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와의 결혼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3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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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씨와 히스클리프에게 꽤 오래도록 사랑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었다.
다 자라고 나서 본 그 책들의 자세한 인물 묘사는 참 실망적이었다.
예쁜 구석 하나도 없는 제인에어와 머리가 큰 다부진 체격의 로체스터씨,
거의 소도둑놈에 가까운 인상의 히스클리프.
어린 시절부터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좋아하는 내가 어째서 이런 예쁜 구석없는 인물들을 좋아했을까 떠올려보면,
아마도 그들의 비밀과 고독으로 일그러진 상처받은 내면에 홀딱 반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 나는 언제나 그런 캐릭터를 사랑한다.
지독히도 외롭고, 고민에 휩쌓여 있으며, 음울한-
그래서 내버려 둘수 없이 한번쯤 다정하게 말을 걸어 얘기해 보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어느날 갑자기,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이 불현듯이 떠올라서,
윌리엄 아이리쉬의 다른 소설들을 두권 주문했다.
그중 하나인 이 책 "죽은 자와의 결혼"의 두 주인공 패트리스와 빌을 바라보면서,
나는 똑같은 호감을 느꼈다.
연약하고 보잘것 없고 언제나 불안에 휩쌓인 여주인공 패트리스,
패트리스에게 과감히 다가서는, 사랑해서는 안되지만 너무나 다정해서 사랑할수 밖에 없는 남자 빌.
그들의 로맨스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애절하면서도, 동시에 우울하고 슬프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갓 스무살된 헬렌은 가진것 없고 비참한 신세의 여자이다.
운나쁘게도 상종해서는 안될 남자를 만난 댓가로 혹처럼 붙어있는 뱃속의 아기.
그녀가 가진 돈은 단 5달라.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친절한 신혼부부를 만났는데, 이 만남은 그녀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를 준다.
기차가 사고가 나고, 두 신혼 부부는 죽었으며, 그 와중에 헬렌은 아이를 낳아버렸고,
신혼부부중 여자가 손을 씻으라 잠시 건네준 다이아 반지를 끼고 있다가
사고 후에 병실에서 깨어났을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여자 패트리스, 반지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던 패트리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헬렌은 패트리스의 인생을 살게 되고, 도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의 며느리가 되어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끝없이 양심이 그녀의 이성을 질책해오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누가 이 여자를 비난하랴.
 
부유한 생활. 너무도 친절한 사람들. 다정한 시동생 빌.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아기.
행복의 정점에 서서 패트리스가 늘 고뇌를 하고있는 이유는
그녀의 이런 거짓말이 언제 들킬지 몰라서이다.
그녀는 늘 불행했던 때보다, 행복이 깨어져 불행해지는 것이 더 슬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매일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패트리스의 심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읽는 내내 불안함과 초조함에 휩쌓이게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은 똑같을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믿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음에도 사랑하곤 한다.
모순이지만, 인간의 마음 중 어느 것이 정확히 언행일치하는 적이 있던가.
심지어는 경멸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는데 말이다.
소설의 결말은 무척 쓸쓸하고 가슴이 아파서 보고난 후에 한참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낮에 먹은 점심이 채해서 목에 걸려 저녁까지 괴로운 것처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지도 모르지만,
패트리스와 빌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은채 살면 좋으련만, 이 착한 주인공들의 양심은 너무나 깨끗하고 여려서,
아마도 평생 그 불신과 자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언젠가 그가 떠날지도,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그렇단다.
 
이책은 추리소설임과 동시에, 로맨스 소설이다.
윌리엄 아이리쉬의 우울하게 침잠해가는 애수어린 로맨스는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미칠듯이 불안해서 순간 순간 산산히 부수어져 버리는 마음, 손에 잡히지않는 우울한 사랑,
행복 역시 불안과 신경쇄약으로 흩어져가는 고독한 풍경-
나는 정말로 이런 것이 너무나 좋다.
윌리엄 아이리쉬마저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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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름들 - 세계현대작가선 11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문학세계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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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득, 내가 앞으로도 쭉 혼자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첫번째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병에 걸리거나, 노환이 와서 병원에서
가족들을 앞에 두고, 일생을 마감하는 것.
두번째 죽음은, 어떤 이유로 자살을 하는 것.
세번째 죽음은 급사해서 방에서 죽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꽤 섬뜩하고도 쓸쓸한 독신의 죽음의 형태가 이렇지만,
어차피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이란 누구나에게나 찾아오는 숙명이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죽음은 언제나 혼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독하고 두려운 것이 아닐까.
 
