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여성 - 젠더와 한국의 민족주의
최정무 외 지음, 박은미 옮김 / 삼인 / 2001년 8월
품절


벨 훅스(bell hooks)는 피식민지국 여성들이 지배국에 의해, 또 같은 종족의 남성들에 의해 이중으로 식민화된다는 통찰력 있는 견해를 내놓는다. 흑인 민족주의의 경험을 검토한 벨 훅스는, 피식민지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식민 지배자의 입장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지배국인 미국을 모방하는 가운데 피식민지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적 주체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을 억압한다. 이들은 거세되고 유아화된 자기 이미지를 떨쳐 버리고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을 포함한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려 한다. 즉 식민지 남성과 식민 지배자는 식민지 여성을 억압하는 동지적 관계를 이룬다. 달리 말하면 민족의 남성성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내거는 반식민 민족주의의 신성한 사명감 속에서 식민지 여성은 이중의 억압을 받는 것이다.
-최정무 <한국의 민족주의와 성(차)별 구조>-30쪽

정권에 저항하는 편에 서 있는 한국의 남성 민족주의자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물질적으로 위위에 있으며 남성적인) 미국 문화에 친숙하므로 지배적인 외세에 동조하기 쉽다는 이유 때문에, 이 여성들에게 여성 혐오적인 시선을 보낸다.
-최정무, 위의 글-45쪽

한승조는 또 단군의 휴머니즘과 함께 유교의 민본주의 사상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중략) 민주주의에 대해 온정주의적이고 도덕적인 특징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정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민본주의라는 이념에는 개념상 몇 가지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민본주의에는 누가, 어떤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지를 결정하고 실행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침묵은 토크빌이 언급했던 관리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정치 과정에 민중이 참여할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민중은 당면한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면 탈정치화될 것이다. 게다가 유교 이념은 정치가 민중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민중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요소가 갖춰지지 못한 민본주의는 개인간의 평등에 기초한 민주적인 정치로 나아가지 못한다.
-문승숙 <민족 공동체 만들기>-72-73쪽

바라건대, 남성에 대한 실망과 분노 또한 개별적인 남성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남성성을 창출해 내어 승인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국가, 그리고 그렇게 실행되도록 성적 차별을 요구하는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는 에너지로 변형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투쟁의 목표는 남성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구하는 것, 그것을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 목표는 남성과 여성 양자를 위한 더 나은 세계, 착취적인 위계 질서나, 여성을 배제하고 상품화화하는 일이 '잊혀진 과거의 기억'이 될 수 있는 그런 세계의 수립이어야 할 것이다.
-일레인 김 <남성들의 이야기>-151쪽

이 글에서 나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현재 한국의 담론을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첫째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침묵이 일본 정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에 의해서도 조성되어 왔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둘째로, 여성의 성에 관한 가부장적 코드와 결합된 민족주의 담론이 어떻게 남성 우월적인 주체 위치에서 위안부 문제를 구성해 왔는가를 조명하였다. 이 결과 위안부 문제는 성애화된 민족의 문제(a matter of sexualized nation)로, 민족주의화된 성의 문제(a matter of nationalized sexuality)로 축소되어 왔다. (아래에 계속)-175쪽

(위에서 계속) 이와 같은 재현은 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있어서 생존자 여성들을 주변화시켰으며, 그들에게서 일생에 걸친 수치와 침묵 그리고 고통이라는 짐을 덜어 주지 못하였다. 이렇게 민족이라는 이름하에서 위안부 여성들이 여전히 희생자에 머물렀고 그들의 성이 형상화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한 몸'으로 통일된 것처럼 가정되는 민족주의의 틈새와 간극을 발견하게 된다. 민족주의 담론은 위안부를 주된 과제로 삼아 그것과 씨름했다기보다는, 위안부 문제를 전유함으로써 자기 논리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하여 왔다.
-양현아 <한국인 '군 위안부'를 기억한다는 것>-175쪽

군대의 질서, 규율 사기, 전시 대비 태세 등을 위협한다고 보이는 기지촌 내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 사령부 측은 한국 정부에 기지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에 협조해 달라며 압력을 가해 왔다. 1971년 늦여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합동위원회는 '군 민 관계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기지촌 문제를 놓고 논의할 여러 명의 '패널'을 구성하였다. 한국 정부는 '정화'(purification) 계획을 지휘하기 위한 기지촌청결위원회 (BUCUC, base-community clean-up committee)라는 청와대 직속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들을 중심으로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는 현지 한국인과 미국인 병사에게 인종 차별주의가 미치는 해악을 알리고 성병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캐서린 문 <한미관계에 있어서 기지촌 여선의 몸과 젠더화된 국가>-182-183쪽

