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테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박범신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 찾아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남성 작가가 여성의 1인칭으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남자 주인공은 이상화된 외국인 노동자판 전태일 같고,

여자 주인공은 온갖 비극을 뒤집어 쓴 약한 여자에서 이상적인 어머니로 변화하는데,

둘 다 현실의 인물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허구의 인물로서 가지는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 남녀의 연애는 설레기보다는 생뚱맞고 어색했고,

남자 주인공이 노동 투사로 변해가는 과정은 너무 경건해서 숨이 막혔고,

한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노동자들이 20년 후 큰 부자가 된다는 에피소드에는

웃어야 할지 어이없어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에 기대했던

이주노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주노동으로 인해 누가 어떻게 이득을 보는가,

이주노동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등

이주노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천착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 작가는 로맨틱한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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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8-10
1장 ‘노동의 의미: 노동 윤리의 생산’은 노동윤리의 기원을 살펴본다. 노동윤리는 근대 시대 초기부터 빈곤층을 정규 공장 노동으로 유인하고, 빈곤을 뿌리 뽑고, 사회안정을 확립하는,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로 노동윤리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새로운 공장제도가 자리 잡는 데에 필요한 복종을 가르쳤다.
2장 ‘노동윤리에서 소비미학으로’에서는 근대 사회가 초기에서 후기 단계로 꾸준히 이행해 가는 과정을 다룬다. ‘생산자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사회’로, 노동윤리가 이끌어가는 사회에서 소비의 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소비자 사회에서 대량 생산은 더 이상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난날 ‘산업예비군’이었던 빈곤층은 ‘결함 있는 소비자’로 다시 정의된다. 이로써 이들에게는 쓸모 있는 사회적 역할-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이 주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빈곤층의 사회적 지위와 그 개선 가능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3장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은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을 추적한다. 그것이 2장에서 설명한 이행 과정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개인의 불행에 관하여 집합적 책임을 지지하는 대중적 합의가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경, 또한 오늘날에 와서는 그 원칙에 반대하는 합의가 지난날처럼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경을 살펴본다.
4장 ‘노동윤리와 새로운 빈곤층’은 그 모든 것의 결과로서, 빈곤층이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문화적으로 정의되는 방식을 다룬다. 최근에 유행하는 개념인 ‘최하층계급’을 탐구하며, 그것이 궁핍의 광범위한 형태와 원인을 권력의 지원 속에 하나의 범주로 응축시키는 도구로 주로 이용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 하나의 범주에 속하게 된 이들은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결점으로 뒤덮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고, 따라서 하나의 ‘사회 문제’로 드러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5장 ‘세계화 속의 노동과 잉여’에서는 빈곤층과 빈곤의 미래를 고찰한다. 또한 노동윤리가 오늘날 발전된 사회의 상황에 더 적절한,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살펴본다. 실재하지 않는 사회를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도구의 힘을 빌어 빈곤을 퇴치하고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생계의 권리를 노동력 판매로부터 ‘분리’하고, 사회적으로 인식된 노동의 개념을 노동시장이 인정하는 개념을 넘어서 확장시키는 것 같은,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마주하여 실제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

73-74
빈곤이라는 현상은 물질적 결핍과 신체적 고통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적이면서 심리학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 실존의 적절성이 그 사회가 정의하는 남부럽잖은 생활수준에 따라 측정될 때, 그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은 그 자체로 괴로움과 고통, 굴욕의 원인이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자존감이 낮아지고 수치스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가난은 또한 그 사회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기회들과 단절되고 ‘삶이 제공해야 하는 것’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분노와 적의가 생기고, 그것은 폭력 행위나 자기 경멸의 형태로, 또는 둘 다로 배출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소비자 사회에서 ‘정상의 삶’이란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들은 공개적으로 전시되는, 만족과 생생한 경험의 기회들 가운데에서 선택하느라 바쁘다. ‘행복한 삶’은 많은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으로 정의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기회를 잡아야 하고, 그 기회를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잡아서는 안 되며 되도록 먼저 잡아야 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소비자 사회에서 또는 단순히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는 건 부족한 소비자, 또는 결함 있는 소비자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비자 사회에서 빈곤층은 무엇보다도 흠과 결점이 있고 그릇되며 모자란 –다시 말해 부적합한- 소비자라고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스스로 정의된다.

