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밑줄긋기 부분에 스포일러 있음.

51-54
"이나무라라는 선수는 몇 학년인데?"
"2학년이요. 하지만 작년 1학년 때 인터하이와 국체 그리고 선발대회까지 3관왕을 했대요. 아직 무패인 거죠."
요코는 링 위에 있는 이나무라를 보았다. 헤드기어를 쓴 얼굴은 도저히 열여섯, 열일곱으로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라는 별명이 이해가 갔다.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 (중략)
"정말 지루한 시합이야." 가부라야가 말했다. (중략) 얘는 방금 녹아웃 장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네. 둔감해서 공포심도 덜한 모양이지. 상상력이란 게 없는지도. 요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가부라야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때 링에서 내려온 이나무라가 가부라야와 요코 바로 앞을 지나갔다.
헤드기어를 벗은 이나무라는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전혀 없고, 꽤 잘생겼음에도 상당히 무섭게 느껴졌다. 키는 가부라야보다 머리 반쯤 더 컸다. 이나무라는 가부라야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가부라야를 쏘아보았다. 눈빛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가부라야도 이나무라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중략) 이나무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가부라야에게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가부라야가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223-224
"그애는 지금까지 진 적이 없나요?"
"없습니다." 사와키가 바로 대답했다. "무패죠." (중략)
"그 애가 싸우는 걸 보니 패배의 무서움을 잘 아는 것 같아서요."
사와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사와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 아버지가 프로 복서였다고 합닏. 하지만 후유증으로 지금은 매우 심한 펀치 드렁커라고 하더군요."
펀치 드렁커라는 말은 요코도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전에 펀치가 뇌를 흔든다는 이야기 했죠? 오랫동안 펀치를 계속 맞다보면 뇌에 충격이 누적되어 펀치 드렁크 증세가 나타납니다. 상대의 주먹을 맞으면서도 파곧ㄹ어 공격하는 선수들에게 많이 나타나죠. 심한 경우에는 건망증이 생기거나 간단한 계산도 못하게 됩니다. 운동기능이 손상되어 손발이 떨리기도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요. 더 심한 경우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밤에 자다가 누운 채로 소변을 보기도 합니다."

239
"고교 권투가 수준 미달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뭐, 좋은 선수가 전혀 없으니까."
소가베는 그렇게 말한 뒤 바로 덧붙였다. "한 명만 빼고."
"그게 누구죠?"
"라이트급 선수. 그 녀석은 진짜 물건이더군."
"이나무라 말인가요?"
"이름은 기억 못하지만 그 선수는 대단하더이다."
요코는 역시 하고 생각했다. 이나무라를 한눈에 알아본 소가베도 대단하다 싶었지만 그런 소가베에게서 인정받은 이나무라는 역시 굉장한 선수가 틀림없었다.
"카를로스 오르티스 같은 녀석이었어."

336-338
그때 학생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선수들끼리 멱살을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요코는 깜짝 놀랐다. 혹시 가부라야 때문인가. (중략)
"무슨 일인가요?"
요코가 김 감독에게 물었다.
"가부라야 녀석이 어떻게 조선인이 국민체육대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한 모양이에요."
김 감독의 설명을 듣고 요코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가부라야에게 물었다. "너 그런 소릴 했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요."
김 감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오사카 대표인데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뭐하러 해."
사와키가 말했다.
"저는 왜 나오냐는 소리가 아니었다니까요."
"나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사와키가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나무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나무라를 향했다.
"가부라야에게 악의는 없었던 것 같아요. 표현이 좀 거칠었지만요. ‘조선인인데.’라고 필요 없는 말을 더 해서요." (중략)
"네가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미국인이 너더러 일본 국적을 버리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냐?"
"그야 싫죠."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미국 국민체육대회에 나갈 생각은 안 할 건데요." 김 감독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라야,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는 좀 복잡한 면이 있어. 다음에 쉽게 설명해 줄게." 요코가 말했다.
"됐어요." 가부라야가 말했다. "별로 신경 안 써요. 인터하이는 고등학생만 참가하는 대회인 것처럼 국체는 국민만 참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물어본 것뿐인데."

