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는 듀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영수의 SF 소설집 "용의 이"는 세편의 단편과 한편의 장편이 수록된 내가 읽은 듀나의 첫번째 소설집, 그리고 듀나의 통상 네번째 소설집이다.
몇해전부터 인기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을 보는 듯한 귀엽지만 염세적이고 삐뚤어진 느낌이 가득한 책이라고나 할까. (사실 그의 그림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 아니라 듀나의 소설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일까.)
소설 후에 수록된 이 책에 대한 평들 중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 소설을 "세계 몰락 프로젝트, 혹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앨리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소설만큼이나 인상적인 평이었다.
각기 네개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세기말의 느낌, 그리고 생소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모험같은 에피소드들과 도무지 겁도 먹지 않는 무뚝뚝한 소녀들-
그 말이 옳소. 이 소설은 꼭, 삐뚤어진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끌릴 마이너적인 캐릭터가 기이한 모험에 빨려들어가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앨리스 같다.

소설을 시작하는 단편 "너네 아빠 어딨니?"에서부터 듀나의 상상력의 실체를 뚜렷히 파악할수 있다.
술취한 아버지가 동생을 강간하려는 것을 막으려다가 아빠를 죽여버린 소녀,
동생과 소녀는 창고에 아빠를 묻어버리는데, 아빠는 밤마다 무덤속에서 깨어나 자매의 피와 살을 노리는 좀비가 되어버린다. 겨우 초등학생들인 이 꼬마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밤마다 살아나는 좀비아빠를 밤마다 죽이고 파뭍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빠를 찾던 아저씨까지 좀비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일이 점점 커지고 만다.
소녀와 강간, 부자와 가난한 자들, 죽음과 좀비와 무덤의 이야기가 이 어우러지는 데도 어둡다고만 볼수 없는 것은 작품 내내 흐르는 어딘가 낙천적이고 무심한(예를 들면 무서운 상황에 빠져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소녀들이라던가) 정서가 재밌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단편 전반적으로 흐르는 다분히 세기말적인, 그러나 세계가 어떻게 되든 말든,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한 듯 자기애가 강렬히 표현되는 아이다운 잔인함과 낙천성이 이 단편의 큰 장점인데, 이는 이어지는 다른 단편과 장편에서도 계속된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되어 햇빛속에 녹아들어가버리기 전에 장치에 가두어놓는다는 설정의 "천국의 왕", 다른 세계에 떨어진 소녀들의 여정기같은 두 작품 "겨울너머로 가다"와 "용의 이"의 느낌 또한 그렇다.
나약하고 쉽게 바스라질 것 같은 소녀들을 세상속에 던져놓지만, 세상에 그닥 애착을 가지지 않는 이 소녀들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에 만족할 뿐 커다란 희망이나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무심함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특함의 정체는 바로 이 소녀들의 캐릭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뚝뚝하고 건조한 정서이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듣는듯한 느낌이 이어졌던 것은 건조한듯, 무심한듯, 그러나 쫀득쫀득 재밌게도 이야기를 포장해놓는 작가의 센스때문이리라.

개인적으로 "너네 아빠 어딨니?"와 "천국의 왕"이 재밌었고, 막상 장편이자 표제작인 "용의 이"는 지나치게 길어진 분량과 이미지로 머릿속에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 세계관때문인지 조금 실망스러웠다.
단편들 만큼 장편들이 좀더 간결한 매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에서 펼쳐지는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환타지,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맘대로 이름 붙였다던 "동네 SF"라는 말에 무척 잘 어울리는 아기자기하며 귀엽고도 냉소적인 소설집이었고, 무거운 얘기도 무겁게 전달하지 않는 작가의 마인드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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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3-28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듀나 영화게시판 가끔 가는데, 책도 괜찮나 보네요.
나중에 읽어봐야 겠어요^^

Apple 2008-03-30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꽤 독특하고 괜찮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