78-79
제러미 시브룩 Jeremy Seabrook이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듯이, 오늘날 사회의 비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주관적 결핍감의 개발’에 있다. ‘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사회의 기초 원리에 ‘가장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유한 이들이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그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무시되고 위축되고 왜소해져야 한다. ‘부자는 보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

208-211
오늘날 빈민들의 고통은 공동의 대의로 수렴되지 않는다. 결함이 있는 소비자들은 혼자서 쓸쓸하게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는다. 기껏해야 아직 해체되지 않은 가족들, 비슷하게 가난한 친구들과 함께 상심을 달래는 게 고작이다. 결함 있는 소비자들은 외롭고 버려졌다고 느낀다. 오랜 기간 혼자 버려지면 그들은 외톨이가 된다.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돕는지 알지 못하고, 도움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축구 도박이나 복권 당첨 말고 어떤 것이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불필요하고 쓸모가 없고 버려진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것이다. 눈밖에 있다. 먼저 그들은 새로운 소비자 사회의 내부인인 우리가 다니는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사라져야 한다. (중략) 신체적 격리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정신적 분리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면 빈민들이 도덕적 공감의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빈민들을 거리에서 없애는 한편으로 그들을 인간 사회에서, 윤리적 의무의 세계에서 쫓아낸다. 그 방법은 궁핍의 언어로 씌어졌던 이야기를 타락의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다. 평상시의 질서에 문제가 감지되어 대중적 항의가 일어날 때마다 그에 맞춰 검거되는 ‘유력한 용의자들’은 빈곤층에서 제공된다. 빈곤층은 죄를 짓고 도덕 기준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미디어는 기꺼이 경찰과 협력하여, 선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에게 범죄, 마약, 난교에 빠진 ‘범죄 분자’들이 등장하는 선정적인 장면을 보여 준다. 범죄 분자들은 비열한 거리의 어둠 속에 은신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이에 따라 빈곤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그리고 아마도 법과 질서의 문제일 뿐이라는 요지가 전달된다.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범법 행위에 대처하는 방식과 같아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대중의 의식에서도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안다. 순전히 민폐로 전락한 하나의 현상 전체를 제거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 현상은 고통 받는 타인을 보고 생겨나는 윤리적인 마음으로도 완화시키거나 누그러뜨릴 수 없다. 옥에 티를 없애려는, 질서 잡힌 세상과 정상적 사회라는 깨끗한 캔버스에 떨어진 얼룩을 지우려는 유혹은 강하다. 알랭 핑켈크로트 Alain Finkielkraut는 최근의 저서에서, 윤리적인 마음이 사실상 침묵하고, 공감이 사라지고, 도덕적 장벽이 걷힐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우리를 일깨워 준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나치 폭력이 저질러진 건 폭력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가학증 때문이 아니라 장점 때문에, 즐거워서가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에, 야만스러운 충동을 발산하고 양심의 가책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상위 가치라는 이름으로, 전문적 능력과 앞으로 꾸준히 수행될 과제를 갖고 저질러졌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폭력은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스스로 품위 있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했으나, 폭력의 희생자들, 오래 전에 이미 인류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이들이 왜 자신들의 도덕적 공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침묵을 지킬 때 저질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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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7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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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355

하루는 이곳 정자의 누런 갈대로 만든 흔들 의자에 앉아 꼬박 네 시간이나 어떤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고조되는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가 그 책을 구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경위에는 다분히 우연도 개재되어 있었다. 아침 간식을 든 후 흡연실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책장 외진 구석의 으리으리한 장정 뒤에 감춰져 있었다. 그가 몇 년 전 에 책방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아무 생각 없이 구입한 사실이 생각났다. 누르스름한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꽤 두툼한 그 저서는 인쇄나 제본이 조잡했다. 그것은 어느 유명한 형이상학 체계의 제2부였다. 그 책을 가지고 정원에 온 그는 이제 완전히 거기에 몰두해서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그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만족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는 정신이 생, 그토록 강력하고 잔혹하며 조소적인 그 생을 제압하고 지배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비할 데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생의 한기와 가혹함에 직면하고 늘 치욕에 휩싸여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자기의 고민을 은폐해 오다가, 경사스럽게도 갑자기 위대한 현자의 도움으로 고뇌하는 것에 대한 원칙적인 정당성을 획득한 자의 만족감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라는 이 세계를 가리켜, 주인 되는 유희 정신은 조소적으로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세계임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원칙과 전제가 불분명했다. 그러한 독서에 익숙지 않은 그의 정신은 어떤 사고의 경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광명과 암흑이 교대로 나타나고 둔감한 몰이해, 막연한 예감 및 돌연한 형안이 교대로 나타남으로써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에서 눈을 떼거나 의자에 앉은 위치를 바꾸지도 않고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어떤 페이지는 읽지도 않고 성급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요점, 본질적으로 중요한 지점만을 찾아서 읽었다. 즉, 중요한 절(節)이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절만을 우선적으로 펼쳐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분량이 많은 장(章)에 들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자 하나 빼놓지 않고 통독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눈썹을 치켜올린 채 생의 어떠한 자극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죽은 사람처럼 완벽하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장의 제목은 ‘죽음과 우리 존재 자체의 불멸성과 그것의 관계에 대하여’였다.

