하는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는 에너지로 변형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투쟁의 목표는 남성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구하는 것, 그것을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 목표는 남성과 여성 양자를 위한 더 나은 세계, 착취적인 위계 질서나, 여성을 배제하고 상품화화하는 일이 '잊혀진 과거의 기억'이 될 수 있는 그런 세계의 수립이어야 할 것이다.
-일레인 김 <남성들의 이야기>-151쪽

이 글에서 나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현재 한국의 담론을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첫째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침묵이 일본 정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에 의해서도 조성되어 왔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둘째로, 여성의 성에 관한 가부장적 코드와 결합된 민족주의 담론이 어떻게 남성 우월적인 주체 위치에서 위안부 문제를 구성해 왔는가를 조명하였다. 이 결과 위안부 문제는 성애화된 민족의 문제(a matter of sexualized nation)로, 민족주의화된 성의 문제(a matter of nationalized sexuality)로 축소되어 왔다. (아래에 계속)-175쪽

(위에서 계속) 이와 같은 재현은 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있어서 생존자 여성들을 주변화시켰으며, 그들에게서 일생에 걸친 수치와 침묵 그리고 고통이라는 짐을 덜어 주지 못하였다. 이렇게 민족이라는 이름하에서 위안부 여성들이 여전히 희생자에 머물렀고 그들의 성이 형상화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한 몸'으로 통일된 것처럼 가정되는 민족주의의 틈새와 간극을 발견하게 된다. 민족주의 담론은 위안부를 주된 과제로 삼아 그것과 씨름했다기보다는, 위안부 문제를 전유함으로써 자기 논리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하여 왔다.
-양현아 <한국인 '군 위안부'를 기억한다는 것>-175쪽

군대의 질서, 규율 사기, 전시 대비 태세 등을 위협한다고 보이는 기지촌 내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 사령부 측은 한국 정부에 기지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에 협조해 달라며 압력을 가해 왔다. 1971년 늦여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합동위원회는 '군 민 관계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기지촌 문제를 놓고 논의할 여러 명의 '패널'을 구성하였다. 한국 정부는 '정화'(purification) 계획을 지휘하기 위한 기지촌청결위원회 (BUCUC, base-community clean-up committee)라는 청와대 직속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들을 중심으로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는 현지 한국인과 미국인 병사에게 인종 차별주의가 미치는 해악을 알리고 성병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캐서린 문 <한미관계에 있어서 기지촌 여선의 몸과 젠더화된 국가>-182-183쪽

주한미군 당국은 또한 한국인 매춘 여성들을 미국 병사들 사이의 성병 감염의 주요 원천 혹은 '저장고'라고 몰아붙이면서, 한국 정부와 함께 감염된 여성의 등록과 성병 검사, 격리 관리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한국 정부가 맡은 일은 미국인 병사의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하여 기지촌 매춘 여성의 등록 및 의무적인 신체 검사, 격리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보건사회부, 외무부, 내무부, 법무부, 경찰청 모두가 이 여성들을 '정화'시키는 일에 상당한 돈과 에너지를 소비하였다. 한국 정부는 1971-1972년 사이 기지촌 내의 건강과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총 3억8천만원을 할당하였는데 이 중 2억2천400만원(1971년 당시 각각 100만 달러와 60만 달러에 해당)은 기지촌 여성의 성병 예방과 치료에 충당되었다. 이 돈은 성병 진료소를 개설하거니 시설을 개선하고, 여성에게 성병 '교육을 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병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항생제를 '대량으로 접종 투여'하는 일뿐만 아니라 성병 검사를 위해 여성을 강제로 모이게 하는 것 같은 정부의 활동에도 사용되었다.
-캐서린 문, 위의 글-184-185쪽

사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 제7사단(1955년 이후 한국에 주둔했던 육군 2개 사단 중 하나)과 3개의 공군 비행 대대가 떠난 데 충격과 공포를 나타냈다. 1971년에 7월 1일에 보도된 <코리안 헤럴드(Korean Herald)> 기사에 따르면, "미군 2만 명의 철수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주요 부문들(정부, 군사, 입법부, 언론, 일반대중)에서는 미군 감축이 너무 갑작스럽고 성급하며 (북한의 반응을) 도발하는 행위라며 반대하였다. 야당 국회의원들까지도 대중 시위에 참가하였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새로운 태도가 미국이 한국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며 공포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에 미군은 기지촌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를 내보임으로써, 한미간의 우호와 협조, 공존에 미군이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지 한국인들에게 증명하고자 했다. (아래에 계속)-193-196쪽