주한미군 당국은 또한 한국인 매춘 여성들을 미국 병사들 사이의 성병 감염의 주요 원천 혹은 '저장고'라고 몰아붙이면서, 한국 정부와 함께 감염된 여성의 등록과 성병 검사, 격리 관리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한국 정부가 맡은 일은 미국인 병사의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하여 기지촌 매춘 여성의 등록 및 의무적인 신체 검사, 격리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보건사회부, 외무부, 내무부, 법무부, 경찰청 모두가 이 여성들을 '정화'시키는 일에 상당한 돈과 에너지를 소비하였다. 한국 정부는 1971-1972년 사이 기지촌 내의 건강과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총 3억8천만원을 할당하였는데 이 중 2억2천400만원(1971년 당시 각각 100만 달러와 60만 달러에 해당)은 기지촌 여성의 성병 예방과 치료에 충당되었다. 이 돈은 성병 진료소를 개설하거니 시설을 개선하고, 여성에게 성병 '교육을 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병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항생제를 '대량으로 접종 투여'하는 일뿐만 아니라 성병 검사를 위해 여성을 강제로 모이게 하는 것 같은 정부의 활동에도 사용되었다.
-캐서린 문, 위의 글-184-185쪽

사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 제7사단(1955년 이후 한국에 주둔했던 육군 2개 사단 중 하나)과 3개의 공군 비행 대대가 떠난 데 충격과 공포를 나타냈다. 1971년에 7월 1일에 보도된 <코리안 헤럴드(Korean Herald)> 기사에 따르면, "미군 2만 명의 철수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주요 부문들(정부, 군사, 입법부, 언론, 일반대중)에서는 미군 감축이 너무 갑작스럽고 성급하며 (북한의 반응을) 도발하는 행위라며 반대하였다. 야당 국회의원들까지도 대중 시위에 참가하였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새로운 태도가 미국이 한국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며 공포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에 미군은 기지촌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를 내보임으로써, 한미간의 우호와 협조, 공존에 미군이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지 한국인들에게 증명하고자 했다. (아래에 계속)-193-196쪽

(위에서 계속)
한국 정부의 관점에서 볼 때, 매춘 여성들은 주한 미군측이 일상 생활을 개선하고 기지촌에 대한 통제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략) 한국 정부는 소위 공적 채널이라 불리던 것들로는 미국의 정책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국민 대 국민의 관계'라는 과감한 캠페인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중략)
한국 정부의 관점에 따르면, 기지촌 매춘 여성은 그들이 성적으로 접촉하는 수많은 미군에 대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따라서 매춘 여성들을 행실이 바르지 못한 외교관을 행실이 똑바른 외교관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 '정화 운동'의 임무였다.한국 정부의 '정화 운동'을 감독했던 청와대 비서관은 기지촌 매춘 여성에게 올바르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인터뷰에서 그는 기지촌 지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아래에 계속)-193-196쪽

(위에서 계속) 그는 매춘 여성들에게 "어떻게 일본이 무(無)나 다름없던 상태에서 위대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몬한 뒤, 1945년 이후 미 점령군에게 몸을 팔았던 일본 매춘 여성들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한 미군하고 성 관계가 끝나면 일본 매춘 여성은 (돈을 벌려고) 다른 미군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미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본을 재건하는 데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런 일본 매춘 여성의 정신이 나머지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일본을 재건하는 힘이 된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분명 기지촌 매춘 여성의 성 노동을 애국심 발로의 한 가지 중요한 형태로 설정한 것으로 하급 관리들은 이후 여성들에게 실시한 정규 '교육 강좌'에서마다 그런 말을 반복하였다. 예컨대 의정부 지역에서 이루어진 한 강좌에서는 여성들에게 "국익을 담당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캐서린 문, 위의 글-193-196쪽

