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평범하던 시절도 있었더랬다.
여자친구와의 첫경험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놀러갈 계획을 하며 설레이던 열다섯의 여름, 운명처럼 찾아온 엄마의 사랑.
8년전 아버지를 잃고 자살까지 하려고 했던 나약한 엄마였기 때문에,
그런 나약하고 사랑스러운 엄마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에 마음 깊숙히 안도감이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끔찍히도 여자를 아낄줄 아는 로맨틱한 신사에, 온화한 성품을 가진 엄청난 부를 소유한 그 남자 그레그- 매일 같이 사랑의 황홀함에 도취된 엄마를 바라보며 제르민은 자신도 행복해졌었다.
그가, 그렇게도 신사적이던 그레그가 제르미에게 키스를 해오기 전까지는....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다.
나약한 엄마를 한순간 버려 자살직전까지 몰아가놓고, 엄마의 행복을 담보로 아들에게 몸을 요구하는 그 파렴치한 변태성욕자는 그것을, 그 치욕적인 강간과 협박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결혼하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믿었다.
엄마는 그레그를 따라 영국으로 가고, 제르미는 보스턴에 남아 자신의 인생을 꾸리면 그것이 다 일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당한 끔찍한 두번의 강간을, 잊을수 있을거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레그는 끈질겼다. 그는 엄마의 안정을 위해 잠시 영국에 와 있던 제르미의 여권을 훔쳐놓고, 가족들앞에서 로맨틱한 남편이자 선량한 아버지인 척 연기했다.
밤이면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몸과 마음까지 요구하는 그레그를 증오하면서도,
버림받아 괴로워할 엄마가 못내 안타까워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갔다.
그레그의 욕망에 뒤흔들리기 시작한 자신이 더러워 견딜수 없으면서도,
이 가학적 행위를 멈출만한 힘이 제르민에게는 없었다.
언젠가 끝나게 될것이라는 희망도 있었지만, 그 희망이 서서히 광기로 변해가고,
한때 평범하던 열다섯 소년 제르미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그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는 것밖에 남지 않아버렸다.
그레그의 지배에 압제된 채 제르미는 변해버리고, 누구에게든 지배욕을 불러일으키는 나약함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또다른 절망을 불러온다.
어떻게 해야 이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있을지.
제르미가 선택하지 못했던 것 처럼, 책을 보는 나 역시 선택할 수 없었다.
권력과 지배욕에 더럽혀진 몸과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우리는 모두 상상도 할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을까. 되돌이켜 보면 나는 이 책을 읽을수 있었던 순간들이 꽤 많았었는데.
단 20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도무지 멈추어지지 않아 끝을 볼때까지 걸신들린 듯이 빠져들수 밖에 없었던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는지 후회가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제르미의 광기와 슬픔이 온몸에 바늘을 찌르듯 전해져 저 멀리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어디엔가 절망의 끝이 있긴 한건지, 알수가 없었다. 파고 또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심연은, 제르미를, 그리고 제르미를 느끼는 나를 잠식해버렸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희망이 끝난 삶에서 제르미는 또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 마치 그것이 내 일인 것처럼 절망에 차버려서, 공포와 두려움과 나약함에 가득차 치를 떨면서도 도무지 잠시도 이 책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이 책은 분명 끔찍하게 무섭고 기분나쁜 작품이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된 지배욕의 심연이, 절망의 심연이 독하게 잠식해오는 작품이다. 그러나 끊을수 없는 마약처럼, 그 절망의 깊이에 매혹된 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만화이며 명작이라는 수식어에 조금도 모자름없는 명작중의 명작이라고 감히 말해볼수 있다.
치밀한 심리 묘사, 정교한 스토리 구조, 완벽한 연출-
그러나 그것 뒤에 더더욱 대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마음을 꿰뚫고 헤집어, 입어본 적도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어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 그 고통조차 매력적이라 느껴졌다면, 나는 이미 잔혹한 신에게 지배된지도 모르리라.
앞으로 이 작품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몇권이 되든 나는 끝까지 이 고통을 지켜볼 생각이다. 왠지 꼭 그래야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재밌다는 수식어로는 이 작품을 설명할수 없다. 대단하다. 정말이지, 대단한 작품이다.
살아 생전, 이런 작품을 읽을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이 아닐수 없다!!!
그러니 빨리 뒷권 좀.....
p.s 제목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기숙사 학교에 들어간 제르미의 친구들이 말장난 삼아
자신의 성과 같은 이름을 가진 예술가들의 이름을 찾다가 등장한다.
제르미와 같은 성을 가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에서 따온 제목으로,
만화속의 '잔혹한 신'이란 당연히 자신의 양아들을 강간하는 그레그를 뜻하리라.
멋진 제목이 아닐수 없다.
p.s 2. 이 책은 더러 BL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이코 스릴러 심리 서스펜스-정도라 말하는 것이 책이 가진 매력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을까.
P.s 3. 아아...다섯권을 다 읽는데 네시간이 걸렸다. 물론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내 손에 놓인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잠이 들수가 없었는데, 다 보고나서는 엄청난 악몽을 꾸었고, 잠이 모자랐던 데다가, 선잠을 잤고, 만화책에 완전히 몰두해서 내 심신이 울렁증을 유발해서 하루종일 몸이 좋지 않다. 으으....후유증 참 심한 책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