(위에서 계속)
한국 정부의 관점에서 볼 때, 매춘 여성들은 주한 미군측이 일상 생활을 개선하고 기지촌에 대한 통제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략) 한국 정부는 소위 공적 채널이라 불리던 것들로는 미국의 정책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국민 대 국민의 관계'라는 과감한 캠페인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중략)
한국 정부의 관점에 따르면, 기지촌 매춘 여성은 그들이 성적으로 접촉하는 수많은 미군에 대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따라서 매춘 여성들을 행실이 바르지 못한 외교관을 행실이 똑바른 외교관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 '정화 운동'의 임무였다.한국 정부의 '정화 운동'을 감독했던 청와대 비서관은 기지촌 매춘 여성에게 올바르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인터뷰에서 그는 기지촌 지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아래에 계속)-193-196쪽

(위에서 계속) 그는 매춘 여성들에게 "어떻게 일본이 무(無)나 다름없던 상태에서 위대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몬한 뒤, 1945년 이후 미 점령군에게 몸을 팔았던 일본 매춘 여성들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한 미군하고 성 관계가 끝나면 일본 매춘 여성은 (돈을 벌려고) 다른 미군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미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본을 재건하는 데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런 일본 매춘 여성의 정신이 나머지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일본을 재건하는 힘이 된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분명 기지촌 매춘 여성의 성 노동을 애국심 발로의 한 가지 중요한 형태로 설정한 것으로 하급 관리들은 이후 여성들에게 실시한 정규 '교육 강좌'에서마다 그런 말을 반복하였다. 예컨대 의정부 지역에서 이루어진 한 강좌에서는 여성들에게 "국익을 담당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캐서린 문, 위의 글-193-196쪽

한국 정부가 사적인 개인, 특히 여성과의 성적 관계를 외교 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여성의 자아를 희생하는 것을 기대하고 정당화해 온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략) 한국의 역사, 민담, 문학 작품들에는 이러한 기본 구상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변형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 삶, 몸, 그리고 개인적 욕구까지도 희생하는 소녀와 여성들이야말로 영웅이요 순교자요 애국자였다. 1960-1970년대에 여성들은 남한의 경제적 '기적'을 선도한 경공업과 제조업 수출 산업 분야에서 비숙련, 저임금 노동자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안보 전선에서도, 시골에서 상경한 수천 명의 가난한 소녀와 여성들이 미군이 주는 달러를 벌어 외화를 증대시키고 그들에게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미군에게 성을 파는 노동에 몸을 저졌다. 197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이 여성들은 한국 정부에 의해 '애국자'라고 찬양되었다.
-캐서린 문, 위의 글
-캐서린 문, 위-200-201쪽

1971년 안정리에서 발생한 대중 소요와 인종간의 폭력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서 시작된 기지촌 정화 운동은, 많은 기지촌 매춘 여성들이 누려 오던 '거칠고', '자유스러운' 시대가 끝나고 매춘 여성들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한미양국에 의한) 공식적 재조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1971년 7월 기지촌 정화 운동이 개시된 후 한국 매춘 여성들은 더 이상 전쟁과 가난이라는 공적인 위기와 박탈 때문에 매춘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대신 정화 운동을 거치면서 매춘 여성들이 미군에게 제공하는 개인적 서비스는 그들을 '민간 외교관' 또는 '애국자'로 만들었다. 게임의 법칙 역시 바뀌었다. 매춘 여성들은 더 이상 스스로나 가족의 생계를 근근히 꾸려 가는 강인한 여성이 아니라, 미군과 현지 당국으로부터 몸과 일 그리고 집(방)까지 체계적으로 검사와 통제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캐서린 문, 위의 글-209쪽

매춘 여성들의 성 노동을 한미관계에 있어 '애국적'인 행위라고 이야기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관련하여, 인터뷰에 응한 매춘 여성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기지촌 여성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 노동이 민족주의적이라거니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느끼지 않았을 뿐더러 대부분 단지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매춘을 했다고 이야기하였다. 박 여인이라는 한 기지촌 여성은 "그건 창피한 일이죠. 어떻게 그 일이 애국적인 희생일 수가 있겠어요?" 라고 말하였다. 인터뷰한 여성 중 몇 명은 애국심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애국심에는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교육도 많이 받고 준비도 적절히 하면서 여러 가지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냐, 자신들의 성 노동이 한국의 안보에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래에 계속)-211-212쪽

(위에서 계속)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들의 몸이 이용되고 있다는 '국가 안보'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행동이 대체로 매춘 여성들의 육체적, 경제적 요구 조건을 무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현장 매춘 여성이었다가 여성 운동가가 된 김연자 씨는 한국 정부와 미군이 내세운 전제 조건, 즉 국가 안보 요구에 대한 공공연한 선언은 기지촌 여성들의 실제적인 요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인터뷰한 여성들 모두 자신들이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은, (한국 전쟁 이후) 북한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클럽 업주와 포주, 현지 한국 경찰, 성병 관련 담당 공무원 그리고 미군 기지 세력의 착취와 학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캐서린 문, 위의 글-211-212쪽