역사에 남을 위인들의 죽음은 후세에도 기억된다.
그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후에 사람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할만한 이야기거리를 남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언제나 고독하다.
어떤 이유로, 어떤 형태로 죽었든,
살아있을때 행복했든, 불행했든,
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매초마다 존재감은 점점 사라지고 만다.
 
소설속의 쥬제씨는 어느날 어느 여자의 기록부를 발견한다.
알려진 바 없는,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모든 이름들"중의 하나인 그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은,
그녀가 아주 특별한 위인이나 유명인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50년 가까이 혼자 살았고, 결코 부유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단촐한 삶에서 찾아낸
너무나 평범한 여자.
그녀의 생사를 그토록 궁금해했고, 죽음의 이유를 궁금해했고,
그녀의 이유조차 알수 없는 자살에 가슴아파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을 알고 싶어지는 것- 사람들은 그런 것을 사랑의 시작이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누군가를 "기억"에 담아두는 것은 어쩌면 아주 대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한때에는 아주 소중했던 추억도,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니까.
그래서 "기억"에 누군가를 담아둔다는 것은 무척 뿌듯하면서도 슬픈 일이될것이다.
누군가 요정의 존재를 믿는다면 팅커벨이 살아날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 잊혀진 사람의 존재를 사랑해준다면,
그 사람은 더이상, 흔하게 잊혀져가는 사람이 아닌 특별하고 고귀한 사람이 될테니...
 
그다지 무거운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기분이 우울했고 마음이 허전해졌던 것은
이것이 삶의 이야기 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평범해서 죽고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아주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독한 이야기이니까.
커다란 긴장도, 커다란 감동도 없으면서도 이 건조하고 쓸쓸한 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나 역시 죽은 후에는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갈 너무도 평범한 사람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되어야할 사람일까.
쥬제씨가 어느날, 기록부에서 발견한 이름모를 여자를 떠올린것처럼,
누군가 나의 삶을, 나의 죽음을 기억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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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님의 리뷰 보니 이 책 꼭 읽고 싶네요.
땡스투 누릅니다.^^

Apple 2006-03-07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즐거운 독서되시길...
 
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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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뚱뚱한 사람들이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는 것을 참 싫어한다.
그 사람이 뚱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짙은 색 옷을 입으면 날씬해 보이리라는 컴플렉스가 싫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잔인할지 몰라도, 짙은 색 옷을 입어서 날씬해진다는 말은
어느정도 마른 사람의 얘기이다.
검은색 옷을 입어도 살은 역시 살일뿐,
오히려 답답하고 어두워 보인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굳이 타인이 얘기해주지 않는 이상은 잘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친구를 떠올렸다.
언제나 검은색 갈색 옷만 입던 통통한 친구.
사실 살결이 하얗고, 웃는게 에쁘던 그 친구는 어두운색 옷보다는 파스텔톤의 옷이 잘 어울렸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것 역시 컴플렉스였겠지.
내가 추천해주었던 파스텔톤 옷을 입고나서 그후로는 계속 밝은 색옷을 입고,
훨씬 밝고 귀여워진 나의 통통한 친구.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 친구가 생각났다.
 
"씁쓸한 초콜릿"의 주인공 에바는 자신의 뚱뚱함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거라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수업시간에도 언제나 소극적이고, 또래 친구들과의 사이도 언제나 멀리서 지켜볼수 밖에 없는
비만의 컴플렉스로 고민하고 있는 소녀이다.
컴플렉스는 사람을 작게 만든다.
넉넉한 외형과는 달리, 에바는 소심하고 소극적이다.
어쩌다 남자친구도 생기고, 학교에서 친구도 생겼지만,
이런 컴플렉스는 여전히 에바를 괴롭힌다.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다가 자기도 몰래 냉장고를 털어버리고는

울며 잠드는 소심한 소녀.
컴플렉스가 성격이 되어버린 소녀.
에바는 언제나 날씬한 사람이 되면 더 행복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국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컴플렉스에서 헤어나온 에바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것은 비만이 아니라 컴플렉스라는 것을 깨닫는다.
 
