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의 수수께끼 밀리언셀러 클럽 81
나가사카 슈케이 외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일본 추리소설을 몇권만 읽어보았어도 이름을 알만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 수상작가들의 단편 모음집 1권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말장난으로 살짝 바꿔놓은 에도가와 란포의 이름은 언제 들어도 재치 만점! 그의 소설들에서 괴이하고 변태적인 느낌뿐만이 아니라 살짝 코믹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작가 본인이 어느 정도 유머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마치 그의 이름처럼 말이다.)
기대보다는 살짝 실망스러웠던 에도가와 란포 수상작가 단편집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기획을 읽을수 있으니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서, 찬찬히 청색의 수수께끼도 펼쳐볼까 한다.
수록작들이 대부분 분량이 꽤 되어서, 수록작이 5개뿐인데도 꽤 두툼하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가 하면..
 
첫작품으로 등장한 <'밀실'을 만들어 드립니다.>야말로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쓸데없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인데, 추리소설의 로망 "밀실"을 소재로 어떻게든 밀실 살인사건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들만 등장해서 이것이 추리소설작가의 작품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초보적이고 다소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밀실살인이라던가, <술집 탐정 게임>이라는 게임을 통해 미스테리한 사건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설정자체는 괜찮다. 차라리 옛추리소설에 대한 향수로 빠졌으면 훨씬 훈훈했을 법한 이 단편은, 어디선가 등장해 주인공의 집에 눌러붙어 살게된 피요코라는 소녀의 등장 자체가 무척 작위적이고, 추리소설 작가라면서 전혀 추리해내지 못하다가 막판에 범인을 알고나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주인공의 캐릭터 역시 무척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모든 '밀실' 트릭들 역시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 단편의 핵이 되는 장님 노인 살인사건의 풀이나, 살인이 일어나게 된 경위도 그들이 하고 놀았던 <술집 탐정 게임>처럼 가볍고 납득하기 힘들다.

두번째 작품 <구로베의 큰곰>은 일종의 산악 미스테리이다. 개인적으로 등산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서 읽는데 꽤 곤욕스러웠던 작품이지만,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했던 분위기가 첫번째 작품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다.
설산 구조에 대한 이야기인데, 설산에 대한 배경묘사라던가 작가가 이 방면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써낸 소설같아서, 첫번째 단편에서 받았던 시시한 감정이 "그래, 이정도는 되어야지!"하는 느낌으로 바뀌었달까.
(산을 싫어하는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눈덮인 설산은 등반가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장소인가보다.
설산에서 펼쳐지는 미스테리한 이야기들은 영화에서보나 소설에서보나 알수없는 공포심을 느끼게 한다. 이것 역시 폐쇄된 장소라는 느낌이 강해서 일까. 그 안에서는 알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기묘한 공포심이 든다.
쭉 설산등반 이야기처럼 이어가다가, 서서히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마지막에서는 진실의 짜릿함을 느끼게 하는 좋은 단편이었다.
 
<라이프 서포트>는 폐암판정을 받아 남은 삶이 1년밖에 되지않는 중년 여성이 오래전 자신이 버렸던 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전형적인 추리소설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소설이기는 하지만, 새로 시집간다고 한번 버렸던 자식을 죽을때가 되어서나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찾아나서는 주인공의 태도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똑똑하고, 행동력도 빠르고, 돈도 많은 여자이면 뭘하나. 자신이 버린 딸에 대한 아무 미안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데...
주인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작품은 그저 그런 편이었다.
 
<가로>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남자가 여자 친구와 싸운후에 길에서 한 중년 남자에게 칼을 맞으면서 시작된다.
병원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보니,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남자는 자살했고, 어느새 세상에서 자신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샀던 이 남자의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로, 사건을 비틀어버리는 솜씨와 등장인물들의 관계도를 설정하는 것이 참 재밌는 단편이지만, 후반부 그렇게나 평생을 증오하던 아버지와의 화해가 말 몇마디로 해결되는 점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가장 짧은 마지막 단편 <두 개의 총구>는 역시 다카노 카즈아키라는 말이 나올 만한 단편이다. 분량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사건을 긴장감 넘치게 진행시키고, 막판에 가서는 무엇을 믿어야할지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점이 이 단편의 묘미라 할수 있다. 학교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주인공은 반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총을 들고 설치는 살인자와 학교에 갖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온 한 남자, 자신은 범인과 같은 사격클럽에 다니는 사람이며 그 사람을 말리기 위해 여기에 와 있다고 하는데... 진실은 무엇일까.
기분좋은 긴장감을 유지한채 극으로 치닫는 이야기, 역시 이 단편집에서는 이게 제일 좋았다.
 