미군기지가 철수된다고 해서 이 여성들에 대한 학대와 착취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착취의 근원은 바로 철저한 계급 질서의 형성, 여성을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천민으로 간주하는 유교 도덕 규범, 그리고 여성과 소외 계층의 목소리와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정치 체제와 문화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로부터 성적 노동을 강요당했던 위안부 여성들의 인권 침해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 내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운동가 집단들조차, 자신들의 벌이는 운동에서 미군 기지촌 매춘 여성들의 곤경과 투쟁의 명분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은 다신들이 과거에 받았던 피해와 현재 정의에 호소하는 운동을 미군 기지촌 매춘 여성들의 운동과 동일시하는 데 격렬히 항의하기까지 한다. '이안부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하는 그런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쓰레기 같은' 여성들과 관계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캐서린 문, 위의 글-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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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6-1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대해 막연하게 거부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읽어보면 다 맞는 얘기긴 한데... 지금 상황만으로도 괴로운데, '페미니스트' 까지 되면 사는 게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는 걸까?
이 책에서는 캐서린 문의 1971년 기지촌 정화운동 이야기가 대박이었다. 블랙코미디지, 이건.
 
자살 - 인간만의 파괴적 환상, 이끌리오 비센
토마스 브로니쉬 지음, 이재원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12월
절판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자살할 권리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44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자유로운 죽음을 설교하노라. 이죽거리며 웃는 그대들의 웃음처럼 모래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오는 그러한 죽음을"
쇼펜하우어는 <자살에 관하여>(1852년)에서 니체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우리는 자살이 가장 비겁한 것이고 광기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아주 상스럽거나 완전히 무의미한 문제이고 '부당한 것'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자신이나 삶에 대해 권리가 있듯 논박이 불가능한 다른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살행위는 사람들이 "인생의 끔찍함이 죽음의 끔찍함을 능가하기에 이를 경우" 결심하게 되는 것으로, 이성적으로 제어되어 있으며 완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행위로 간주된다.-116쪽

장 아메리(Jean Amery -e에 accent-)는 <자살하기 : 자유죽음론> (1976년)에서 허무주의적이고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시각으로 자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아메리는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2년 후에 자살했다. (중략)
아메리의 <자유죽음론>에서 다음 같은 테제가 도출될 수 있다.
(1) 자살은 인간이 인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2) 자살에서 최고 형태의 인간적 자유가 실현된다.
(3) 자살은 인간에게 휴머니즘과 존엄성과 자유를 보장해 준다. 자살은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이고 부자유한 삶에서 인간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4) 자살을 해야겠다는 결정은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자유로운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와 병적인 상태의 경계선은 유동적인데도, 그것은 지배사회의 대변자들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자들과정신과 의사들의 자의적인 구분에 맡겨져 있다.
(5) 자살을 감행하는 순간에 모든 자살자는 그들이 살아온 이력과 무관하다.
(아래에 계속)-118-126쪽

(위에서 계속)
(6) 자살자가 치료에 성공하여 삶이 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해도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살기도 전과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회의 기대에 적응했고 삶의 논리에 몸을 맡긴 것이다.
(7) 자살을 통해 삶이 최고의 자산이라는 독단이 폐기되었다. 죽음은 삶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8) 자살은 절대적 개성, 즉 자기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의 표현이며 절대적 정체성의 표현일 수 있다.-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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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5-0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사이트를 단속하겠다는 뉴스를 보며 비웃었다. 쓰레기같은 놈들이 쓰레기같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쓰레기로 살기를 강요하는구나. ㅋㅋㅋ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5월도 잔인하다. 5월의 초입은 레포트를 쓰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해서, 이 책을 읽었다. 레포트는 여기서 왕창 베껴 냈다. 김일렬의 <숙영낭자전 연구> -_-  연구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숙영낭자전>이다. 나 이 소설 싫어. 매력을 못 느끼는 책을 가지고 어쩌고 저쩌고 떠들려니 진짜 죽을 맛이다. 횡설수설 하며 페이지만 넘기며 각주만 하나 둘 달고 있었다. 아아 진짜 싫어.

 

 

 

 

 

 

 

그 와중에 '이 숙영이란 여잔 도대체 왜 죽는 거야?' 하면서 토마스 브로미쉬의 <자살>을 읽었다. 정신과 의사가 쓴 자살론인데, 사회학적 입장, 심리학적 입장, 정신 의학적 입장들을 간결하면서도 요령 있게 소개한 좋은 책이다. 답답했던 머리가 이거 읽는 동안만은 좀 상쾌해졌다. 레포트에도 각주 한 줄 넣었다. 없어도 별로 상관 없는 각주이긴 하지만. 