뚱뚱해도 괜찮아.
살이 좀 찌면 어때.
나의 가치는 겨우 그런 외형에 있지 않은데...
...라고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외모는 단지 타고난 얼굴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예쁜 사람이 묘하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좀 통통하더라도 좋은 표정을 가진 사람이 매력적일수도 있는 법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인간의 외형이라는 것은,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된통 혼이나고 나서는 엄마가 미안한 마음에 건네주는 초콜릿은
언제나 씁쓸하고 우울한 맛이 났지만,
이제쯤은 달콤해지지 않았을까.
에바는 이제 소심한 뚱보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뚱보가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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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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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두 읽고 났을때는 무척 화가 났었다.
어째서 이런 결말을 내야했는지, 좀 오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 화가 나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더 역겨웠던 사실은 내가 이 소설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일류대기업의 잘나가는 여사원이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일류 여고를 졸업하고, 일류대를 나와 끝까지 승진할수 있는 전망 좋은 직업을 가진 이 여자는
낮에는 능력있는 캐리어우먼으로, 밤에는 밤거리를 전전하며 남자를 찾는 창녀로 살아간다.
그리고 창녀쪽의 여자로써 어느날 갑자기 살해된다.
소설은 이 여자 가즈에의 죽음을 시작으로 오래전의 이야기부터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와 사건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소설이 잔인한 이유는, 살인사건 때문이 아니다.
작가는 추악하고 그로테스크하기 그지 없는 현실의 내면을,
그리고 여자의 내면을 메스로 갈기 갈기 찢어 보여준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에 형태가 있어서 꺼내볼수 있다면
그 결과물은 이렇게 역겹고 추하지 않을까.
 
 
유리코라는 소녀가 있다.
스웨덴인 아버지에 일본인 어머니, 둘다 잘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누구나 돌아보게 만들만큼 눈이 부신 아름다운 괴물 유리코라는 혼혈아를 낳았다.
유리코. 타고난 요부이나 창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고나서부터 섹스를 좋아하는 님포마니아.
그녀가 살아가야하는 이유는 오직 그 뿐이다.
그녀는 남자가 없이는 살수 없는 선천적인 창녀.
하지만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 섹스이기 때문.
언제나 먼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을 잡으려고 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어떻게든 가져보려고 하고,
일찍이 이런 시선에 너무나 익숙한 유리코는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번다.
그렇게 중학교때부터 시작된 매춘은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그렇게 살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유리코의 언니, 소설의 진행자 "나"는(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똑같은 혼혈아이면서도 유리코와는 정 반대이다.
유리코에 비해서 늘 모자라는 외모덕에 평생을 유리코와 비교되면서 살아온 여자.
언제나 누구에게나 이름보다는 "유리코의 언니"로 기억되는 여자.
덕분에 동생인 유리코를 죽도록 싫어하고, 실제로 유리코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매정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 키워왔던 것은 "악의".
남의 싫어하고 깍아내리면서 온통 적개심으로 가득차, 세상의 무엇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대로 타인에게 시비를 걸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타고난 염세주의자.
 
