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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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올라온 평범하지만 꼭 평범하지만도 않은 청년 또는 소년이 겪은 슬프지만 꼭 슬프지만도 않은 죽음과 삶, 연애와  일상에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내가 처음으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기도 하다. 이걸 계기로 푹 빠져서 도서관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조리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과는 달리 갖고 싶은 걸 그다지 참지 않던 시절이라 용돈을 털어 열심히 사모으기도 했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다.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의 병실에서 오이를 깎아 먹는 이야기 같은 것들. 죽음을 앞둔 서점 주인과 말없이 마주앉아 먹는, 간장에 적신 오이의 맛. 미도리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 중에 계란말이용 후라이팬를 사기 위해 브래지어 살 돈을 써버려서 덜 마른 브래지어를 입고 다닌 적이 있다는 것도 묘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간사이 풍의 산뜻한 계란말이와 눅눅한 브래지어.  미도리가 다녔던 여학교는 엄청난 부자 학교여서 그애는 가난한 동네 출신이 자기 밖에 없다는 것에  컴플렉스를 느꼈었다. 지바 현에 사는 아이가 같은 컴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아서 좀 친해졌는데, 걔네 집에 놀러갔더니 대저택의 정원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소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더라나. 이 이야기가 유달리 우스웠던 것은 나에게도 부자 동네 학교에 위장전입으로 들어간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경구로는 비스킷 통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인생이라는 비스킷 통에는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섞여 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맛없는 것만 남는다. 맛없는 걸 먹다 보면 맛있는 것도 나온다. 또다른 경구로 "남들과 같은 것만 읽고 있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법이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짓은 안 해."라는 말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남들과 같은 생각을 못하는 게 인생을 얼마나 고달프게 만드는지를 알게되었고, 스스로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침울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멋진 남자 나가사와 선배의 저 말은 여전히 멋지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 시인은 스무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록가수는 스물 넷에 죽는다는 말도 여기에 나왔었나? 삶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관찰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인생은 확실히 조금쯤 살기 쉬워질 것이다. 

이러한 관찰자적 거리감과 담담한 태도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깨에 힘주고 무리해서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삶이란 건 살다 보면 그럭저럭 살아진다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오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 무뚝뚝하고 데면데면하지만, 그게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친구들 중에는 "스무 살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지금 다시 보면,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이도 있지만, 무사히 안정된 일상에 안착한 그와 달리 여전히 삶이 버겁기만 한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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