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모임이 조금 늦은 시간에 끝이 났습니다. 오랜동안 모임을 이끌어 오시던 회장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기에 환송연을 겸하다보니 석별의 아쉬움이 제법 길었던것 같습니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 끝이 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창밖으로는 밤공기가 싱그럽기까지 했습니다. 서울의 교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잡하고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하는 모임 장소에 가려고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출발을 했지만 거의 2시간이나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도착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자정 무렵에는 차들도 제각기 잘 곳으로 들어가서인지 싱싱 달릴 수 있었습니다.
2. 예술의 전당 앞쪽에서 신호 대기중 언뜻 플랭카드가 눈에 들어오길래 읽어보았습니다. "내일은 어버이날...부모님께 전화를 겁시다"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그러고 보니 내일이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은 카네이션이라도 달아드리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양재동을 들리기로 하였습니다. 청계산 입구에 즐비한 꽃집이 생각나서였지요
3.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몇몇 꽃집은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어버이날이라서인지 호텔 등지에서 주문받은 카네이션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는데 제가 카네이션을 사겠다고 했는데도 팔 물건이 없다고 합니다. 주문 받은 꽃다발을 만들 수량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이 켜져있는 이곳 저곳의 화원을 들려도 모두가 같은 대답이었기에 마지막 집에 들어가서는 통사정을 해서 코싸지 2개를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4. 본가가 제가 사는곳과는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근무를 하면서 본가에서 다니고자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두분이 일흔을 넘긴 상태에서 아들 수발을 할 수 있느냐면서 제게 원룸을 추천해서 그 말씀에 동의를 하고 원룸에서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은 본가에 들려야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1주일에 한번 찾아뵙기도 힘이 들더군요. 사실 아침 출근을 위해 아침밥을 지어줘야 하고 또 밤에 늦게라도 다니게 되면 걱정하시는게 부모님의 심정인지라 저도 부모님의 뜻에 따르기로 한것이지만 지금도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수시로 전화로 확인을 하시는 편입니다.
5. 오늘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 본가로 갔습니다. 노친네들이시지만 이른 새벽이라서인지 두 분께서는 아직 잠자리에 계셨습니다. 주방에서 두 분이 깨실라 살그머니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미역을 넣어 국을 끓였습니다. 나머지 반찬이야 있는 반찬을 그대로 꺼내 식탁위에 상을 차렸습니다. 그 때서야 어머니가 먼저 일어나시고는 깜짝 놀라시길래 카네이션 코싸지를 가슴에 달아들이며 "감사합니다...그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 녀석아 속이나 썪이지 말아라.." 하시면서 그래도 흐믓해 하셨습니다. 출근시간이 다가와 저는 식사만 차려 드리고는 바로 본가를 나왔습니다.
6. 어렸을 때 부터 부모님은 제게 더 없이 커다란 의지처이자 장애물이었습니다. 항상 제 눈에는 거대한 산 처럼 여겨졌고 그 거대한 산은 영원히 그렇게 존재할 줄 알았었습니다. 몇 년전부터 가끔 식사를 하면서 부모님의 옆 얼굴이나 마주 보는 얼굴을 대하면서 두 분에게서 이제는 세월의 골이 상당히 깊게 패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의 살도 많이 빠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쪼그라드는 얼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길어야 15년이 이 두 분의 수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큰 아들로서 두 분께 너무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음이 정말로 죄송함을 느끼게 만들더군요.
7. 한 5~6년전만 하더라도 TV뉴스나 언론 보도를 보며 아버님과 의견이 다르면 기를 쓰고 아버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전형적인 보수적 사고를 가지신 부모님과 조금은 개혁적 사고를 가진 아들이 사사건건 부닥치는 일은 흔한 일로 그럴때마다 아버님은 저를 나무라고는 하셨지만 고집 쎈 아들녀석은 한번도 아버님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제가 두 분이 이제는 늙었음을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나서는 아무리 아버님이 소위 <말 같지 않은 말씀>을 하시더라도 모두 수용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제가 속이 뒤집힐 정도로 틀린 말씀을 하시더라도 이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답니다. 제가 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모님을 대하다보니 오히려 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말씀을 안하고 계실지는 몰라도 이제 두 분께서는 저를 든든한 산으로 여기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두 분이 정정하게 살아계심 조차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제가 누리는 큰 행복임이 틀림 없고 두 분이 큰 산에서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 힘을 예전 처럼 발휘하시지는 않더라도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렇게 큰 산으로 자리하고 계실 겁니다.
단지 어버이날이고 제가 밥 한끼를 차려드려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뵙고 출근을 하니 그렇게 마음이 가볍고 기쁠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것이 그나마 효도가 아닐까를 생각하면서 이제 조금 더 부모님을 많이가슴에 담아 둘 공간을 만드는데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두 번 다시 뵙지 못할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말입니다.
< 如 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