 

 

 

 

 

 

 

 신화를 테마로 한 책들을 좀 읽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옛날 정진홍 선생님 수업을 청강할 때부터 읽으려고 벼르던 책인데 7년만에 겨우 읽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일단 분량 면에서, 다 읽고 뿌듯해 해도 될 책인 듯. 전공 공부랑 연관짓고 싶었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삼국유사> 읽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읽었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었다. 이 민음사 판은 책도 예쁘고 잘 읽히더라.

 

 

 

 

 

 

 


김병모의 <허황옥 루트> 읽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김수로 왕비 허황옥>을 밤을 새우며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후 15년이 흘렀지만 저자는 여전한 듯. 지도교수님은 센세이셔널한 것만 좋아하는 신뢰할 수 없는 필자라고 혹평했다. 그래도 신선하고 재미있잖아? 사고가 자유롭고 행동력도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옛날 여자친구 얘기는 체신머리 없어 보이니까 좀 그만했으면 싶더라. ㅋㅋ) 

 

 

 

 

 

 

 

<민족주의의 역사> 발제를 위해 페미니즘 관련 책도 하나 읽었다. 일레인 김, 최정무 편역 <위험한 여성>, 기지촌 얘기가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한국계 미국인인 대학교수 집필진이라는 건 너무 부러워서 조금 싫을지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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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모더니즘 소설론
강상희 / 문예출판사 / 1999년 5월
품절


객관적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이라는 '세계의 이중화'는 근대적 사유의 핵심으로서, 어느 영역에 사유의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상이한 세계 이해의 방식을 산출하게 된다. 모더니즘 소설은 이 가운데 주관적 표상을 궁극적인 영역으로 상정하는 비동일성의 사유 방식을 따른다. 그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대체로 객관적 세계, 나아가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사유 방식을 따른다. 그에 따라 모더니즘 소설은 객체, 외적 경험, 집단 의식보다 주체, 내적 경험, 개인 의식을 상위의 리얼리티로 구현한다.
이처럼 경험과 사유의 개인적인 기원에 근거를 두고 있는 주관성의 특성으로 인해 모더니즘 소설은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원형적인 대립 구성을, 내면성에로 경도된 일원화된 소설 구조로 병형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내면성의 우세, 더 나아가 내면의 독립화와 자율성은 모더니즘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의 흐름, 내적 독백, 회상과 자유 연상 그리고 미학적 자의식 등은 바로 모더니즘 소설이 구현하고자 하는 내면성에 상응하는 서술 범주들이다.-16-17쪽

자율성 범주는 칸트와 실러의 미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근대의 분화 과정 즉 진 선 미의 범주에 해당하는 과학 도덕과 법률 예술의 정립의 산물이다. 예술 분화의 기본 원리는 심미주의를 통해 확립된 바 있는, 예술의 사회적 무효과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우선 목적 합리성과 유용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의 일상적 가치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중략)
그러나 근대 예술 가운데 소설은 그와 같은 자율성 상태에 오랫동안 저항해 왔다. 근대 소설은 미적 자율성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지 않는 동시에 작가의 윤리성이 작품의 미학적 문제가 되는 유일한 장르이다. 내용 미학과 형식 미학의 충돌이 가장 극심한 장르가 소설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긴장 속에서 총체성을 모색한 1920-30년대의 경향 소설과, 내용화된 형식 형식화된 내용을 지향한 모더니즘 소설은 작가의 윤리성과 소설의 자율성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준 두 영역이라 할 수 있다.-32-33쪽

모더니스트들은 이상의 소설엣허처럼 외적 현실로 환원되지 않는 내면 의식의 요소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언어와 기법, 인물의 발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공간적 형식과 동시성을 소설 구성의 핵심적 요소로 차용함으로써 전대 시간과의 선조적 연속성을 부정하고, 통합적 주체 대신에 파편화된 주체를 형상화함으로써 전통적인 소설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갖게 된다. 모더니즘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문명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산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중략)
모더니즘의 전통 부정이란 본래 '가까운'과거 (immediate past)를 향하는 것이고, 먼 과거(distant past)는 오히려 숭배의 대사이 된다. 모더니즘의 한 특징인 신화 형식의 차용은 전통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모더니즘 소설의 두번째 타자로 경향 소설을 들 수 있다.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진정한 타자는 경향 문학이다. 특히 마르크시스트 모더니즘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모더니즘 문학이 내용에 있어 정치적 급진성을 결여하고 있음은 경향 문학과의 대립이 배제론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35-38쪽