<두 개의 총구>를 빼놓고는 이 단편집은 전체적으로 추리소설다운 미스테리한 매력이나 긴장감은 덜한 것 같다.
그럼에도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점이 역시 일본 추리소설의 큰 강점이 아닐지. 단편집중 하나도 겹치는 소재를 가진 작품이 없다. 트릭 위주의 추리소설부터 범죄 스릴러까지 소재에 구애받지 않는 시도들이 일본 추리소설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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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릴리스 5 - 완결
이와다테 마리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순정만화도, 거의 80년대 순정만화에 가까운 조금 감상적이면서 조금 촌스러운 표지의 "아마릴리스"는 의외로 내용은 전혀 순정만화같지 않은 순정만화이다.아니, 순정만화의 루트를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지나치게 현실의 냄새를 투입하는 바람에 끊임없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달까. 볼까 말까 하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되었는데 덜컥 5권까지 구매한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만화이다.
전체적으로 어떤 커다란 줄거리가 있다기보다는,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들과 꽃집을 차리게된 주인공 모모타의 주변과 일상을 그린 이야기인데, 따뜻하면서도 어딘지 무척 깨는 구석이 있어서 몹시 귀엽고 사랑스럽다.
 
호러와 좀비를 사랑하는 B급 취향의 꽃집 미처녀, 우유부단하다못해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머지 착실하게 나온 배를 조금 부끄럽게 여기며 다이어트 드링크를 몰래 마시는 남자주인공, 차갑고 이지적인 것이 당연 할 것만 같은 부잣집 여자는 알고보니 심술쟁이이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큰 꽃집 CEO는 지는 것을 싫어하는 째째한 미녀. 차분한 듯 하면서도 다들 조금씩 소심한 면들이 있어서 째째하기까지한 등장인물들의 행동들에 피식 피식 웃어가면서 보다보니 어느새 다 보고 말았다.
한때 무척 인기있었던 <너는 펫>에서는 조금도 재미를 찾을수가 없었는데, <너는 펫>과 비슷한 맥락의 만화이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비오던 날, 침대에 드루누워 초콜렛을 먹으면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했던 만화.
아, 이 꽃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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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달까지 - 파리에 중독된 뉴요커의 유쾌한 파리 스케치
애덤 고프닉 지음, 강주헌 옮김 / 즐거운상상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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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이상한 나라이다.
운동하러 수영장에 갔더니, 사람들은 수영은 안하고 앉아서 다리만 물에 담그고 수다를 떨고 있고, 헬스클럽에 갔는데 아무도 격렬히 운동하는 사람이 없어서, 헬스클럽에 수건 한장 구비되어있지 않단다. 서류 하나 떼려는데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하나 더 떼어야하는 황당함, 은행가서 카드를 만들려는데, 비밀번호를 본인이 아닌 은행에서 정해주는 이 오만함, 음식점에서 음식을 시키려는데 서투른 프랑스어에 웨이터는 손님을 불쾌한 듯 귀찮은 듯 바라본다.
이런 나라가 프랑스.
몸을 움직이기 보다는 입을 움직이기를 좋아하고, 땀을 흘려 살을 뺀다는 개념이 없어, 비만은 다이어트 크림 하나로 다스릴수 있다고 믿는 게으른 나라. 손님이 왕이라는 우리나라말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불손한 매너의 나라.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그들의 이런 행동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오만할만큼 자존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된다.
 
