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에는 공부 좀 하다가 후반에 좌절해서 막나가버린 10월. 그래도 책 읽은 건 정리를 해 두자. 

김대행 <노래와 시의 세계>, <시와 문학의 탐구>. ....그러니까 공부도 좀 했다고.   

 

 

 

 

 

 드레슬러 <텍스트언어학개론>, 반데이크 <텍스트학>, 냅&워킨스 <장르, 텍스트, 문법>, 박태호 <장르 중심 작문 교수 학습론>. 위와 같음.  

 

 

 

 

 

 이영미 <한국대중음악사>, 프리스 외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 전공 공부랑 전혀 무관하지는 않지만 보는 동안에 슬슬 다른 쪽으로 새기 시작했다. 특히 저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는 엄청 엄청 재밌더라. 난 어쩔 수 없는 딜레탕트였고, 그걸로 지도교수님께 들입다 혼났고, 그 사건을 즈음하여 비뚤어지기 시작해서 학교도 잘 안 가고 마구 타락함.

 

 

 

 

 

 

  나의 베스트 도피처 미야베 미유키. 봐도봐도 재미있는 <괴이>, <이유>, <나는 지갑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3권만 남아있어서 3권만 다시 본 <모방범>. 덤으로 미야베 여사가 추천한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상>도. <모래그릇>이 보고싶구나.

 

 

 

 

 

 그 와중에 동생집에도 하루 갔다. 완비되어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 시리즈 중 이번에 본 것은 <호수의 여인>. 모즈메 타카유키 씨가 아르바이트하는 술집 이름이 <레이디 인 더 레이크>였었지. <빅 슬립>이나 <안녕 내 사랑>보다는 좀 마음에 들었다. 챈들러 씨도 쓰면서 솜씨가 느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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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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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올라온 평범하지만 꼭 평범하지만도 않은 청년 또는 소년이 겪은 슬프지만 꼭 슬프지만도 않은 죽음과 삶, 연애와  일상에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내가 처음으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기도 하다. 이걸 계기로 푹 빠져서 도서관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조리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과는 달리 갖고 싶은 걸 그다지 참지 않던 시절이라 용돈을 털어 열심히 사모으기도 했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다.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의 병실에서 오이를 깎아 먹는 이야기 같은 것들. 죽음을 앞둔 서점 주인과 말없이 마주앉아 먹는, 간장에 적신 오이의 맛. 미도리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 중에 계란말이용 후라이팬를 사기 위해 브래지어 살 돈을 써버려서 덜 마른 브래지어를 입고 다닌 적이 있다는 것도 묘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간사이 풍의 산뜻한 계란말이와 눅눅한 브래지어.  미도리가 다녔던 여학교는 엄청난 부자 학교여서 그애는 가난한 동네 출신이 자기 밖에 없다는 것에  컴플렉스를 느꼈었다. 지바 현에 사는 아이가 같은 컴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아서 좀 친해졌는데, 걔네 집에 놀러갔더니 대저택의 정원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소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더라나. 이 이야기가 유달리 우스웠던 것은 나에게도 부자 동네 학교에 위장전입으로 들어간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경구로는 비스킷 통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인생이라는 비스킷 통에는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섞여 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맛없는 것만 남는다. 맛없는 걸 먹다 보면 맛있는 것도 나온다. 또다른 경구로 "남들과 같은 것만 읽고 있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법이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짓은 안 해."라는 말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남들과 같은 생각을 못하는 게 인생을 얼마나 고달프게 만드는지를 알게되었고, 스스로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침울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멋진 남자 나가사와 선배의 저 말은 여전히 멋지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 시인은 스무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록가수는 스물 넷에 죽는다는 말도 여기에 나왔었나? 삶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관찰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인생은 확실히 조금쯤 살기 쉬워질 것이다. 

이러한 관찰자적 거리감과 담담한 태도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깨에 힘주고 무리해서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삶이란 건 살다 보면 그럭저럭 살아진다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오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 무뚝뚝하고 데면데면하지만, 그게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친구들 중에는 "스무 살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지금 다시 보면,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이도 있지만, 무사히 안정된 일상에 안착한 그와 달리 여전히 삶이 버겁기만 한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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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독서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를 보니 영 보잘것없다. 시간을 들인 게 아닌가? 그러고보니 요즘 대부분의 시간은 교양수업 예습복습에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애당초 나는 전문인이 될 자질이 없었던가? 그저 이것저것 뒤적이는 게 좋을뿐. 