(위에서 계속) 경향 문학에 대한 비평적 태도는 박태원, 김기림 등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박태원은 형식 미학의 요소들인 문장론과 기교론으로써 경향 문학에 맞서고 있으며, 김기림은 관념주의와 문학 언어 경시를 사례로 들어 경향 문학의 편내용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경향 문학 비판의 핵심은 이데올로기 편향 비판이거니와, 이 비판을 통해 모더니즘 문학은 형식 미학을 자기동일성의 근간으로 자각하기 시작한다.-35-38쪽

박태원의 중편 <천변풍경>을 리얼리즘의 확대로, 이상의 단편 <날개>를 리얼리즘의 심화로 규정한 최재서의 평론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된 논쟁은 모더니즘 소설의 리얼리티관의 실제를 검증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리얼리티의 소설적 구현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양자의 공동 목표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양자 사이에는 한 걸음에 건너뛸 수 없는 문학적, 인식론적 단절이 가로놓여 있다. (중략)
리얼리티의 내용 확정이나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는 것은 최재서와 백철, 임화이다. 최재서는 <날개>에 구현된 리얼리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작품은 한 개의 아브 노르말(이상한)한 성격을 그린 것인 만큼 나는 거기에만은 리얼리티가 있다고 봅니다. 가령 그러한 아브 노르말한 성격이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면 리얼리티가 희박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아브 노르말한 성격이란 것도 역시 현대 문명이 낳아 놓은 것인 만큼 그러한 개성의 분화를 묘사한 것이니까 거기에는 리얼리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대의 리얼리즘이란 맑시즘과 프로이디즘의 양면이 있겠는데 (계속)-54-58쪽

그렇다면 이상 씨의 작품은 물론 프로이드적이겠지요." <문예좌담회> 조선일보(1937. 1. 1) (중략)
최재서가 리얼리티와 현실에 대한 모더니즘의 입장을 명백히 했다면 백철은 리얼리즘론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는 이얼리즘론의 혼미에 대해 "현대에 있어 리얼리즘이 그의 뚜렷한 본격성 그 일얼리티를 잃고 극히 완미해지고 분화되어 있는 적실한 반증"이라고 지적한 뒤,
"현재 우리들이 대하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그것이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라는 곳에 不眞實한 금일의 사회 현상이 있다. 그 일상적 현실은 현실적 진실을 의미하는 현실이 아니고 일종의 가상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백철 "리얼리즘의 재고", <사해공론> (1937.1)
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 진실"로서의 현실과 "가상적 표현"으로서의 일상적 현실의 대별이야말로 리얼리즘의 인식론적 거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중략)
한편 임화는 <날개>를 "순수한 심리주의"로, <천변풍경>을 "파노라마적 트리비얼리즘"으로 규정하면서, "터무니없는 주관, 엉뚱한 관념주의"가 리얼리즘 형식 가운데 포장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에 계속)-54-58쪽

(위에서 계속)이어서 그는 이상의 소설이 노정하고 있는 주관주의적 경향을 리얼리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비판한다. 비판의 방식으로 제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임화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파행적 리얼리즘이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혼동하고 디테일의 진실성과 전형적 사정 중의 전형적 성격이란 본질의 진실성을 차별하지 않고 현상을 가지고 본질을 대신하였다면, 주관주의는 사물의 본질을 현상으로서 표현되는 객관적 사물 속에 현상을 통하여 찾는 대신 작가의 주관 속에서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임화, "사실주의의 재인식",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73
최재서와 백철, 임화의 대립적 견해가 절충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이원조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이상의 작품에도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의 생활이 진실하게 그려져 있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결코 망발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는 모멘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임으로써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다. (아래에 계속)-54-58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이 절충적 입장은 최재서의 침묵으로 인해 논의의 심화에로 ㅇ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이 논쟁을 정리해 본다면 임화, 백철 등은 현상/본질의 변증법에 깇토하여 일의적 리얼리티, 목적론적 개념에 종속된 범주로서의 리얼리티, 목적론적 개념에 종속된 범주로서의 리얼리티 및 이데올로기 형상화 수단으로서의 언어관을 제시한 반면에 최재서는 이상의 <날개>가 다루고 있는 세계를 존재론적인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반영의 틀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리얼리티 세계로서 근대적 인간의 내면을 제시하고 있다. 최재서에 의해 내적 리얼리티는 그 존재론적 위상을 보다 명료하게 비평적 관점 속에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54-58쪽

