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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ㅣ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평점 :
죽음에 이르는 800만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방법도 있다.
지하철 자살이 썩 좋은 방법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지하철에 몸을 던진다.
뉴욕에는 끝없이 긴 다리들과 고층 빌딩의 창들이 있다.
또 면도날과 빨랫줄과 약을 파는 가게들이 하루 24시간 문을 연다.
내 방 서랍에는 32구경 권총이 있다.
호텔 방 창문에서 뛰어내리기만 해도 간단히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일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인 적도 없다.
겁이 너무 많거나 불굴의 의지를 가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지독한 절망이 생각만큼 절실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로렌스 블록 <800만 가지 죽는 방법>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맥빠지고 쓸쓸해지는 책.
도시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다 이런 것일까.
지독히도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독한 담배연기같은 느낌이다.
수많은 삶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어가고 동시에 그 죽음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도시에 온통 유독 가스가 가득할것만 같은 세기말적인 도시.
도시 전체가 더럽고 오래된 지하철처럼 느껴지는 도시 뉴욕에서의
800만가지 사는 방법과 800만가지 죽는 방법.
책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부분은 주인공 매트 스커더가 무언가를 먹는 부분과
신문에서 보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 소식인데,
먹는 것이 다분히 일상적이듯, 누군가가 죽는 것 또한 일상적으로 느껴졌다.
오래전 꼬마 여자아이를 실수로 총으로 쏴버리고 경찰직을 그만둔 주인공 매트 스커더.
이혼한 아내는 멀리 살고 가끔 돈을 송금해주는 것뿐, 별다른 접촉은 없는데다가,
특별한 거처도 없이 호텔에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유별나게 친한 사람이라던가 그의 일상에 파고들어오는 사람도 없고,
과거의 사건과 지독한 고독을 잊기 위해서인지 술에 쩔어살다가 알콜중독자가 된,
만약 당장 죽더라도 큰 미련은 없을것 같은 남자.
그에게 젊은 창녀가 하나 찾아온다.
창녀는 그에게 포주에게서 자기를 빼내 달라며 돈을 주고 부탁을 하는데,
포주와의 협상이 원만하게 해결된 후에, 창녀는 끔찍한 모습으로 피살된다.
이 사건을 쫓으며, 어딘지 너무 정상적이고 매너좋아서 무섭다던 포주와 만나게 되고,
죽은 창녀의 사생활을 되짚고 넘어가며 수사를 펼친다.
알콜중독자에, 아주 가끔은 금주를 참지 못하고 술을 마시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가 죽음을 목전앞에 두기도 하고,
늘 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지독히도 커피를 마셔대는 어딘지 허술해 보이는 탐정 매트스커더는
의외로 꽤 예리한 인물이었는데,
아마도 그의 모습이 거의 루저에 가까운 동시에 누군가의 죽음의 전말을 밝힐수 있는 히어로였기 때문인지,
주인공 자체가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충격적인 반전이라던가, 칼날 끝처럼 예리하고 정확한 추리따위를 바란다면
분명 그저그런 소설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냉소넘치는 소설이 참 마음에 들었다.
교양넘치는 포주, 알콜중독자 탐정, 뉴욕을 혐오하는 경찰, 직업관이 투철한 창녀들.
아이러니하지만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은 어쩐지 모두가 인생역전같은 별다른 큰 희망없이 살아가지만,
자기 삶에 만족할 줄 알고 나름대로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 동시에
모두 쓸쓸해보였다.
사람들은 얼마나 삶과 죽음을 인정할줄 알까.
아니, 자기 자신조차 인정하기 힘든 세상이다.
주인공 매트 스커더가 처음으로 자기가 알콜중독자임을 시인하며 울었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 문제점, 슬픔, 아픔, 그리고 삶으로 돌아오려는 욕구.
모든 것을 인정해버린 매트 스커더의 모습은 슬퍼보이면서 뿌듯했달까.
세상에는 많은 죽음이 있는 동시에 그보다 많은 삶이 있다.
언젠가 태어나 죽음으로 돌아가야하는 인생.
누구도 기억못하는 죽음일지라도, 인생의 매 순간이 시간낭비일뿐이라도,
모든 인생은 쓸쓸하면서 동시에 사랑스러운게 아닐까.
책을 보는 내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나 "택시 드라이버"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지독히도 냉정한 도시와 냉소적인 주인공들 덕택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