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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 -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
앨리스 밀러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평점 :
스티븐킹의 <그것>에는 천식에 걸린 꼬마아이가 등장한다.
아이가 원체 약하게 태어나 늘 아프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과잉보호속에 자라난 아이는 보조기구없이는
실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호흡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 아이는 천식이 아니었다.
숨막힐 정도로 옥죄여오는 과잉보호,
아이의 친구들을 검열하여 만나지 말아야할 아이들을 선을 그어버리고,
세상의 모든 약을 아들을 위해 구비해놓는 어머니.
어머니의 과잉보호에 숨쉴 틈이 없는 아이는, 자신이 천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도
어른이 되어서까지 흡입보조기를 손에 놓지 못한다.
흔히, 우리는 과잉보호를 가정폭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뉴스에 나올만치 심각한 아동 학대나 성추행정도는 되어야 가정폭력이라 인정한다.
그러나 모자란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넘치는 사랑 역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제목이 긴 이 책, <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의 회복,
그리고 상처가 낳는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책을 읽다 말고,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작가의 의견에 놀라 작가 이력을 읽다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책의 저자인 앨리스 밀러는 아동심리학 전문가라는데,
부모에게 받은 성적인 학대나, 폭력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과잉보호로 또는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한
정신적인 학대를 대하는 앨리스 밀러의 시선은 무척 차갑고 냉정하며, 동시에 시원시원하다.
그녀는 유년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화해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있게, 화해로 치유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학대받고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평생 갈구하게 될 인생을 사느니, 애초에 부모를 포기하기를 권유한다.
세상에는 많은 가정이 있고, 게중에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부모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고 넘겼던 부모로 인한 상처,
그것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기억되어 트라우마로 남고,
언젠가는 질병으로 나타나 우리를 서서히 죽여간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세상 어디에서나 통하는 전통적인 도덕관념, 부모를 공경하라는 네번째 계명-
어릴 때는 부모가 어른이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나약해진 부모의 노쇄함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기억에 저장된 부모의 학대를 변호하기 시작한다.
부모도 인간이니까 실수 할수 있다고- 내가 잘못해서 학대 당한것이 싸다고-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유년기에는 일방적으로 부모에게서 상처를 물려받을 수 밖에 없는데도,
부모는 "하지 말라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너를 혼내는거야", "엄마가 너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라는 식의 자기변호로, 아이에게 죄책감을 지워주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부모의 잘못과 타협하지 않기를 권유한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전통적인 부모 공경 의지에서 벗어나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부모를 변호하지 말고 상처를 뚜렷히 인식하며,
부모의 잘못을 냉정히 바라보고 비난하는 것이 차라리 상처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이라 말한다.
다소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효의 관념에서 볼 때, 그것은 무척 충격적인 발언이지만,
사실 나는 그것이 아주 참신하고 효과적인 상처의 극복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엄마를 죽이고 싶어요."라는 자신의 증오의 본능을 인정하고나면,
오히려 증오에서 벗어날수 있다. 역설적이고 다소 괘변처럼 들리지만 가능한 얘기이다.
이 책은 자신도 잘 모르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가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사례들과 부모와의 애착을 끊음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온전한 일상생활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다분히 강경한 치유책을 제시한다.
뜬 구름잡는 자기 혐오를 자아낼 수 밖에 없는 프로이트적인 심리학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앨리스 밀러의 상처 회복 방법은 무척 이기적이고 도발적이지만, 더 인간적이고 화끈하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내가 제대로 서야 가능한 법.
이기적이라 해도 어쩔수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살아야, 누군가를 사랑할수도 있는 것이다.
좀 더 나를 바라보자. 상처를 외면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자기 비하에 빠지지 말고,
상처의 원인을 뚜렷히 바라보고, 차라리 상처를 준 사람을 비난을 해버리자.
꽤 효과적인 치료방법 아닐까.
언젠가 어린아이였고, 앞으로 어린 아이를 기르게 될 사람들이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를
아주 솔직하게 풀어놓은 책.
모든 질병의 원인을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찾는 것은 다소 지나친 단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족친화적이고, 사회중심적인 정신심리학 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납득이 가는 책이다.
사고의 폭을 넓히고 인식을 전환해보자.
부모의 자식사랑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번을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 이야기는,
서민들의 희노애락마저 모두 감싸안을수 있는 더 인간미 넘치는 거대하고 위대한 사상가가 될수 있었던
맹자의 잠재력을 어머니가 억압해 버린 폭력의 일화가 될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