그리고 미쓰루가 있다.
"나"가 동경했던, 아니, 누구나 동경했을지 모를 머리좋고, 게다가 성격도 좋은 우등생.
"나"가 살아남기 위해 악의를 선택했다면, 미쓰루는 "두뇌"를 선택했다.
철처히 계급중심의 사회인 Q학원 중학생 시절 왕따를 경험하고 나서
그녀는 전략적으로 아이들에게 노트를 기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잔인무도한 Q학원에서 그녀가 살아남을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머리가 좋아서도, 성격이 좋아서도, 얼굴이 그런대로 예뻐서도 아닌,
단지 "이득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있어야하는 이유, 대기업의 캐리어우먼이자 창녀인 이중생활을 해온 가즈에가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악바리가 된 여자.
남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가서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든 1등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
계급사회에 철저하게 동화된 채, 무엇이든 1등에 올라가고 싶은 여자.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미련하고 우매한 노력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내가 보기엔, 가즈에에게는 자존심도, 자기애도 없다.
아니, 예전에는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즈애는 원래 가져야할 자존심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해 택했던 악바리 근성밖에 남지 않은 괴물이 되어간다.
 
연봉을 1천만엔이나 받는 여직원이 왜 창녀가 되었을까?
가즈에는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따라갈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흡수해버리는 유리코의 미를 동경해왔고,
능력있어서 들어간 회사인데도 타고난 외모가 못생긴 가즈에는
남자들의 눈에는 메력적인 여자로 비춰지지 않는다.
적당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남자의 관심을 받기위해 존재하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단지 한 때 젊은 시절 잠시 지나가는 소모품이라는 것을 가즈에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기고 싶은 것이다.
섹스에서조차 1등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머리만 좋고 못생겼다고 뒤에서 수근대는 여직원들에게,
여직원을 외모로 평가하는 남직원들에게,

나는 너희가 절대로 할수 없는 짓을 밤에는 하고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
이 외모중심의 사회에서 이런 나라도 남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기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는 여자.
나는 이런 미련하고 극단적인 악바리가 정말로 싫다.
그래도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기의지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자존심덩어리로 보이는 가즈에 만큼은 자기의지가 없어보인다.
그녀는 어쩌면 남들이 하는 것을 모두다 하고싶어하는 욕망의 동물이 아닐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스토킹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타인의 성적과 비결을 따라가려는 비열한 1등 마니아.
누구나에게 무엇이든 잘하는 자기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던 과시욕 마니아.
결국 가즈에가 그토록 망가져버린 것은 더이상 등수가 필요없는 세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일 아닐까.
 
언제나 1등 하려고 전전긍긍했지만, 세상에 나와보니 등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기보다 잘난 여자가 먼저 나서 커피를 돌리고 여유있게 웃을때,
가즈에는 우습게 보면서도 의아해한다.
그녀에게 있는 또다른 세상, 평범한 남자친구와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는 일상,
가즈에가 동경했던 것은 1등이 아니라, 이런 여유가 아니었을까.
가질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가즈에는
결국 남다른 재능-끊임없이 미련한 노력을 계속하는-을 이용해서 결국은
엉뚱한 쪽으로 자기자신을 붕괘시켜 버린다.

 
 
 
소설은 일단은 화자인 "나"에 의해서 진행되지만,
네 여자의 견해를 모두 들어보고나서,
창녀인 유리코의 살인사건 1년후에 일어난 밤에는 창녀로 변신하는 엘리트 여사원의 살인 사건을
다각도에서 풀이해나간다.
만약 단 한사람의 의견에 의해서 소설이 진행되었더라면, 좀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다각도의 시선은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등장인물에도 호감을 가질수 없게 만든다.
모두 삐뚤어지고, 조금의 여유도 없으며,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처럼 보인다.
결국 이 얘기는 네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괴물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유도했던 대로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작가의 말에서 다 읽고 난 독자의 마음에 "괴물"이 떠올랐다면 성공적이라고 말하는데,
그 점에서는 아주 충분히 성공적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듯이, 다각도로 바라본 사건들은 모두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진실이면서 진실이 아니다.
 