기자출신의 전형적인 뉴요커 애덤 고프닉이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던 파리에 대한 동경, 결국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몇년동안 파리에 거주하게 된 이 남자의 이야기-사실 여행서적이 아닐까 하고 펼쳤지만, 의외로 여행서적이 아니라 파리에서 살아본 생활인으로써 바라보는 파리가 담겨 있어 개인적으로는 이 편이 훨씬 흥미로웠다. (나는 여행 서적을 싫어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는 여행도 싫어한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행은, 생소한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처럼 몇일을 살아보는 여행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런 쪽의 책이 내게는 더 맞지 않을까.)
 
저자는 프랑스에 대한 동경으로 날아갔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프랑스 역시 변한 지 오래되었다. 섹스의 나라라는 명성은 암스테르담에 빼앗겨 버렸고, 거리마다 맥도날드가 판을 친다. 미국식 음식이 들어옴에 따라 미국식 문화도 같이 딸려들어올수 밖에 없어서, 환상속의 예술의 도시였던 파리는 이미 그 환상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미국식 문화는 가져들어오면서도, 잘못된 점은 꼭 다 미국때문이라 욕하는 프랑스 사람들- 비겁하지만, 어떤 면으로는 참 순진한 사람들이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수다 떨기 좋아하고, 남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통성명을 하고나면 반드시 지나칠때마다 안부를 물어줘야하는 프랑스 사람들, 그 오만하고 게으르기 짝이없는 프랑스의 하나하나가 빠릿빠릿한 생활 패턴과 개인주의에 사로잡힌 뉴요커에게는 피곤하고 진땀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파리를 사랑할수 밖에 없는 이유, 아무리 미국식 문화가 판을 치고 있어도 파리가 여전히 파리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오래된 레스토랑 주인이 바뀌고 메뉴가 바뀌기 시작하자 단골 손님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추억의 레스토랑을 여전히 그자리에 놓아두려 노력하는, 참견 잘하는 사회에서 볼수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정"에 가까운 행동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처리에 답답하고, 아는 척에 짜증이 나도, 개개인의 역사마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도시는 그래도 여전히 예술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까.

책을 쓴 저자는 뉴욕출신이고, 책의 배경은 프랑스 파리이고, 또 읽는 독자인 나는 한국인이니,
이 뉴요커가 파리에서 이해할수 없었던 점들이 뉴욕의 시선에서 또 한국의 시선으로, 두번에 걸쳐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잘 이해가가지 않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저자의 소소한 일상들의 이야기가 유머러스하게 이어져 큰 불만없이 보았다. (하지만 오타는 좀 신경써주길 바란다.)
유럽인들이 축구에 환장하는데 비해, 미국인들은 축구에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축구에 열광하는 유럽인들이나 우리나라의 축구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어떻게 축구를 사랑하지 않을수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이 책에 미국인들이 축구를 즐기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역시, 미국인으로써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 월드컵을 바라보며 축구에 도무지 정을 붙일수 없던 저자가(득점기회를 노리려고 패널티 킥을 얻으려 반칙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심지어는 비열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아이스하키와 농구를 보며 유럽인들이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게된 부분이다. 나 역시 축구는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공감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첨부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축구는 보고 즐기자고 만들어진 스포츠가 아니었다. 직접 공을 차며 경험하는데 의미가 있는 스포츠였다. 힘든 상황, 실패가 거의 확실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월드컵은 숙명의 축제인 듯 하다.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고 누구도 골을 넣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닮은 점이 있다. 0대 0은 삶의 득점표다. 여전히 운동장에서 에덴동산을 찾는 미국인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철학일 수 있다. 그러나 축구는 삶의 도피 수단으로 만들어진 스포츠가 아니다.
뭔가 불공평하고 답답하다는 점에서 축구는 곧 삶이다.
우리는 부당한 이익을 구하고, 조그만 기쁨의 순간을 최종적인 승리인 양 좋아하며, 또 상대편의 실수를 바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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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드랜드
미치 컬린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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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릴 때의 기억을 훗날 되돌이켜보면 많은 기억들이 왜곡되어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린 아이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고싶은대로 보며,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한다.
또 어른들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초인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일상과 환경의 아주 작은 순간부터 외부적으로, 또 내부적으로 조금씩 생채기를 내가며 조금씩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완벽한 초인이고, 상처받지 않은 영웅이던 어린 시절도 사라져간다.
<타이드랜드>의 주인공 젤리자 로즈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떻게 회고하게 될까.
매일이 모험처럼 흥미진진하고, 환상적이며 기괴한 이 일상들의 진실을 깨닫는 순간,
젤리자 로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웃게 될까, 부정하게 될까.