그 와중에도 전공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게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읽었는데도 해석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앞으로  딜타이랑 가다머를 읽어야 한다는 것만 알겠다. 갈 길이 멀다.   

 

 

 

 

 

 

 

프롭의 <민담형태론>은 너무너무 유명한 책이라 꼭 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민담의 형태와 기원>도 같이 읽으려고 했으나 바빠서 결국 못 읽고 반납. 참고삼아 빌려온 <러시아민담>은 재밌더라. 난 옛날부터 세계전래동화 류에 약했다. 

  

  

 

 

 

 

 

박수밀의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조금은 의무감으로 읽었고, 읽으면서는 고만고만하게 재미있었다. 감상을 한 마디로 한다면, 역시 한문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번역이 조금 난감했고 키케로의 <수사학>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번역이었다. 읽고난 후 감상은 우리가 잘난척 하고 있는 작문교육이란 게 2500년 전에 하던 것보다 낫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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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박수밀 지음 / 태학사 / 2007년 5월
절판


조선조는 거대 담론으로 통하는 시대였다. 추상적이며 보편적 언어로 세계를 규졍했다. 미미한 존재는 몰가치했으며 일상의 사물들은 관심 너머에 있었다. 존재는 道를 드러낼 때 의미를 지녔으며 거창하고 고상한 것만이 인정받았다. 고정된 가치체계와 전범을 숭상하고 절대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였다.
그런데 어느 시저기에 이르자 전범이 부정되고 주류 이데올로기가 도전받는다. 이른바 이단 서적이 암암리에 유행하고, 주변의 존재들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개별적 존재의 발견, 하찮은 사물에 대한 관심, 자연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가냘프고 감성적인 속성의 小品文이 한 흐름을 혀성한다. 무엇보다 소품은 몰가치해 보이는 세계를 은밀히 드러내어 정통 고문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체상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16쪽

일찍이 주희는 도연명과의 만남을 두고 "나는 천년 뒤에 태어났지만 천년 전 친구와 벗한다네."라고 읊은 바 있다. 맹자 또한 천하의 좋은 선비와 벗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못한다면 거슬러 올라가 벗하라 가르쳤다. 이후 상우천고(尙于千古)는 수많은 중세 학자들에게 우정을 가늠하는 시금석과도 같은 용어가 되어 왔다. (중략) "논어", "맹자" 등의 경서, "사기"를 비롯한 각종 역사서에서는 늘 友道를 언급하며 바람직한 우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43쪽

마음에 꼭 드는 시절을 만나 마음에 꼭 드는 친구를 만나서 마음에 꼭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꼭 맞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인데 그런 일이 어찌도 적은가. 일생을 통해 몇 번쯤이나 될까?
(필자주: 이덕무 "청장관전서", '선귤당농소" 値會心時節 逢會心友生 作會心言語 讀會心時文 此至樂 而何其至稀也 一生凡幾許番)-48쪽

연암은 또다른 글에서 벗에 대해 풀이하기를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양 손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벗은 '제2의 나(第二我)'이자 자질구레한 일까지 두루 도와주는 사람, 곧 '주선인(周旋人)'이라 하였다. 제이오(第二吾)는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중국에서 펴낸 "교우론"에서 붕우의 소중함을 역설하기 위해 한 말이다.
(필자주: 박성순, "우정의 운리학과 북학파의 문학사상", "국어국문학" 129, 국어국문학회. 2001. 12. 263쪽. 조선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秦請使로 연경에 갔을 때 명나라에 와 있던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교우론"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교우론"을 읽은 많은 지식인들이 벗은 '제이의 나'라는 견해를 수용했던 듯하다.)-51쪽

글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성인의 도를 싣는 그릇이라는 재도지문(載道之文)과 글은 도를 꿰는 그릇이라고 하여 상대적으로 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는 문이관도(文以貫道)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압축하는 용어다. 조선조 학자들은 글은 성인이나 현자의 정신세계를 담은 그릇으로 생각했다. 곧 글이란 도를 구현해주는 수단으로 인식하여 글에서 성현의 마음을 읽어 성현의 도를 체득하고자 했다. 도는 인간과 사물의 마땅한 것으로서, 도덕과 윤리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글은 성정지정과 온유돈후, 민심교화를 담아야 한다는 효용론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가졌다. 글은 언제나 도의 종속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초정(인용자주-박제가)은 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꾼다.