489-490
그때 누가 "사와키 감독님."하고 불렀다. 이나무라였다. 조금 전에는 저지를 입고 세컨드에 붙어 있더니 어느새 교복 차림이었다.
"그 동안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국체 때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로. 전일본 출전 축하한다." 사와키가 말했다.
이나무라는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차분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180센티의 장신에서는 위압감이 풍겨나왔다. 이나무라가 기타루를 보았다.
"기타루, 우승 축하한다."
이나무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기타루는 그 손을 맞즙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우리 도요타에게 완승을 거뒀네. 훌륭한 시합이었다."
"별말씀을요."
"뭐야?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는."
가부라야가 시비를 걸듯 말했다. 하지만 이나무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타루에게 말했다.
"올봄 인터하이 때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다. 기대되네."
그러더니 이나무라는 빙긋 웃었다. 기타루의 얼굴이 굳었다. 이나무라는 사와키 감독에게 "실례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뭐야, 저 멍청이. 잘난 척은...."
가부라야가 내뱉듯이 말했다.

653
"기타루는 권투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했어."
부원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은 뭘 하시나요?"
"검사가 되었지."
부원들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요코는 이 아이들이 검사라는 직업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요코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다른 부원들도 하나둘 모여 들었다. 에다 감독도 왔다.
"고등학교 때 기타루 선배를 이긴 유일한 선수가 이나무라 카즈아키(稻村和明)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이시모토가 물었다. "그래, 맞아." 몇몇 부원이 "대단하다."라고 소리쳤다.
이나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전향해 삼 년 뒤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삼 년 반 동안 일곱 차례 방어전을 치른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했다. 권투를 하는 소년치고 이나무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패 전적으로 은퇴하다니 굉장해."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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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혈 스포츠 만화 같은 캐릭터와 심하다 싶은 결말을 가진, 약점이 분명한 소설인데, 두 번을 반복해서 빠져 들듯이 읽었다. 재미있다. 구입해서 곁에 두고 싶은 정도의 책은 아니지만, 출연도 적은 稻村和明의 캐릭터가 마음에 남아서 밑줄긋기로 보관한다. 제일 흥미진진했던 건 권투에 대한 설명 부분이었는데, 그건 머릿속에만 남겨두는 걸로.
 
헤이케 이야기 2 대산세계문학총서 55
오찬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군주의 권위를 빌려 권력을 잡은 무인들의 혈투가 주된 내용이니 황실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천황', '상황', '황후', '태후', '태자'. '친왕'을 '임금', '상왕', '왕비', '대비', '세자',  '대군'으로 

일일이 격하시킨 번역이 너무나 거북했다. 

남의 나라 문학 작품에 그런 짓을 하면 번역자의 민족적 자존심이 높아지나.

중국 황제만이 황제이니 다른 나라는 황제의 칭호를 써서는 안 된다는 속국적 발상이 우스꽝스럽고,

한국이 못 썼던 황제의 칭호를 일본이 썼던 게 배가 아파 그랬다면 그 옹졸함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을 교수님으로 부르며 그 밑에서 일본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걱정될 정도로.

역자는 일본인 은사들 앞에서 자신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앞으로도 제대로 된 한국어 번역판이 나올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안타깝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더 안타깝다.