한국 정부가 사적인 개인, 특히 여성과의 성적 관계를 외교 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여성의 자아를 희생하는 것을 기대하고 정당화해 온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략) 한국의 역사, 민담, 문학 작품들에는 이러한 기본 구상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변형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 삶, 몸, 그리고 개인적 욕구까지도 희생하는 소녀와 여성들이야말로 영웅이요 순교자요 애국자였다. 1960-1970년대에 여성들은 남한의 경제적 '기적'을 선도한 경공업과 제조업 수출 산업 분야에서 비숙련, 저임금 노동자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안보 전선에서도, 시골에서 상경한 수천 명의 가난한 소녀와 여성들이 미군이 주는 달러를 벌어 외화를 증대시키고 그들에게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미군에게 성을 파는 노동에 몸을 저졌다. 197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이 여성들은 한국 정부에 의해 '애국자'라고 찬양되었다.
-캐서린 문, 위의 글
-캐서린 문, 위-200-201쪽

1971년 안정리에서 발생한 대중 소요와 인종간의 폭력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서 시작된 기지촌 정화 운동은, 많은 기지촌 매춘 여성들이 누려 오던 '거칠고', '자유스러운' 시대가 끝나고 매춘 여성들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한미양국에 의한) 공식적 재조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1971년 7월 기지촌 정화 운동이 개시된 후 한국 매춘 여성들은 더 이상 전쟁과 가난이라는 공적인 위기와 박탈 때문에 매춘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대신 정화 운동을 거치면서 매춘 여성들이 미군에게 제공하는 개인적 서비스는 그들을 '민간 외교관' 또는 '애국자'로 만들었다. 게임의 법칙 역시 바뀌었다. 매춘 여성들은 더 이상 스스로나 가족의 생계를 근근히 꾸려 가는 강인한 여성이 아니라, 미군과 현지 당국으로부터 몸과 일 그리고 집(방)까지 체계적으로 검사와 통제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캐서린 문, 위의 글-209쪽

매춘 여성들의 성 노동을 한미관계에 있어 '애국적'인 행위라고 이야기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관련하여, 인터뷰에 응한 매춘 여성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기지촌 여성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 노동이 민족주의적이라거니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느끼지 않았을 뿐더러 대부분 단지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매춘을 했다고 이야기하였다. 박 여인이라는 한 기지촌 여성은 "그건 창피한 일이죠. 어떻게 그 일이 애국적인 희생일 수가 있겠어요?" 라고 말하였다. 인터뷰한 여성 중 몇 명은 애국심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애국심에는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교육도 많이 받고 준비도 적절히 하면서 여러 가지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냐, 자신들의 성 노동이 한국의 안보에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래에 계속)-211-212쪽

(위에서 계속)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들의 몸이 이용되고 있다는 '국가 안보'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행동이 대체로 매춘 여성들의 육체적, 경제적 요구 조건을 무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현장 매춘 여성이었다가 여성 운동가가 된 김연자 씨는 한국 정부와 미군이 내세운 전제 조건, 즉 국가 안보 요구에 대한 공공연한 선언은 기지촌 여성들의 실제적인 요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인터뷰한 여성들 모두 자신들이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은, (한국 전쟁 이후) 북한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클럽 업주와 포주, 현지 한국 경찰, 성병 관련 담당 공무원 그리고 미군 기지 세력의 착취와 학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캐서린 문, 위의 글-211-212쪽

미군기지가 철수된다고 해서 이 여성들에 대한 학대와 착취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착취의 근원은 바로 철저한 계급 질서의 형성, 여성을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천민으로 간주하는 유교 도덕 규범, 그리고 여성과 소외 계층의 목소리와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정치 체제와 문화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로부터 성적 노동을 강요당했던 위안부 여성들의 인권 침해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 내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운동가 집단들조차, 자신들의 벌이는 운동에서 미군 기지촌 매춘 여성들의 곤경과 투쟁의 명분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은 다신들이 과거에 받았던 피해와 현재 정의에 호소하는 운동을 미군 기지촌 매춘 여성들의 운동과 동일시하는 데 격렬히 항의하기까지 한다. '이안부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매춘을 하는 그런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쓰레기 같은' 여성들과 관계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캐서린 문, 위의 글-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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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6-1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대해 막연하게 거부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읽어보면 다 맞는 얘기긴 한데... 지금 상황만으로도 괴로운데, '페미니스트' 까지 되면 사는 게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는 걸까?
이 책에서는 캐서린 문의 1971년 기지촌 정화운동 이야기가 대박이었다. 블랙코미디지,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