신은 글(書)이란 도와 더불어 생긴 것이라 들었습니다. 도는 형체가 없기에 글로써 보였고, 도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기에 글로 인도하였으며, 도는 언어가 없기에 글로써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물을 떠난 물고기가 없듯이 또한 글을 떠난 도는 없습니다. 글이란 하늘에 있어선 해와 별이 환히 빛나는 것이요,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도는 것이며, (아래에 계속)-239-240쪽

(위에서 계속) 구름과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땅에 있어선 강물이 흐르고 산악이 치솟는 것이며, 초목이 피고 지고 벌레와 물고기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있어선 신체의 온갖 동작과 머리카락의 모습이며 의복과 음식, 움직임과 말하는 모습이니 모두 글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필자주: "六書策": 臣聞 書者與道俱生者也 道無形體 則書以視之 道無方所 則書以導之 道無言語 則書以達止 故世無離水之漁 亦無離書之道矣 其在天也 則日星之昭明也 寒暑之消長也 雲霞之絢爛也 其在地也 則江河山丘之流崎也 草木蟲魚之榮落變化也 其在人也 則身體毛髮屈伸偃仰之態 衣服飮食動靜語默之象 無非書也
-239-240쪽

글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양수의 말과 같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 가능할까?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훌륭한 문장가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배치에 주목한다. 글이란 도(내용)를 드러내는 수단이라 인식했던 조선조에 형식은 단순히 내용을 실어 나르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문의 독자적 가치를 모색하는 조선후기의 많은 문인, 학자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형식적 장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른바 사법(死法)이 아닌 활법(活法)을 못개했으며 편장자구(篇章字句)의 구성에 관한 이론들을 세워 나갔다.
(필자주: 정민 "고문관의 세 층위와 활물적 문장 인식", "시학과 언어학" 1, 시학과 언어학회 2000)-267쪽

강력한 규범과 맞서기 위해선 글쓰기 배치가 중요하다. 말하려는 주제가 심각할수록 억압이 크게 작동하는 사회일수록 글의 배치, 곧 형식은 내용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글의 배치에 따라 설득의 효과가 달리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럴 경우 연암은 주변을 가볍게 위장하거나 혹은 우언의 방식을 즐겨 쓴다.-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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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0-0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세기 연암 그룹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돼 있는 것 같다. 역시 좀 더 이전으로 올라가 보지 않으면......
그건 그렇고, 원문 타이핑하다가 어라? 하고 생각한 게... 모르는 글자가 한 개뿐이었다. 이거 기뻐해도 되는 거지? 연암 그룹이 쉬운 글자를 쓰는 애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도 반 년 동안 좀 는 거 맞지? ^^;;
 
수사학 -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7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안재원 편역 / 길(도서출판) / 2006년 9월
품절


[27장]
아들: 연설가의 힘에 대해서 이제 다 설명하셨으므로, 연설 구성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버지: 연설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중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감정이 서론과 결론에서 자극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분은 사실 기술이고, 세 번째 부분은 논증인데, 이는 연설에 신뢰감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강조는 원래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종종 연설의 시작에도, 하지만 연설의 마무리에서는 언제나 사용해야 하는 표현 방법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뭔가 입증되었거나 반박되었을 때, 이 경우 [강조]가 요구되는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강조해야 한다. 강조는 감정이 실린 격렬한 논증이기 때문이다. 논증이 증명을 목적으로 삼는 반면, 강조는 감동을 목적으로 삼는다.-134쪽