1권 349-350
대장군 코레모리(平維盛)는 관동의 물정에 밝은 나가이 출신의 사이토 사네모리(齊藤實盛)를 불러 "사네모리, 관동팔주에는 그대만 한 강궁이 얼마나 있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이토는 껄껄 웃더니 "대장군께서는 그럼 소인을 강궁을 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소인은 고작 주먹 길이 열셋 되는 화살을 쏠 뿐입니다. 소인만큼 쏠 수 있는 사람은 팔주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궁 소리 듣는 사람 치고 주먹 길이 열다섯이 안 되는 화살을 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활도 힘센 장사 대여섯이 겨우 부리는 강력한 활을 사용합니다. 이런 강궁들이 쏘면 두세 벌 포개놓은 갑옷도 그냥 꿰뚫습니다. 호족 한 사람의 병력이 적어도 오백 기를 밑도는 일이 없는데, 말을 타면 떨어질 줄 모르고 험한 산길을 달려도 말이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전투 시에는 아비가 죽건 아들이 죽건 개의치 않고 죽으면 그 주검을 넘고 넘어 싸웁니다. 관서 무사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아비가 죽으면 공양을 한 후 상이 끝나야 다시 싸우고 아들이 죽으면 슬퍼하느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군량미가 떨어지면 봄엔 논을 갈고 가을엔 추수한 후 싸움을 시작하고 여름은 덥다 싫어하고 겨울은 춥다고 마다하지만 관동에서는 일체 이러한 일이 없습니다. 카이와 시나노의 미나모토 군은 지리에 밝아 후지산 기슭에서 배후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장군을 겁주려고 그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란 사람 수가 아니라 계략 쓰기에 달려 잇다고 합니다. 소인은 이번 싸움에서 사아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고 답하니 이 말을 들은 타이라 군의 병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67-69
사츠마 태수(薩摩国司) 타다노리(平忠度)는 어디쯤에서 말머리를 돌렸는지는 모르나 호위 무사 다섯에 시동 하나뿐인 단 7기만으로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 고조에 있는 휴지와라 슌제이(藤原俊成) 대감 집을 찾았으니 집 앞에 당도해 보니 문이 굳게 잠겨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중략) "주상께서 이미 도성을 뜨셨고 저희 집안도 이제 운이 다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얼마 전 대감에게 당대의 뛰어난 노래를 모아 편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제 작품을 단 한 수만이라도 체택해 주시는 은혜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일생의 영예가 될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곧바로 난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 어명이 취소되고 말아 소장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다시 어명이 내릴 터인데 이 두루마리 속에 쓸 만한 것이 있거든 한 수만이라도 넣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풀숲 그늘에 묻혀서도 기뻐할 것이고 저 멀리 저승에서나마 대감을 오래오래 지켜드릴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읊어온 수많은 노래 가운데 가작으로 생각되는 100여수를 모아 적은 두루마리를 갑옷 이음새 틈에서 꺼내 슌제이 대감에게 건넸다. (중략) 난리가 가라앉은 후 슌제이는 "천재집(千載集)"이라는 노래집의 편찬을 맡게 되었는데, 타다노리의 얼굴하며 남긴 말들이 새삼스레 생각나 감회를 억누를 수 없었다. 맡기고 간 두루마리 안에는 실을 만한 노래가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미 역적의 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어, ‘고도(古都)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읊은 노래 한 수를 ‘무명씨’의 작품으로 하여 채택하였다.
さざなみや 志賀の都は 荒れにしを 昔ながらの 山桜かな

151-153
요시나카(源義仲)는 시나노를 떠나올 때, 토모에(巴 御前)와 야마부키(山吹)라는 시녀 둘을 데리고 상경했다. 야마부키는 몸이 아파 서울에 남았으나 토모에는 내내 행동을 함께 했는데, 특히 이 토모에는 긴 머리에 얼굴이 백옥 같아 요ㅇ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강궁에 마상이건 도보건 간에 한 번 칼을 뽑았다 하면 그 어느 누구와 대적해도 지지 않는 일기당천의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사나운 말을 잘 다룰 뿐 아니라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잘 다녀서 요시나카는 전투가 벌어지면 토모에에게 견고한 갑옷을 입히고 대도와 강궁을 들려 일군의 지휘관으로 명해 내보냈다. 수차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번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낙오하고 전사했으나 마지막 일곱 기가 남을 때까지 토모에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남아 있었다. (중략) 요시나카는 토모에를 향해 "너는 여자이니 어서 어디로건 떠나거라. 나는 싸우다 죽겠다. 누군가에게 붙잡히게 될 것 같으면 자결할 생각인데 내가 마지막 전투에 여자를 대동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렇구나." 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떠나지 않아 몇 번이나 설득했더니 토모에는 "어디 쓸 만한 적이 없나. 마지막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하고 기다리는데 무사시 지방의 이름난 장사 온다노 모로시게(恩田師重)가 20여 기를 이끌고 나타났다. 토모에는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온다 옆에 말을 대고 힘껏 잡아채더니 자기가 타고 있던 안장 앞가리개에 밀어붙여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목을 비틀어 벤 다음 집어던졌다. 그런 다음 갑옷을 벗어던지고 관동 방면을 향해 떠나갔다.