'새로움'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개항기 이후의 근대사가 보여주는 바처럼 근대의 추동력은 새로움과 독창성의 추구이다. 개항기는 중세로부터 근대에로의 이행이라는 서구의 역사 모델과 유비 관계를 이루면서 '새로운 시대'라는 공통의 시간 의식을 생성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라는 규정을 자기 인식의 원천으로 하는 서구의 근대는 역사를 상대함으로써 이 새로움의 역사철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창조와 파괴의 연속으로 점철되는 근대의 유동성은 그 추동력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58-59쪽

한편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등의 문장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현저하게 문장론(문체론) 지향서을 띠고 있다. 문장과 문체의 강조는 소설을 언어학적 구조물로 인식하는 가장 뚜렷한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문장과 문체가 새로움을 보증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문체는 근대 개인주의와 함께 출현한 것으로서 문학적 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독창성의 근원에 해당하는 것이며, 개인 의식을 타자의 의식으로부터 구별짓는 양식이다. 이러한 문장, 문체의 정립을 통해서 새로운 리얼리티로서의 내면은 그 독자성을 확증받을 수 있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의 소설이 대체로 서사 충동(질량화 충동;molar impulse)보다는 문체 충동(분자화 충동;molecular impulse)이 우세하고, 그에 따라 플롯을 무시한 비유기체적 소설에로 경도된 한 원인을 문장론 지향성에서 찾을 수 있다.-67쪽

근대적 삶의 불확실성, 모호함, 가변성으로 인해 모더니즘 작가들의 소설은 그 구성에 있어 유기체성의 파괴라는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잏상, 박태원 등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단편(斷片)의 병치와 몽타주 수법 등은 모더니스트들의 근대 인식에 상응하는 기법들이다. 이러한 기법들을 통한 세계와 자아의 탐구는 당연히 통일된 감정이 아닌 아이러니로 귀결된다. 최명익의 <봄과 신작로>의 주인공 금녀첳럼, 자아는 이제 외적 현실에 대해 내면적 가치로서 자기 존재를 체감하기 시작한다. 자아는 근대적 삶의 유동성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자기 자신을 보존하거나 혹은 해체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모더니즘 소설에 나타나는 개별자로서의 주인공은 이처럼 보편자로서의 근대성이 유동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인물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는 내면과 외적 현실 사이의 균열을 이어주고 내면성의 열망을 상대화한다. 예컨대 시적 주술이 사라져 버린 "산문적 현실"에서 최명익 소설의 주인공들이 내면의 추상성으로 고립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의 기능 때문이다. 또 삶을 "수평적 타락"으로 만들어 버리는 (아래에 계속)-82-83쪽

(위에서 계속) 환멸의 현실에서 유항림 소설의 인물이 생존하는 힘은 내면의 충돌 감정 혹은 욕망이다. 이 양가적 감정 혹은 욕망의 균형이 상실되었을 때 아이러니가 사라지고 <마권>의 주인공은 완전한 유폐로서 동경행을 결정하게 된다. 李箱 소설의 자아는 "형해와 흔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지만, 자아를 그러한 상태로 만드는 세계의 위계 질서를 유희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소설 전체를 아이러니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렇듯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서 내면성의 유아론적 고립을 어느 정도 상쇄하는 것은 아이러니를 매개로 한, 외적 현실과의 최소한의 접촉 때문이다.
외적 현실의 표상(사실)은 모더니즘 소설에서 그것과 대칭 관계에 있는, 의미와 가치의 내면적 탐색으로 형상화된다. 사회적 근대성의 세계는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탐색은 자아의 내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소설에서 자아의 내면에서 탐색된 의미, 가치와 외적 현실을 이어주는 수사학적 가교가 바로 아이러니인 셈이다.-82-83쪽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경험의 양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상성의 경험이다. 동시대의 경향 소설이 대체로 일상성을 넘어서는 목적론적 시공간 구조를 소설의 기반으로 삼은 데 반해, 그러한 목적론이 결여된 모더니즘 소설은 일상성 그 자체를 소설적 시공간으로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 소설은 대체로 일상성을 소설의 토대로 삼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반정립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상적 현실은 모더니즘 소설 주인공의 주관적 경험이 펼쳐지는 시공간이지만, 그 주관성으로 인해 일상성이 변형, 전도된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특히 교환 가치와 실제적 합목적성이 지배하는 근대적 일상성은 모더니스트들이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인식론적 장애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근대적 일상성을 내면화하여 자기 동일성의 근간으로 삼을 때 얻을 수 있는 삶의 만족감은 오히려 이들에게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략)
근대인들에게는 일상의 순환적 시간이 근대적 삶의 유동성을 견디는 동력을 제공한다. 일상의 세 영역인 노동, 욕구, 쾌락의 결합 속에서 그들은 일상을 자기 실존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계속)-91-93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은 그와 같은 완결된 표현(피상성)을 가진 일상적 현실의 질서와 가치 체계에 권태를 느낀다. 권태는 특히 근대 소설 이후에 부각된 실존의 상태로서, 모더니즘 소설이 사회적 근대성과 맺는 부정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 된다.-91-93쪽