[57장]
어떤 일들에서 그것이 상실되었거나 잃어버릴 위험이 있을 때, 강조는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행복했다가 불행해진 사람보다 더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경우는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행복한 처지에서 불행으로 추락했다면, 어떤 사건이든 이는 그 자체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떤 사람의 총애를 잃고서 쫓겨난 경우, 어떤 [귀중한] 것을 상실 중에 있거나 이미 상실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불행 속에 처할 것인지가 간략하게 표현된다면 사람의 심중을 뒤흔들게 된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표현해야 함은] 특히 남의 불행 때문에 생겨난 눈물은 금방 메마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역자주-이 토포스는 지나친 감정 표현을 경계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고, 수사학자 Apollonius의 말이라고 전해진다.) 강조할 때에는 어떤 것도 상세하게 설명하려 들어선 안 된다. 너무 상세하면 자잘하게 보이고, 강조에서 요구되는 것은 웅장한 무엇이기 때문이다.-204쪽

[79장]
사실, 수사학이란 다음 아닌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풍부하고 [청중의 범위에 있어서] 넓게 말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실은 원천에 있어서 변증론과 같은 곳에서 흘러나왔지만, [사용하는 표현과 주제의 범위가] 더 풍부하고 [대상 청중의 범위가] 더 넓으며 마음을 움직이고 일반 대중의 감각과 취향에 더 가까이 가 있는 덕목일 뿐이다.-258쪽

[140장]
아버지: 선과 악에 대해서, 공평함과 부당함에 대해서,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명예와 수치에 대해서, 이렇게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연설가는 논의 주제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단 말인가? 이런 이유에서 너는, 내 아들 키케로야,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규칙들과 지침들은 마치 저 아카데미아 원천으로 가는 길의 안내 표지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원천에 나의 안내를 통해서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도착한다면, 그때 너는 이 규칙들 자체를 더 잘 알아보게 될 것이고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이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들: 저도 실은 그렇게 되기를 진실로 열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께서 약속대로 설명해주신,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가르침은 저에게 뭔가를 더 바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명백하고 충분한 것입니다.
<수사학 끝>-396쪽

140장의 역자 주석

철학의 강조는 키케로 수사학의 핵심 요체인 이상적 연설가(orator perfectus)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이상적 연설가는 하나의 형상(forma)인데, 이 형상을 다루는 학문은 철학이지 수사학이 아니다. (중략) 이 형상은 플라톤의 이데아이며, 키케로는 이를 forma라고 번역한 것이다. 철학의 강조는 이상적 연설가를 구성하는 방법에서도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키케로는 철학의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을 강조한다. 키케로가 이렇게 철학을 강조하는 까닭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키케로의 연설과 관련된 확신이다. 즉 사람들이 철학 없이는 진실하고 제대로 된 연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보편적이고 풍부하고 상세하게 말하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학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철학과 수사학의 분리가 가져오는 결과 때문이다. 키케로는 <연설가> 제12장에서 이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렇게 전문 지식인에게는 대중적인 설득력이, 달변의 연설가들에게는 세련된 교양이 부족하다."(아래에 계속)-397쪽

(위에서 계속)키케로는 이 사태의 원인을 사람들이 철학과 수사학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상호 연계 없이 각각 독립적으로 취급한 데 있다고 본다. 이 분리는 결과적으로, 진실하고 완벽한 연설로 가는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키케로의 입장을 대변하는 크라수스는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철학과 수사학의 분리를 강렬하게 비판한다: "마치 혀와 심장의 분리와 같은 저 이상하고 백해무익한, 그래서 비난받아 마땅한 분열이 생겨났다. 한 무리는 우리에게 지혜만을, 다른 무리는 말하기만을 가르치도록"(제3권 제56장). 아버지 키케로가 긴 대화의 숲을 거쳐 아들 키케로를 철학의 샘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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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9-1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C46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Partitione oratoriae"의 역서. 역자는 서울대 고전학 과정에서 "헤시오도스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으로 석사, 괴팅겐 대학에서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를 받은 고전 수사학 전문가이다. 현재 고전수사학에 대한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전문가답게 상세하고 멋진 주석을 붙여주었다. 게다가 무려... 라틴어 원문이 있다!! 가지고 싶어. 누군가 선물해 주지 않으려나... ㅠㅠ
변호사로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제적인 논의를 이끌어 오던 저자가 마지막을 철학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끝맺는 것이 인상적이다. 역시 글쓰기는 철학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