154-155
"소인 한 사람을 천 기쯤으로 여기십시오. 화살이 일고여덟 대 남아 있으니 잠시 활로 적을 막고 있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숲은 아와즈 송림이라 하는데 저 송림에서 자결하십시오"라고 하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가는데 또 새로운 군사 50여 기가 나타났다. 이마이(今井兼平)가 "주군께서는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저는 이 적병들을 막고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요시나카(源義仲)는 "서울에서 죽었어야 하는 내가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은 너와 한 데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로따로 죽기보다는 한곳에서 싸우다 죽기로 하자"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내달리려 하개에 이마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말머리를 붙잡고 "무인이란 평소 아무리 군공을 세우더라도 죽을 때 자칫 잘못하면 두고두고 불명예가 되는 법입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지치셨고 후속의 아군도 없습니다. 적군에게 에워싸여 이름도 없는 잡병에게 밀려 말에서 떨어져 전사라도 하게 되시면 그렇게도 일본국에 이름을 떨친 요시나카 장군을 내 부하가 해치웠다고 떠들어댈 테니 이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말 마시고 어서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하고 설득하자 요시나카는 알았다며 아와즈 송림으로 향했다.
이마이는 혼자서 50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등자를 밟고 일어서서 "평소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겠지만 이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여라. 나는 요시나카 장군의 유모 아들 이마이노 카네히라로 금년에 서른셋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요리토모 어른께서도 알고 계실 테니 내 목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리도록 하여라" 하며 쏘고 남은 화살 여덟 대를 시위에 얹어 연거푸 쏘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에서 적군 여덟 명이 말에서 고꾸라졌다. 다음에는 칼을 뽑아 들고 이리 치고 저리 베며 휘두르고 다니니 정면으로 맞서는 자가 없어 적을 수도 없이 베어 쓰러뜨렸다. (중략) 이시다가 칼 끝에 목을 꽂아 높이 쳐들고 "근래 일본 땅에 명성이 자자한 요시나카 장군을 이시다가 죽였노라"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싸우고 있던 이마이가 듣고서 "이제 누구를 막기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여길 보아라, 관동 사람들아. 일본 제일의 용사가 자결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하며 칼끝을 입에 물고 말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니 칼이 전신을 관통해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와즈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7-199
뭍에 막 오르려 하는 것을 쿠마가이(熊谷直実)는 말을 옆에 갖다 대고 붙잡고 땅으로 굴렸다. 내리누른 채 목을 베려고 투구를 들추어 보니 겨우 16-7세의 소년이었는데 엷게 화장을 하고 이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들 나이 또래에다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용모를 하고 잇어 어디에다 칼을 들이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뉘시오? 이름을 알려 주시오. 내 살려드리리다" 하자 소년은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내놓을 사람은 못 되오만은 무사시 사람 쿠마가이노 나오자네라 하오."하고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소년은 "그렇다면 너에게 내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에게는 좋은 상대일 테니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목을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략) 쿠마가이는 너무도 안쓰러워 어디다 칼을 대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해지고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어 울면서 목을 벴다. "아, 무인만큼 죄 많은 직업이 또 있을까. 무사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막힌 일을 겪지 않아도 됏을 것을. 너무도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구나"하고 한탄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한참 있다가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 내갑의를 벗겨 목을 싸려 했더니 허리에 비단 주머니에 넣은 피리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무참한 일이 있나. 오늘 새벽 성안에서 피리를 분 게 바로 이 소년이었구나. 지금 아군에게는 수만 기가 있으나 싸움터에서 피리를 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역시 고귀한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하며 요시츠네에게 보였더니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 소년은 수리대부 타이라노 츠네모리(平經盛)의 아들로서 대부 아츠모리(敦盛)라 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쿠마가이는 출가하여 구도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비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피리는 피리의 명수였던 조부 타다모리(忠盛)가 토바 천황에게 하사받은 것이라 했다. 여러 아들 중에 츠네모리가 물려받아 가리고 있던 것을 아츠모리가 재능이 뛰어나 가지고 있게 된 것이라 했는데 이름을 코에다(小枝)라 했다. 음악이란 불도에서 보자면 광언기어인 셈이어서 미망에서 오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한 무인을 불도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62-263
나치에서 수도하고 있던 승려 중에 코레모리(維盛)를 잘 알고 잇던 이가 있었는데 동료에게 말하기를,
"저기 저분이 누군가 했더니 시게모리(重盛) 대감의 장남인 삼위중장이시네 그려. 저 어른이 아직 사위소장으로 았던 안겐 원년(1178) 봄에 법황의 오십 세 수연이 있었지. 당시 시게모리 대감께선 좌대장이셨고 숙부 무네모리(宗盛) 경은 우대장이었는데 두 분은 어전 계단 아래 앉아 계셨고 그 밖에 토모모리(知盛) 중장과 시게히라(重衡) 경을 비롯한 일문들이 대례날처럼 차려 입고 원을 그려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저 어른이 머리에 벚꽃 가지를 꽂고서 청해파(靑海波)를 추셨는데 마치 이슬에 젖어 함초롬해진 꽃과 같은 자태로 소매를 바람에 펄럭이며 춤을 추시니 일대가 환히 빛나 보였다네. 황후께서 관백 대감을 통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리셨는데 시게모리 대감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서 법황께 절을 올리셨어. 그러니 이보다 영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 옆에 있던 정신들이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일이지. 한때 대궐 궁녀들 사이에서 소설의 옛 주인공을 방불케 한다는 말을 들었고 이내 대신 자리에 오를 줄 알았는데 저리 초췌한 모습으로 변하시다니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네그려. 변화무쌍한 게 세상일이라지만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러더니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우니 옆에 있던 수도승들도 따라 울어 소매가 흠뻑 젖고 말았다.

