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소설이라 읽었는데 박완서라는 이름에 비해 많이 실망스러웠다.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공주처럼 곱게 자라온 철없는 스무 살 여자아이가 하늘같던 아버지와 두 오빠를 잃고 미군 상대 상점에서 일하면서, 기갈들린 듯 다른 남자들에게서 아버지와 오빠의 환영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나에게는 좀 징그럽게 여겨졌다. 마구 쏟아지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보기에 부담스럽다. 

 

 작품의 가치는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세태를 전해준다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미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가면서도 미국인을 '잡종'이라고 경멸하고, 실체도 없는 전통과 정신성을 자랑하면서 공포와 탐욕과 도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1950년대의 한국인들이  흥미로웠다. 아래에 옮긴 부분은 주인공이 나중에 호텔에까지 따라가게 되는 미군 병사 조와 만나는 대목인데, 초라한 한국 여자가 초록색 눈의 "나쁜 남자"  미국인에게 느끼는 은근한 욕망과 수치심이 재미있다.

 

 

 

236-239
그는 깊은 녹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콧대는 오만한 게 끝이 갈고리처럼 약간 굽었고 얄팍한 입술은 안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진이 오빠와 흡사한 이기적인 입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던 생각을 단념했다. 나는 그간의 경험으로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초상화를 그릴 손님을 가려낼 수 있었다. 좀 어리석다든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보고 싶은 좀 주책없이 호기심이 강한 친구라든가, 하다못해 동정심이 남보다 헤퍼 한국 사람과의 거래는 무조건 베푸는 셈치고 있는 아니꼬운 친구라든가. 그는 이 중 아무하고도 달랐다.
그 녹색의 눈은 쉽사리 남의 말에 솔깃해할 것 같지도 않거니와 좀처럼 호기심 같은 게 일 것 같지도 않은 매사에 시들한 권태가 막처럼 덮여 있었다.
"그렇게 무더기로 편지를 보내니 답장도 무더기로 받겠네요."
"메이비."
"대개 어떤 답장을 받나요?"
"물론 내가 한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다시 듣게 되지."
"당신이 어떤 소릴 했는지 궁금하군요."
"사랑한다고, 당신 생각뿐이라고."
"맙소사."
그는 다시 입을 삐쭉하며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당신은 여복도 많군요. 행복하겠어요."
"아아니. 조금도."
"왜요?"
"난 그녀들의 말을 안 믿으니까."
"왜요?"
"나도 그녀들에게 거짓말을 했거든. 내가 한 소리도 안 믿는데 더군다나 그 답장을 믿어?"
"그럼 왜 그런 헛수고가 필요한가요?"
"헛수고라니. 아주 헛수고랄 수만은 없어. 나는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허공에다라도 안 하곤 못 배길 때가 있거든."
나는 문득 그의 눈에 서린 권태 저편에 아주 깊숙이 감춰진 어떤 기갈을 엿보았다. 그건 아주 섬뜩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유 없이 혼자 당황하고 나서 안 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당신은 여자를 살 걸 그랬나 봐요."
"내가 여자를 안 샀다고? 누가 이 나라에서 여자를 안 사고 배겨? 그 싸구려 여자들을 5달러라도 오케이, 1달러도 오케이, 세계에서 가장 싸구려 섹스를 가진 여자들. 그렇지만 사고 보면 1달러도 아깝지. 세상에 그렇게 운치 없이 섹스를 거래하는 계집들이 이 나라밖에 또 있을까. 이것들은 숫제 무인판매기야. 상품은 실용성 말고 쇼핑의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는 장사의 초보 상식도 모르면서 달러에만 허겁지겁하는 엉터리 장사치들."
그는 내가 마치 그 엉터리 장사꾼이었던 것처럼 그 깊고 아름다운 눈을 불태우다시피 이글대며 덤비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나는 얼떨결에 내가 예전에 그를 사기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사과를 했다.
"네가 왜 미안해. 너는 보아 하니 동방예의지국인가 본데."
"베그 유어 파아든."
그는 동방예의지국을 우리 말로 서툴게 발음했고, 나는 그것을 어려운 영어로 알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베그 유어 파아든’을 되풀이항 후 겨우 동방예의지국을 알아들었어도 그가 말하려는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뜻이죠?"
"창부 아닌 여자들 말이야. GI들만 보면 섹스 따위는 오래 전에 떼어버렸습니다, 하는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혹시 윙크라도 한 번 하면 강간이라도 하려고 덤비는 줄 지레짐작을 하고 엄살을 떠는 여자들 말야."
그는 좀 전의 격앙을 쉽사리 잊고 졸리우리만큼 권태로운 표정으로 띄엄띄엄 설명을 했다.
"바이 바이, 동방예의지국."
그는 시들하게 훌쩍 가버렸다. 2층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을 두 층씩 성큼성큼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배웅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