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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기다렸던 해리 포터 7학년을 받아든 순간, 어, 하고 놀랐던 것은 이 소설의 첫머리를 여는 글이 희랍 비극 <코에포로이 -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의 인용이었기 때문이다. 희랍어를 영어로 번역한 글의 경우에는 라임을 맞춘답시고 이상한 짓을 해 놓은 경우가 많아서, 롤링의 인용문보다는 아래에 있는 천병희 선생의 한국어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아 이 집안에 뿌리 내린 저주여.
재앙이 내리치는 피묻은 채찍의 곡조도 없는 노래 소리여.
슬프도다, 참을 수 없는 불행이여.
슬프도다, 가실 줄 모르는 고통이여.
고통을 멎게 할 약은 집안에 있노라.
바깥의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만이 피의 불화를 내쫓을 수 있음이라.
지하의 신들께 이 노래를 바치나이다.
지하에 계신 축복받은 자들이여.
두 남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이 승리하도록 도움을 보내 주소서."   
                                           - 아이스퀼로스,<코에포로이> 466-478행

이  인용문을 해리 포터의 모험과 연관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덤블도어의 죽음 이후 마법 세계를 뒤덮은 끔찍한 불행을 해리 포터를 위시한 어린 마법사들이 해결한다는 암시겠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외에도 몇 가지 유사점이 더 보이는데, 첫 행의 "이 집안에 뿌리 내린 저주"는 이그나투스 페버렐로부터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데쓸리 할로우"와 통한다. 이런 식의 과거와의 연결은 이 작품 안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그린델발트-볼드모트로 이어지는 다크 위저드 계보가 그러하고, (알버스,애버포스,아리아나) - (제임스,세베루스,릴리) - (해리,론,허마이오니) - (제임스,A세베루스,릴리)로 변주되는 '죽음에 맞선 3형제'이미지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인용문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진짜 이유는<코에포로이>가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부정"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희랍 비극은 3부작으로 구성되지만, 현재 3편이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이 작품 <오레스테이아>3부작 밖에 없다. 1부 <아가멤논>은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 집에 돌아온 희랍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이고, 2부 <코에포로이>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누나 엘렉트라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정부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이며, 3부 <에우메니데스>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의미인데, 사실은 복수의 여신들을 가리킨다.) 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나 어머니의 살해자가 된 오레스테스의 고통스러운 방랑 이야기이다.

나는 <오레스테이아>3부작의 이러한 내용이 해리 포터의 어머니  릴리 에반스 포터의 부정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한다. 즉 릴리 포터는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인 불륜은 아니었다. 스물 한 살 나이로 죽기까지 그녀는 제임스와 해리에게 충실했으며, 이제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다크 위저드에 대한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한 평생 그녀에게 충실했던 그 남자의 팬인 나에게는, 이러한 상상이 큰 위로가 된다. 그래, 세베루스, 그건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 같은 게 아니었던 거야. 그러니까 제발 이제는, 그 고통스러웠던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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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치 2008-02-2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인용문도 잘 보고 가요~

mizuaki 2008-02-2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님, 이 외진 곳까지 잘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받은 덧글이라 무척 기뻐요. 고맙습니다. ^^
 

예전에 읽은 소설 중에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꽤 길게 다룬 글이 있었는데, 작가도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건 '열사의 장례식' 어쩌고 하는 문구 뿐. 그 소설을 읽고 기형도란 시인이 궁금해서 친구 방에서 시집을 빌린 게 대학교 3학년 때던가? 그 때는 무슨 시들이 이렇게 어려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오늘 찾아 읽은 <입 속의 검은 잎>은, 왠걸, 너무 좋다.

이 시에 나오는 '열사'의 이름이 이한열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다. 6월 항쟁 기념 사이트를 뒤적뒤적 읽고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로를 꽉꽉 메운 교통 체증과 최루탄의 매운 냄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대학 캠퍼스 안에 있어서 데모가 있는 날은 오전 수업만 했다. 절대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곧바로 집에 가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뒤로 하고 교문을 나서며, 나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는" 대학생들을 소리 높혀 욕했다. 그 때는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엄마는 박종철의 고문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며 "네가 쓸 데 없는 소릴 하고 다니면 엄마 아빠가 잡혀 가서 그렇게 고문을 당하게 된다"는 말로 어린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 위협의 효과는 꽤 오래 가서, 대학 시절에도 나는 정치 운동 비슷한 냄새만 나면 바짝 얼어서 도망 다녔다.

권력의 야만 앞에 피 흘리며 쓰러졌을 때, 박종철과 이한열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영원한 스무 살로 남아 있는 그들의 얼굴은 아무래도 아이 같기만 해서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파 온다. 미안하다. 그 때는 몰라서 미안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그 때도 겁쟁이였고 지금도 겁쟁이인 나 자신이 너희의 아름다운 젊은 얼굴 앞에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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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쯤 전부터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지난해였다. 테크놀로지의 혁명! 2000년대 최고의 발명품! 전기 모기채 되겠다.