280
서울에서는 새 천황(後鳥羽天皇)이 첫 제사를 올리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행차가 있었는데 좌대신 사네사다(實定) 공이 행사를 주관하였다. 재작년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의 목욕 행차 때는 무네모리 내대신이 행사를 주관했었는데 용대기(龍大旗)를 앞에 세우고 장막 안에 정좌한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가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고 보련을 호종한 삼위중장 토모모리, 도승지 시게히라 경을 비롯한 타이라 일문 및 근위부 무사들의 차림은 비할 바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이날은 판관대부 요시츠네가 행차의 선두에 섰는데, 시골 출신인 기소노 요시나카와는 달리 촌스러운 구석은 없었으나 그래도 타이라 사람들 중에서 제일 빠지는 사람을 골라 세운 것보다도 못해 보였다.

305
요시츠네(源義経) 역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고 있었는데 타이라 군 병사들이 배 안에서 쇠갈퀴를 가지고 요시츠네의 투구 드림을 휙휙 하고 두세 차례 걸쳐 잡아당겼다. 부하들이 대도와 협도를 휘두르며 막아내어 위기는 모면했으나 그 와중에 활이 쇠갈퀴에 걸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요시츠네가 몸을 숙여 채찍으로 끌어당겨 건지려 하자 부하들이 그냥 버리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몇 차례나 시도한 끝에 간신히 주워들더니 웃으며 물러섰다. 나이 많은 무사들이 혀를 차며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설사 천 냥 만 냥 하는 활이라 할지라도 어찌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요시츠네가 "내가 활이 아까워서 그런 줄 아느냐. 내 활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힘을 써야 시위를 걸 수 있는 활이거나 숙부님 활처럼 강궁이었다면 일부러라도 떨어뜨려서 적이 줍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힘없는 활을 적이 주워 가지고 ‘이게 미나모토 군의 대장군 요시츠네의 활이란다‘하며 비웃을까 봐 목숨을 걸고 건져온 것이다"하고 이유를 설명하니 맞는 말이라며 모두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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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 - 32년간 한국과 중국을 지켜본 일본 외교관의 쓴소리
미치가미 히사시 지음, 윤현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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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전후 5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총리는 담화문에서 "우리나라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큰 손해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일본의 역대 정권도 그 취지를 계승하고 있다. 2015년 아베 신조 총리 담화도 마찬가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국 총리로서...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을 표합니다’라는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위안부 문제는 ‘많은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도 썼다. 매우 기초적인 사실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와 민간이 협조해 마련한 ‘아시아 여성기금’으로 할머니들에 대해 여러 사업을 벌였다.
이상 모두가 공개된 사실이고, 일본 정부가 누차 강조해온 바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한국인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란 말인가. 그렇더라도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과하지 않았다’, ‘민간인의 돈뿐이다’라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일본 측이 전부터 알려왔고,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이 사실에 대해 한국 전문가들은 알고 있을 텐데,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글로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80-82