최명익은 독서 체험의 가치를 절대화하기 위해 일상적 현실의 종말을 그린다. <비오는 길>에서 사지관 주인의 느닷없는 죽음이나 <무성격자>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독서 체험의 가치 곧 내면성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소설적 책략이라 할 수 있다. 사진관 주인의 죽음이 다소 과장된 아이러니로 느껴지는 것은 그 책략의 필연성이 부각되지 못하고, 내면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99-100쪽

"내가 내 작품 ㅎ속에 무기력한 룸펜, 인텔리를 취급하는 것은 이분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투사>라는 <주의자>를 취급하는 것과 동등한 권한에서 나온 것으로 다만 이곳에서 우리가 명심하여 둘 것은 이 <오월의 훈풍>이 나의 이제까지 제작한 작품 속에서 결코 우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철수>라는 인물이 그분들의 어느 <주의자>나 <투사>보다도 훨씬 실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이다."
-박태원 <내 예술에 대한 항변> 조선일보 (1937.10.22)

박태원이 말하고 있는 "실재감"은 그러한 인간형의 편재성에 대한 지적인 동시에 심미적 리얼리티를 핵으로 하는 인간형에 대한 옹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실재감"이 바로 모더니즘 소설에 설정되는 인물의 가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인물은 근대인의 타자로 서 있는 심미적 근대인의 표상이다. 이들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 체계를 거부함으로써 '고독한 예술가'라는 심미적 근대인의 원형이 된 보들레르의 특서을 공유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설정된 인물은 우선 근대인의 자기 보존의 논리인 노동과 생산의 패러다임 그 맞은편에 서 있다. (아래에 계속)-106-107쪽

(위에서 계속) 노동자가 자본주의의 발명품인 것처럼 룸펜 인텔리도 자본주의의 부정적 발명품이다. 후자는 노동과 생산의 윤리를 저버림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은유가 된다.-106-107쪽

이상, 유항림 등의 소설이 도달한 그러한 고립과 자기 충족성의 존재 상태에서 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유희 충동(spieltrieb)이다. 오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전성의 이념과 실천적 이성의 지향점인 선(善)이 절대적인 진지함을 요구한다면 유희 충동은 심미성을 통한 자율호운 유동을 경험한다. 모더니스트들의 유희는 감각 충동(Stofftrieb)과 형식 충동(Formtrieb) 간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이상의 유희는 형식 내지 절대를 향한 형식 충동이 우세한 반면에 유항림이나 박태원의 경우는 소재 내지 제재를 향한 감각 충동이 우세하다.-109쪽

이상의 소설이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 충동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여전히 '근원에 대한 동경의 윤리, 순수함의 윤리, 자기 현존의 순수성에 대한 윤리'가 존재한다. "루소적 유희"라고 불릴 수 있는 이상의 이러한 유희 양상은 줄곧 "풍경의 근원, 중심, 초점"을 붇는 근대적 지성의 자기 이해로부터 유래하는 것일 터이다.
이상의 '루소적 유희'가 자책감, 슬픔, 향수 등의 정조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는 유며를 수반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중략) 문어체에 적합한 단어 특히 한자어를 서술이나 대화에 빈번하게 사용하여 과장과 의뭉스러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런 경우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전후한 모더니즘 소설에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상의 소설에서 한자어가 관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박태원의 소설에서는 그것이 유머를 낳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중략)
생활인의 정조인 명랑성에 대한 욕망은 박태원의 소설 세계 전반에 관철되고 있는 욕망이다. (아래에 계속)-113-115쪽

(위에서 계속) 모더니즘 소설의 다소 부박한 유희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전면 수용으로 이행하게 되는 동력은 처음부터 그의 소설과 문장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이행은 내면성의 추구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승인으로 나아간 과정과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 충동은 유항림 소설의 환멸의 유희와 대칭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 중간 지점에 전도된 진정성의 원천으로서 이상의 루소적 유희가 있는 것이다. -113-115쪽

관조의 한 요소인 침묵이 내면 의식 형성의 중요한 전제가 됨은 최명익의 소설 거의 전편에서 드러나고 있다. 침묵은 일상적 현실로부터 심미적인 거리를 두고 자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124쪽