네시 정각에 하녀가 정원으로 와서 식사하라고 알렸을 때는 몇 줄 남기지 않고 거의 다 읽은 상태였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고 남은 문장을 다 읽고는 책을 덮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 전체가 엄청나게 확대된 느낌과 심원하고 묵직하게 취한 상태에 충만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감각은 몽롱해져, 무언가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매혹적인 것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희망에 들뜬 첫사랑에의 동경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떨리는 차가운 손으로 그 책을 정원에 있는 책상 서랍에 보관했을 때 이상한 압박감과 불안한 긴장감에 사로잡힌 그의 뜨끈뜨끈한 머리는 마치 그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리기라도 할 듯이 논리적인 사고를 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집으로 들어가 주계단을 오르고 식당의 가족 옆에 앉으며 자문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도시의 시의원이자 요한 부덴브로크 곡물 회사 대표인 나, 토마스 부덴브로크한테 무슨 말이 들려왔던가? 그것이 나에게 온 메시지였던가? 내가 그걸 감내할 수 있을까? 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아는 사실이란 다만 나같이 빈약한 두뇌의 소유자한테는 그것이 너무 과하다는 점뿐이야.

하루 종일 그는 이렇게 취한 듯 묵직하고 멍하게 압도된 상태로 보냈다. 그리고 밤이 왔다. 묵직한 머리를 더 오래 어깨 위에 지탱하고 잇을 수 없어서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세 시간 동안 깊은 잠을 잤다.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잠을 잤다. 그런 다음 그는 가슴에 사랑이 움트는 사람이 혼자 깰 때 그러듯이 화들짝 놀라면서 돌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커다란 침실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게르다는 이제 이다 융만의 방에서 잠을 자기 때문이었다. 이다는 최근에 어린 요한과 좀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세 개의 발코니 방들 중 하나로 옮겨갔다. 두 개의 높은 창의 커튼이 꼭 닫혀 있었기 때문에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깊은 정적과 부드럽게 내리누르는 무더위 속에서 그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암흑이 그의 면전에서 찢기고 한밤의 부드러운 바람이 딱 갈라지며 자신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천리안을 지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느 살 것이다!"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럴 때 자신의 가슴이 내적인 흐느낌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살 것이라는 징표다! 그것이 살아 있을 거니까.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다만 기만일 뿐이다. 죽음이 정정해 주게 될 오류일 따름이다. 그것이야, 그것이야! 무엇 때문에?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는 가운데 밤은 그의 눈앞에서 문을 탕 닫아버렸다. 그는 다시는 그 이상의 것을 조금도 보거나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더 깊숙이 베개 속에 파묻었다. 그에게 방금 모습을 드러낸 그 한줌의 진리로 인해 그는 완전히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고 몸이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누워 또 한번 마음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면서 열렬히 기다렸다. 다시 그런 순간이 왔다. 두 손을 맞잡고 감히 꼼짝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들여다보았다. (중략)