2014년 1월 24일 한국 외교부에서 발표한 성명이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공허한 주장과 헛된 시도를 계속하는 것은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증명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망령’, ‘공허한 주장과 헛된 시도’. 이것이 주간지나 신문 혹은 북한의 선동 기사도 아닌 한국 정부의 공식 코멘트인 것에 경악한다. 별로 놀랍지 않다면 이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중략)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의 이미지는 ‘한류’ 붐으로 조성된 친근한 이미지에서 최근 4-5년 사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일본인을 화나게 하는 한국의 말과 행동이 연이어 나왔다. 한국에서 지칭하는 일본의 ‘양심파’, ‘시민파’를 포함해 많은, 아니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왜 그렇게 모르는 거냐?" 라고 분개하며, "한국은 합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을 내버려 두자." 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지만, 그런 여론조차 ‘우경화’로 볼 뿐, 한국에는 제대로 소개, 분석되지 않는다. (중략) 이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측이 이 같은 발언, 일본이 ‘대체 이것은 어느 나라의 말인가?’ 라고 놀랄 만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데 있다. 전후의 일본이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실제와 큰 차이가 있음을 보통 일본인들이 알게 되었다.

108-109
스시를 좋아한다고 해서 전후 일본의 정치, 외교의 핵심을 오해한 채 비난을 해도 좋다거나, 비난을 절반 정도 허용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략)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다’,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다’ 등 중요한 핵심 사안에서는 일본인이 헉! 하고 놀랄 만한 엉뚱한 일본관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먹거리나 문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솔직히 곤혹스럽다.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한일의 현안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 두고는, ‘한국의 주장이 정의’라는 식의 자세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생활 문화에 대한 호의가 실은 ‘자신은 무조건적인 반일이 아니다’라고 보는 구실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일본에 대해서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125-127
미국 역사학회상을 수상한 컬럼비아 대학의 캐롤 글럭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50주년인 1995년에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략)
"기억은 개인의 기억이든 국가적인 기억이든 단순한 이야기를 원합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는 흑백 논리를 좋아합니다. (중략) 하지만 역사는 단순한 줄거리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는 복잡한 이야기, 맥락이 닿지 않는 듯한 사정이나 사실을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중략)
모두들 ‘단순하고 알기 쉬운 스토리’를 바라며, ‘자국은 백, 상대국은 흑’으로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에 반하는 일이다. ‘역사’가 ‘민족의 기억’에 밀려나서는 안 된다. (중략) 중국의 역사 연구자 왕정(汪錚) 박사도 또한 ‘역사’와 ‘(역사적)기억’의 구별을 강조한다. (중략)
"기억(역사적 기억)은 역사상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중국인이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그리고 정치적 지배층이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역사적 기억은 국민을 동원하고 대중적 지지를 결집하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었다. 또한 일당독재를 용인하고 시민 권리의 제약을 정당화하는 최대의 근거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속에 역사상의 일들을 전략적으로 배합해 넣고 있다. 1992년부터 시행된 애국주의 교육 캠페인을 기점으로, 이전 마오쩌뚱 류의 ‘승자 이야기’는 ‘피해자로서의 중국’으로 핵심이 바뀌었다. 그것은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공산당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압박을 느낀 결과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 박사는 내셔널리즘이 역사적 기억을 일깨우고 역사적 기억이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피드백 사이클을 중국이 단절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역사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동양경제>, 2014)