5년 전 한강의 배후습지 영등포로 이사올 때 덥고 습한 여름은 각오했지만, 아파트 13층의 높이 정도는 가볍게 극복하고 올라오는 쬐끄만 모기떼의 무차별 공격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크기가 작아서 물린 자리가 크게 덧나지 않는 대신 잡기도 까다롭다. 소름 끼치는 애~앵 소리에 눈을 떠 잠이 덜 깬 머리로 서투르게 파리채를 휘두르다 좌절하여 다시 잠들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정지 상태의 모기를 발견해서 살충제로 반쯤 기절시켜 놓은 후 다시 필살의 파리채 휘두르기라는 복잡한 시스템으로는 도무지 공격의 효율성이 높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품! 이전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다! 모기의 진로 방향에 살포시 가져다 대기만 하면 푸른 불꽃과 치지직 소리와 아련한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상황 종료 되겠다. 오늘 새벽에도 네 마리나 잡았다. 피로 배가 빵빵한 네 구의 시체를 나란히 늘어놓고 기술의 진보에 경의를 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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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가라데 만화 "공수도 소공자 코히나타 미노루"가 읽고 싶어졌다. 대학 가라데 부를 다룬 평범한 학원 스포츠물인가 싶다가 어느 사이에 K1을 연상시키는 프로 격투기 세계로 옮겨가는 이 만화는 무수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이 깔끔하다는 것, 미형인 데다 쿨한 캐릭터가 많이 나온다는 것, 진행 방식이 건전하면서도 산뜻하다는 것, 개그 센스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보다는 조연들이 멋지다는 것, 끈적끈적한 삼각 관계나 진부한 악당이 없다는 것 etc.

한 번 읽었던 내용임에도 푹 빠져서 저녁까지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테레비를 켰더니 <2007 K1 World Max> 중계를 하고 있다. 기분 좋은 우연. 그러지 않아도 만화 보면서 이게 궁금했었다고. 격투기 중계를 보는 것은 <PRIDE 남제 2006>에 이어 두 번째다. 전에는 그다지 재미있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만화를 본 후라 그런지 이번엔 아주 즐거웠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아빠가 권투 중계를 보고 있으면, 저런 잔인한 걸 잘도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인간이란 원래 잔인하다는 것, 약한 놈을 두드려 팰 때 희열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세상엔 글러브를 끼고 룰에 따라 하는 격투 게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잔인한 일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돈과 권력이 자행하는 수많은 더러운 짓들에 비하면 링 위의 3분은 차라리 귀엽다. 그래서 요즘 나는 격투기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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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15권 양장본 세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역사를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를 보는 것, 타인의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 자기 중심적 인간인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유명한 <로마인 이야기>를 이제야 읽기 시작한 것은 방대한 분량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지만,  '일단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 시기로 딱 다섯 권만 읽자."하는 생각으로 골라온 2~6권은 생각보다 부담 없이 빨리빨리 읽혔다. 이 작가는 성실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능이 있다. 명불허전.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읽기 전에 기대하지 못했던 즐거움은, 이 2천 년 전의 대제국의 모습에 자꾸만 현재의 아메리카 제국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역사 시대 대부분을 중화 제국의 변방에서 보낸 자들의 후손으로, 현재 아메리카 제국의 변방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미국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실은 저자인 시오노 씨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고, 그것은 이 책이 가진 특별한 매력으로 연결된다. 

"특히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의와 비정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범죄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라도 열렸다면, 한니발이 전범 제1호가 되었을 것이다. (중략)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강화는 엄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아니었고, 하물며 정의가 비정의에 내리는 징벌은 전혀 아니었다. 인류가 결코 초탈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악업을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정의와 비정의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구분했다고 해서 전쟁이 소멸한 것도 아닌데."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서 아메리카 제국의 도쿄 재판에 대한 은근한 야유를 읽어내는 사람은 나뿐일까? 포에니 전쟁 이후 자영농이 몰락하고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며 군사 대국화가 가속되는 로마는 1,2 차대전 이후의 미국을 연상시킨다.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끊임없이 침략 전쟁과 내정 간섭을 시도한다는,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의 비판은 오늘의 대제국 미국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끈질기게 저항하는서유럽 '야만인들'은 2천 년 전의 베트콩과 알 카에다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로마의 패권 체제 유지에 협력해야 한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비용이다."라는 키케로의 주장은 그대로 한국과 일본에 군대의 주둔 비용을 요구하는 미국의 주장과 겹쳐지지 않는가?

시오노 씨에 대한 제국주의자라는 단정은 그가 이런 류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혼란 속의 자유냐 제국 지배하의 질서와 풍요로움이냐의 문제는 2천 년 전의 로마 속주에서나 21세기의 한국에서나 쉽지 않은 문제인만큼, 좀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심하다 싶은 찬양, 특히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서만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해 아메리카 제국의 모범 속주가 된 것은 시오노 씨가 8세 때, 군대조차 인정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양가집 아가씨에게 '군사 독재'에 대한 증오란 이해 불가능한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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