"난 살 것이다!" 그는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울었다. 다음 순간에는 무엇 때문에 우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리는 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고 그의 비전은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그의 내부에는 다시 침묵 속의 암흑만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이 되돌아올 것이다!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확약했다.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던가? 마치 마취된 듯 잠에 곯아떨어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그는 이 모든 것을 낳은 그 세계관 전부를 철두철미하게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할 때까지 이 엄청난 행복을 결코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모아 배우고 읽고 공부해야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겋게 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는 순간, 이미 그는 어제의 극단적인 정신 상태에 대해 다소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고 이런 아름다운 계획이 실행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는 늦게 일어났다. 그는 즉시 시의회의 토론에 참석해야 했다. 중소 무역 도시의 박공 집에 늘어선 좁은 거리에서 사업 활동을 하고 공적 시민적 생활을 하느라 그의 정신과 힘은 또 한번 소모되었다. 늘 그런 불가사의한 독서를 다시 하리라 마음먹고서 그날 밤의 체험이 정말 지속적으로 유효할지의 여부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그 체험이 실제적으로 뜻을 궆히지 않을지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민적 본능은 그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의 허영심도 들고 일어섰다. 그것은 불가사의하고 우스꽝스러운 역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로 이러한 것들을 보았던가? 그것들이 요한 부덴브로크 상사의 대표인 토마스 부덴브로크 시의원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는가?

그는 수많은 보물을 숨기고 있었던 그 이상한 책에 다시 시선을 던지지 못했다. 하물며 그 위대한 저서의 이 권이나 삼 권을 구입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갈수록 더 꼼꼼하고 신경질적으로 외모를 관리하는 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허비했다. 오만 가지의 하찮고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일에 시달리느라 의지가 너무 쇠약해져 시간을 합리적이고도 효과 있게 배분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잡사를 정리하고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날 오후의 사건이 있고 나서 대략 이주일 이 지난 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녀더러 정원 책상의 서랍에 무질서하게 나뒹굴고 있는 어떤 책을 당장 위로 갖고 올라가서 책장에 갖다놓으라고 지시하게 되었다. 높고 궁극적인 진리를 갈망하여 손을 뻗었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결국 자신이 어린 시절에 믿고 사용한 개념들이나 비유들로 힘없이 되돌아왔다.

485-486



"하노, 어린 하노."

페르마네더 부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솜털이 나고 생기를 잃은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톰,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 그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어. 아, 이다지도 가슴 아프고 슬프다니!"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프리데리케 부덴브로크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개고 눈을 내리깔며 코는 허공을 향했다.

"그래, 그렇게들 말하지. 아, 어떻게 해도 위로가 안 되는 순간이 있어, 프리데리케. 하느님이 나를 벌하실지도 몰라! 그런데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정의며 자비며 모든 것을 의심하게 돼. 인생은 우리 속에 있는 많은 것을 깨뜨리고 많은 믿음들을 파괴했어. 재회......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그때 세세미 바이히브로트가 탁자 옆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키를 높였다. 그녀는 발끝을 들고 목을 쭉 뻗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 머리 위의 두건이 마구떨렸다.

"그렇게 된다니까!"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말하며 모두를 도전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이성의 공격에 맞서 싸운 투쟁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 등이 굽고 작은 그녀는 확신에 차서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영감을 받고 벌하는 조그만 예언자였다. (끝)

497



부덴브로크 일가가 당면한 경제적 실패는 몰락의 이유가 아니라 몰락의 결과이다. 몰락의 원인은 여러 세대가 지나는 가운데 성찰적 경향, 즉 비시민적 경향이 점증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병약해진다. 즉, 네 세대가 흘러가는 가운데 헤겔의 역사 철학 체계인 예술, 종교, 철학 순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순진성, 종교, 철학, 예술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체계가 실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은 각 인물을 통해서도 관찰될 수 있다. (홍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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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윌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중급(3.4급) 기출문제집 - 2015년 8월 8일(28회) 시험 반영, 최신 9회분 기출+해설 수록 에듀윌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에듀윌 교육출판연구소 엮음 / 에듀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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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출 문제 하나하나에 대해서 관련내용이 핵심만 간추려서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 한 권만으로 충분히 시험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한 회 분량씩 답을 가리고 한 번 풀고, 해설을 잘 읽어 보면서 몰랐던 부분을 정리하고 외우면, 다음 회를 풀 때는 점수가 점점 올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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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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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소설이라 읽었는데 박완서라는 이름에 비해 많이 실망스러웠다.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공주처럼 곱게 자라온 철없는 스무 살 여자아이가 하늘같던 아버지와 두 오빠를 잃고 미군 상대 상점에서 일하면서, 기갈들린 듯 다른 남자들에게서 아버지와 오빠의 환영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나에게는 좀 징그럽게 여겨졌다. 마구 쏟아지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보기에 부담스럽다. 