200-201
2-3년 전, 정부의 중견 간부가 일본 특파원과의 간담회에서 빈번히 ‘여론의 부담’, ‘국민 정서’를 입에 올리며 특파원의 이해를 구한 적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로 화제가 된 특정 유력단체의 주장을 정부도 따를 수밖에 없다. 달리 판단하고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특파원들은 "공산주의 체제라면 모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기 마련이고, 정부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정을 추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강한 비판을 받으며 악당으로 몰리기도 한다. 그것이 정부다. 조정을 하거나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정부의 역할을 포기하는 셈이다", "여론의 비판이나 압력으로 정부가 힘든 것은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모르는가? 일본과 중국을 구별 못 하나?"라며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202
‘진정성이 없다’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진실)이 아니다’라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으니까,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정하고 평가하려니 심기가 불편해서 부정적인 감정만을 표시하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그래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사회는 벌써 이 점을 알아차리고 있다.

230-231
중국 근대혁명의 아버지인 쑨원이 1924년 고베에서 가진 ‘대아시아주의’ 강연. 강연록을 보면 쑨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러일전쟁(1904-1905년)이 끝날 무렵. 쑨원은 파리에서 귀국하던 중에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다. 그때 아라비아인들이 그에게 "당신은 일본인인가?"라고 물었다. 쑨원은 중국인이라고 대답했다. 아라비아인들은 "우리들은 지금 아주 기쁜 사실을 알았다. 부상당한 러시아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유럽으로 가고 있다. 아시아 동방의 국가가 유럽 국가를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마치 우리나라가 전쟁에 이긴 것처럼 기뻐하고 있다"라고 쑨원에게 말했다.
강연에서 쑨원은 말했다. 그때부터 이집트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페르시아, 터키, 아프가니스탄, 인도까지 독립운동에 불이 붙어, 그 후 20년간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이긴 사실이 전 아시아 민족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러일전쟁에 대해 한국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서강 열강의 지배에 괴로워하는 세계의 많은 나라가 일본의 승리에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 그 세계사적 의의는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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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역사
리처드 파이프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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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것은 2001년에 나온 같은 출판사의 구판이므로, 인용의 내용은 2014년판과는 다를 수 있다.

64-66
역사의 관점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보면 그들의 무모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들 중에서 국가경영의 경험을 쌓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가장 광대한 국가를 통치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기업을 경영해본 적도 없으면서 신속하게 국유화를 진행하는 것과, 그에 따라 세계에서 다섯째로 큰 경제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은 것 등에 겁먹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한편 공산주의의 이념상으로는 러시아 인민의 압도겆 다수가 부르주아와 지주들이었으나 실제상으로는 대개가 농민들과 지식인들이었다. 이처럼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볼셰비티는 자신들의 대변하는 산업노동자계급의 적들로 보았다. (중략) 이것은 새 정권이 독재정치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음을 뜻한다. (중략) 레닌은 이것을 깨닫고 무자비한 독재를 자행하는 데 하등의 거리낌이 없었다. (중략) 그는 반대자들을 물리치거나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무제한의 테러를 즐겨 사용했다. 그렇게 한 까닭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무관심한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연구를 통해 과거의 모든 사회혁명이 실패한 것은 중도에서 멈췄거나 적대계급을 관용하여 생존 후 재편성할 수 있도록 놓아둔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잘 쓰는 형용사인 총체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여 새로운 질서의 터를 닦아놓아야 했다.