아동인권보호자들이 보았더라면 천인공노할 책 <타이드랜드>는 현실을 환상으로 바꾸어버린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현실속의 젤리자 로즈는 마약중독자 부모를 가진 불우한 어린이이다.
너무도 당연해서 그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지만, 그녀의 부모는 마약에 취해있을 뿐만이 아니라, 12살이나 된 아이를 학교에 보낼 생각도 하지 않으며, 젤리자 로즈를 임신했을 때 마약을 하지 않은 사실을 무척 대단히 여기며, 어린 딸에게 직접 마약을 제조하게 시키기도 한다.
현실속의 젤리자 로즈의 부모는 부모로써의 책임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 불량부모이지만,
젤리자 로즈는 불만이 없다. 그녀에게는 비교해볼수 있는 다른 가정이 없으므로,
자신의 이 이상한 일상들이 당연스럽게 생각된다.
 
그리고 무책임한 부모들은 죽는다.
마약에 빠진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살이 쪄서 죽어버리고, 엄마의 시체를 내버려두고, 젤리자로즈를 데리고 텍사스로 도망쳐온 아빠도, 마약중독으로 죽어버린다.
어른의 눈으로 본 버려진 아이 젤리자 로즈의 환경은 막막할 정도로 갑갑하기 그지 없지만,
젤리자 로즈 자신에게만은 이 갑갑한 일상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모험이 되어버린다.
죽음에 빠진 아버지가 약에 취해 잠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상상력.
크래커만 먹으며 끼니를 연명해도, 젤리자 로즈는 배고픔을 모른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동화속 앨리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밖에 없는 네개의 바비인형을 손가락에 끼고, 그들을 친구삼아 악당 다람쥐를 쫓고, 유령인 델을 만나 식사를 얻어먹고, 어딘가 모자른 남자를 만나 키스를 하고 아이를 가졌다고 상상한다.
동화라는 약에 취한 젤리자 로즈가 이 현실을 살아가는 법은 보고싶은대로 보고, 느껴지는대로 느끼는 것이다. 진실이 어떤지는 중요치 않다. 상상할 수록, 꿈 꿀수록 모든 것이 즐거운 놀이가 될테니.
 
<타이드 랜드>는 어른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상당히 문제될만한 점이 많은 소설이다. 마약중독자 부모에 의해 방치된 아이, 죽은 아버지를 곁에 두고 살아가는 아이, 후반부에는 아동성추행에 가까운 부분까지 등장한다. (맙소사!)
그럼에도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소설이 마냥 암울한 것만은 아닌데, 그래서 이 소설이 환상적이면서 기괴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젤리자 로즈의 모험담처럼 느껴졌던 이 책은 책장을 넘길수록, 묘한 씁쓸함과 섬짓함을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게 어린 시절이란 그 확실치 않은 모호한 기억들이 집합된 기괴한 악몽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기 때문에, 순진하고, 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많은 일들, 하루하루가 모험같았던 일들의 진실을 훗날 깨달았을때 느껴졌던 그 당혹스러울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 무척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내내 젤리자 로즈가 훗날, 자신의 어린시절을 어떻게 회상하게 될까 궁금했었다.
혹시나 나처럼 당혹스러운 진실에 공포감마저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쿨하게 그런 시절도 있었지-하면서 웃어 넘길까.
 
환상과 모험과 불쾌한 현실이 뒤섞인 묘한 소설로,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약에 취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같은 맥락에서 영화 <판의 미로>를 떠올릴 수도 있겠는데, 그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 역시 재밌게 볼수 있을것이다.(<타이드 랜드>가 조금 더 기괴하고 <판의 미로>쪽이 조금더 구슬프다고 할수 있다.)
 