 

 작품의 가치는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세태를 전해준다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미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가면서도 미국인을 '잡종'이라고 경멸하고, 실체도 없는 전통과 정신성을 자랑하면서 공포와 탐욕과 도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1950년대의 한국인들이  흥미로웠다. 아래에 옮긴 부분은 주인공이 나중에 호텔에까지 따라가게 되는 미군 병사 조와 만나는 대목인데, 초라한 한국 여자가 초록색 눈의 "나쁜 남자"  미국인에게 느끼는 은근한 욕망과 수치심이 재미있다.

 

 

 

236-239
그는 깊은 녹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콧대는 오만한 게 끝이 갈고리처럼 약간 굽었고 얄팍한 입술은 안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진이 오빠와 흡사한 이기적인 입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던 생각을 단념했다. 나는 그간의 경험으로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초상화를 그릴 손님을 가려낼 수 있었다. 좀 어리석다든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보고 싶은 좀 주책없이 호기심이 강한 친구라든가, 하다못해 동정심이 남보다 헤퍼 한국 사람과의 거래는 무조건 베푸는 셈치고 있는 아니꼬운 친구라든가. 그는 이 중 아무하고도 달랐다.
그 녹색의 눈은 쉽사리 남의 말에 솔깃해할 것 같지도 않거니와 좀처럼 호기심 같은 게 일 것 같지도 않은 매사에 시들한 권태가 막처럼 덮여 있었다.
"그렇게 무더기로 편지를 보내니 답장도 무더기로 받겠네요."
"메이비."
"대개 어떤 답장을 받나요?"
"물론 내가 한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다시 듣게 되지."
"당신이 어떤 소릴 했는지 궁금하군요."
"사랑한다고, 당신 생각뿐이라고."
"맙소사."
그는 다시 입을 삐쭉하며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당신은 여복도 많군요. 행복하겠어요."
"아아니. 조금도."
"왜요?"
"난 그녀들의 말을 안 믿으니까."
"왜요?"
"나도 그녀들에게 거짓말을 했거든. 내가 한 소리도 안 믿는데 더군다나 그 답장을 믿어?"
"그럼 왜 그런 헛수고가 필요한가요?"
"헛수고라니. 아주 헛수고랄 수만은 없어. 나는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허공에다라도 안 하곤 못 배길 때가 있거든."
나는 문득 그의 눈에 서린 권태 저편에 아주 깊숙이 감춰진 어떤 기갈을 엿보았다. 그건 아주 섬뜩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유 없이 혼자 당황하고 나서 안 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당신은 여자를 살 걸 그랬나 봐요."
"내가 여자를 안 샀다고? 누가 이 나라에서 여자를 안 사고 배겨? 그 싸구려 여자들을 5달러라도 오케이, 1달러도 오케이, 세계에서 가장 싸구려 섹스를 가진 여자들. 그렇지만 사고 보면 1달러도 아깝지. 세상에 그렇게 운치 없이 섹스를 거래하는 계집들이 이 나라밖에 또 있을까. 이것들은 숫제 무인판매기야. 상품은 실용성 말고 쇼핑의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는 장사의 초보 상식도 모르면서 달러에만 허겁지겁하는 엉터리 장사치들."
그는 내가 마치 그 엉터리 장사꾼이었던 것처럼 그 깊고 아름다운 눈을 불태우다시피 이글대며 덤비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나는 얼떨결에 내가 예전에 그를 사기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사과를 했다.
"네가 왜 미안해. 너는 보아 하니 동방예의지국인가 본데."
"베그 유어 파아든."
그는 동방예의지국을 우리 말로 서툴게 발음했고, 나는 그것을 어려운 영어로 알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베그 유어 파아든’을 되풀이항 후 겨우 동방예의지국을 알아들었어도 그가 말하려는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뜻이죠?"
"창부 아닌 여자들 말이야. GI들만 보면 섹스 따위는 오래 전에 떼어버렸습니다, 하는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혹시 윙크라도 한 번 하면 강간이라도 하려고 덤비는 줄 지레짐작을 하고 엄살을 떠는 여자들 말야."
그는 좀 전의 격앙을 쉽사리 잊고 졸리우리만큼 권태로운 표정으로 띄엄띄엄 설명을 했다.
"바이 바이, 동방예의지국."
그는 시들하게 훌쩍 가버렸다. 2층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을 두 층씩 성큼성큼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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