135
북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곳에서 모스크바 당국은 진보주의자들과 길동무(fellow travellers, 주로 지식인들로 구성)들 가운데서 유용한 제휴세력을 얻었다. 길동무란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은 채 당의 목표들을 널리 선전하고 장려하는 자를 말한다. 그들은 공산당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당의 명령에 따라 말한다는 의심을 사는 당원들과 달리 그들은 개인적 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55-156
공산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태어났다(중략). 한 가지 방식은 소련군이 강제로 강요하는 것이다(동부 유럽의 경우). 다른 것은 통상적으로 소련의 도움으로 정치문화는 물론 사회구조가 1917년 이전의 러시아를 닮은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방식이다. 이들 국가의 정치문화는 사유재산 및 법치주의 등의 확립된 기존 전통이 없고, 독재체제를 대물림하는 특징을 띠었다.

171
차르 시대의 유산인 소련의 독재체제는 국민들이 순종하거나 순종하는 척하는 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이고 정신적인 순종을 백성으로부터 얻으리라고 요구했다. 이런 갈망은 유교에서 발원한다.

193-194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역사철학과 비현실적인 심리학적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적 주장에 따르면, 그들이 폐기하려고 하는 사유재산제도는 일시적인 역사적 현상으로 원시공산주의와 선진공산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말하자면 간주곡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명백히 거짓으로 밝혀졌다. (중략) 이에 못지않게 잘못된 마르크스주의의 원리가 하나 있다. 바로 인간성은 쇠를 두들겨 펴듯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억압과 교육을 합친 방법을 사용하면 욕심과 의지가 깨끗이 없어져 일반사회 속에 용해되는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중략) 공산주의 정권들은 통치의 일상적인 수단으로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에게 가진 것들을 몽땅 포기하고 개인적 이익을 국가에 바치라고 강요하려면 공권력은 무한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중략)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정권은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 러시아, 러시아의 속국들, 중국, 쿠바, 베트남, 캄보디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모두 그러한 정권들이 들어섰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난 인명의 손상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권들의 수립목적인 평등이 파괴되는 데까지 미쳤다.

206
욕심은 타고난다. 다른 사람의 욕심에 대한 존중은 태어난 후 배운다. (중략) 만약 개인의 재산권을 정부 혹은 일반사회의 타인들이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배려를 잃을 뿐만 아니라 매우 탐욕스러운 본능을 발달시키게 된다.

206
마르크스의 학설은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내부모순을 겪으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괴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현실에 민감하고 스스로 조절할 능력이 있었고 또 경험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위기들을 용케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반면에 공산주의는 엄격한 원리이고, 유사종교로 바뀐 유사과학이며, 정치적으로 경직된 정권 속에서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체의 잘못된 개념들을 밝혀낼 수 없다는 게 증명되었고 결국 도깨비(공산주의가 가져온다고 하는 허구의 이상적 세계)를 스스로 포기했다. 만일의 경우지만 공산주의가 다시 소생한다는 것은 역사에 반항하는 일이 될 것이고 확실히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부활시키는 일은 미친 짓이다. ‘미친 짓’을 정의하자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상이한 결과를 기대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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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0-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에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던 사람들이 정치와 언론 권력의 핵심에 올라섰으니,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쪽 지식들이 필요할 것 같다. 너무 짧고 간결하다는 것이 약점이지만, 전체상을 머리에 넣는 데에는 무척 도움이 되었다.
 
크리피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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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교수라는 것도 있어서, 유부남 대학 교수인 주인공을 좋아하는 미인 여대생 이야기에 실소했다. 중2병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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