1930년대 리얼리즘 소설이 이와 같이 환유 지향성을 수사학적 원리로 삼고 있는 데 반해 모더니즘 소설은 은유 지향성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
첫째, 모더니즘 소설은 대체로 보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이 인물은 주관적 경험과 개별적인 내면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중략)
둘째, 모더니즘 소설은 유기적 소설 구성보다는 몽타주나 병치 등의 단편화(斷片化) 기법으로써 스토리의 통일성을 해체한다. 모더니즘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서사성이 약화되는 것은, 인접성에 근거한 환유가 아니라 유사성에 근거한 몽타주, 병치 등에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서사는 발단이 결말을 포함하고, 결말이 발단을 포함하는 완결된 구조를 요구하는데, 모더니즘 소설은 그러한 완결된 서사에 대한 욕구를 폐기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셋째, 모더니즘 소설은 언어의 재현적 성격보다는 은유를 통한 의미의 확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내면 의식의 표출에 있어서 모더니스트는 재현 불가능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은유의 수사학은 그러한 난경을 극복하려는 수사학적 전략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128-129쪽

(위에서 계속)
넷째, 문장의 운용에 있어 모더니스트는 결합보다는 선택의 원리를 취함으로써 은유를 통한 새로운 리얼리티의 창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지적처럼 "새로운 은유는 새로운 이해를, 따라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할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운용하는 은유의 수사학은 내적 리얼리티의 창조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28-129쪽

모더니즘 소설의 시간 구조는 일반적으로 자연적 시간(time in nature), 객관적 시간, 사회적 시간의 속성이자 전통적인 소설의 시간 형식인 선조성의 거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전통적인 소설에서 시간은 서사 전개의 동력으로서 스토리에 종속되어 있다. 그 반면에 모더니즘 소설의 작가와 주인공은 선조적 시간의 무의미함에 권태를 느끼고 그 시간을 미적 유희를 위한 단편(斷片)으로 해체하려는 경햐이 강하다. (중략)
모더니즘 소설에서 서사섯ㅇ이 약화되는 한 가지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모더니즘 소설은 자기 경험의 바탕을 이루는 경험적 시간(time in experience), 주관적 시간, 개인적 시간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더니즘 소설에서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급격한 분열이 서사성을 파괴하듯이, 내면 의식에 상응하는 주관적 시간과 외적 현실에 상응하는 객관적 시간의 분열은, 스토리의 직선적 운동성에 근거한 서사적 시간의 성립을 방해한다.-136-137쪽

모더니즘 ㅎ소설의 시간 체험인 동시성의 본질적 요소는 시간의 공간화이다. 주관화된 현재적 시간의 발현 형식인 동시성이란 바로 시간적 인자의 공간화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공간화된 시간을 설정하고 있는 이상이나 박태원의 몇몇 소설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이 의미 있는 질적 변화를 초래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공간의 유동과 흐름이 -특히 최명익의 소설에서처럼- 인물의 내면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인공물로 가득 찬 도시의 유동적이고 혼란스러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에서 이 공간화의 효과가 극대화된다.-141쪽

모더니즘 소설의 작중 인물은 많은 경우 사회적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심리적 아포리아를 지니고 있다. 이 인물은 존재피구속성에서 벗어난 형상으로 나타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상태, 곧 내면성만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명제는 모더니즘 소설에서 이처럼 전도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모더니즘 소설의 작중 인물에게 부여되어 있는 내면의 형상을 중층적이라 할 수 있음은 그 때문이다. 이들은 단층적, 단선적 심리 구조보다는 중층적, 복합적인 심리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인물의 내면에는 그 기원이 불명확한 심상과 지각, 관념들이 혼재되어 있다. 모더니스트들이 전통적인 리얼리즘 기법을 거부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는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심오함을 포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78쪽

박태원의 소설은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립된 개인으로부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으로 이행한다. 초기 소설의 탈중심화된 인물조차 그 근저에는 어머니로 푯항되는 가족에로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소설과 구보씨의 일일>은 그 의미 이동의 분수령으로서,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불화가 후자에로 경사되는 계기를 이룬다. 이제 <천변풍경>을 중심으로 하여 안정된 세테 소설의 세계가 정칙된다. 예를 들자면 <골목안>은 그러한 세태 소설의 안정성을 얻고 있는 소설이다.-212쪽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내면성은 유폐적 실존으로서의 근대적 개인의 위상을 드러내고, 소설의 형식 미학을 개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경향 문학의 타자로서 모더니티 지향성의 한 갈래를 형성한 모더니즘 소설은 부정성으로써 사회적 근대성을 비판하였거니와, 그 비판의 토대 역시 합목적성의 대항 형식인 자율적 내면성이었던 것이다. 근대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 관한 최근의 비판적 논의에도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이 구축한 내면성의 세계는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하리라 생각한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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