p.s 영화 <타이드랜드>는 역시 대중적으로 인기얻기 힘든 영화라 그런지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았지만, 감독이 테리 길리엄인 만큼 소설과 영화의 이미지 매치도가 꽤 괜찮을 것 같아서 혼자 기대중이다.
빼놓을수 없는 점은 <사일런트 힐>에서 나를 감동시킨 미소녀 조델 퍼랜드가 젤리자 로즈를 연기한다는 사실! 천사처럼 예쁘고 귀여운데도, 눈은 어른처럼 깊고, 어딘지 아이답지 않은 어둠의 신비로움을 풍기는 조델 퍼랜드에게는 밝고 명랑한 아이들용 영화보다는 확실히 기괴한 영화들이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아이의 미래가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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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노트 - 범죄심리를 해석하는 새로운 눈
로이 해이즐우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미국 범죄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프로파일"이라는 다소 생소했던 단어가
아주 생소하지 만은 않게 되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옛날 추리소설부터 최근의 추리소설까지 주구장창 등장하는 탐정이나 형사집단에서 그런 프로파일을 많이 접했었는데, (사실 그걸 프로파일이라 부르는지도 몰랐지만..) 이게 참 볼때마다 신기하다. 주어진 단서만을 가지고 범인이 몇 살정도의 어떤 성별을 가진 사람이고, 그 사람의 취향이나 버릇, 심지어는 그 사람의 과거 행적까지도 추측하는 탐정들을 보면서, 이게 과연 소설이라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프로파일링은 사실상 존재한다.
물론 프로파일러들이 초능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증거가 모두 모여야 정확한 프로파일링이 가능하겠지만, 주어진 단서만으로도 한번도 보지 못한 흉학범들의 신상을 얼추 맞추는 것을 보면 소설속의 탐정들이 했던 추리들이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은 아닌가 보다.
이 책을 보려고 했던 이유는, 프로파일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또 어떤 근거로 범인을 추측해 나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프로파일러들이 굉장한 천재이거나, 굉장한 지식을 축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책속의 프로파일러들은 천재도, 초능력자도, 굉장한 지식인들도 아니었다.
끝없는 관찰과 인내, 수많은 경험에서 축척된 통찰력이 프로파일링의 원동력이었다.
가끔씩 영화에서 보는 닳고 닳은 형사들이 용의자를 보고 범인이라 감을 잡는 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경험에서 축척된 프로파일링의 일종이었던 셈이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범죄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 강간 사건들인데, 그런 범죄들의 동기가 대부분 성적인 만족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환상과 지배욕의 표출이라는 사실을 듣고 나니 이 편이 오히려 소름끼치는 일이다.
억압받은 사람일수록 지배욕에 대한 열망이 강해진다.
행동을 마음대로 할수 없는 부자유스러움은 마음속에서 지배욕이라는 환상을 키워나가고,
그 환상은 점점 커져 자신을 제어할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삐뚤어진 지배욕의 형성 과정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비슷한 성장과정을 거치고도 멀쩡히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일반화시켜 통계를 낼수 없음도 인간 정신의 신비로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속에 등장하는 '자기성애'자들의 이야기는 충격의 극치였다. 가학성을 가진 범죄자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마음속에 내재된 피학성의 환상을 자기 손으로 실현해 자살할 마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게 되는 위험한 정신상태는 참 알수없는 부분이었달까.

프로파일러 출신인 작가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현실적이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신기에 가까운 반짝이는 추리나 반전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기다리고 기다려서 끝내 단서를 모으로 모아 하나씩 사실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말이 '어' 다르고 '아'다르다는데, 스릴러 소설이나 영화에서 접한 여러가지 상식들을 사실이라고 미묘하게 조금씩 착각하고 있었던 점도 꽤 많아서,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게 되었던 계기도 되었다. (부끄럽지만,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프로파일링하는 법은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FBI에서 근 30년간 프로파일링을 하면서 만났던 범인들과, 그들을 추적하는 이야기, 그리고 범죄 심리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무척 매력적인 책이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고, 작가가 풀어가는 이야기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르지도 않아서, 범죄심리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다.
 
단, 아쉬운 점은 책은 너무나 좋은데, 오타가 꽤 많아서 책을 읽으면서 출판사의 성의없음에 불쾌해졌다. (이상하게도, 유독 이런 종류의 책들에서는 오타가 많다. 왜일까?)
책을 내기 전에 교정을 봐야하는 건 돈을 주고 책을 사서 보는 독자들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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