악평을 늘어놓는 것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이글은 악평이 아니다.
인간의 추악한 점만 모아놓는다면, 분명 이런 소설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무척 속이 좋지 않았고, 두려웠고, 화가 났다.
여자로써 이 지독히 잔인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이 무엇인지, 
결국은 이 소설도 말해주지는 못한다.
단지 암울한 결론 "여자이니까, 여자라서"-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고 추악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정답도 없는 것을 내가 혼자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사실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로,
무척 현실성있게 다가오는 점이 아주 많은 소설이다.
그래서 더더욱 잔인무도하다.
이런게 세상이라면, 이런 세상에 노출될 바에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찌르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게 현실인 걸.
외모중심의 세상에 태어나 외모중심으로 평가받고, 늙으면 그 외모도 필요없어진다.
젊은 시절 누구에게나 여신이었던 유리코가 후에 늙어버린 창녀가 되었을 때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왕따에 둔하고 미련한 노력가였던 가즈에가 결국 창녀가 되었을때,
그녀의 죽음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성공한 캐리어우먼과 창녀 두가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간은 이런 그로테스크한 세상을 만들어버렸을까.
어째서 여자는 늘 외모중심도, 능력중심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갈수 밖에 없을까.
그리고 어째서 여자는 여자를 좀더 사랑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소설속의 네 여주인공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싸우거나, 비웃거나, 서로를 질투하고, 악의를 가득 채운채 어떻게든 모욕을 주려 작정한 사람들같다.
서로의 마음속은 서로 알바 아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택한 시선에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증오한다.
유리코는 냉정한 언니를 증오하고, "나"는 유리코를 멍청하다고 증오하고,
가즈에는 "나"를 폐배자라고 욕하며, "나"는 가즈에는 멍청한 왕따라고 비웃는다.
이 소설속의 서로에게 조금의 동정심이나마 갖지 못하는 네 여자주인공들을 보면서,
내가 혹시 타인의 마음속에는 저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 속에도 이 네 여자가 모두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질투하고, 적의를 느끼고, 왠만하면 실패했으면 좋겠고,  비웃으며, 놀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면은 우리모두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섭다. 속을 완전히 알수 없기에 더 무섭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세상은 무섭고 추악하다.
 
어디엔가 분명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껏 공부해서 들어간 회사에서 커피심부름이나 하는 여직원들,
회식 자리에서조차 상품으로 평가받는 여직원들,
평생 세상에 대한 악의를 품고 살아가는 여자들,
악바리로 살아남으려고 애쓰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서서히 자기내면을 자기손으로 엉망진창으로 붕괘해 나가는 여자들...
그래봤자, 모두 탈피 할수 없었던 여자라는 껍데기안의 여자라는 괴물.
씁쓸하고 역겹고 두렵다.
사실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볼수 있었는지,
나 역시 그들의 마음 아픈 심리보다 그로테스크한 겉모양에 심취한 속물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니
무척 부끄러워졌다.
 
 
매우 거북한 소설이다.
아프게 찔러오고, 화가나게 만들고, 눈물이 나게 만든 다음, 역겹게 만든다.
좀 황당한 결말을 뺀다면, 분명 멋진 소설임에는 분명하지만,
두번 읽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
너무 그로테스크해서, 너무 역겹고 지독해서-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어떤 공포소설보다도 무서운 현실의 이야기라서-
그래서 이 이상은 다시 쳐다보지 않고 영원히 봉인해버릴테다.
그리고 기리노 나츠오의 다른 소설을 읽는 것도 당분간 보류해두어야 겠다.
기리노 나츠오의 독은 너무 치명적이고 지독해서 당분간은 감당하기 힘들것 같다.
 
 
p.s 누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 소설안의 등장인물들중에서,
유일하게 사랑받았던 사람은 주인공의 외할아버지가 아닐까.
외할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않았던 유리코조차, 외할아버지에게 알수 없는 애정을 느끼고,
주인공 역시 외할아버지와의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느긋하고도 약간은 바보같이 살아야 사랑받을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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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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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고리타분한 사고와 고정된 보수주의로 가득찬 재미없는 젊은 남녀 데이비드와 헤리엇이
마치 동류의식이라도 느낀듯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무척 행복하고 기름진 가족주의를 바탕에 둔 행복이다.
친인척들과의 화합, 그리고 집안에 넘쳐나는 아이들, 커다란 집, 아주 화목한 가정.
 
결혼하자마자 그들은 아이갖기에 힘쓰고,
친인척들의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아이를 가진다.
첫번째 아이, 두번째 아이, 세번째 아이, 네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온 집안은 축복과 행복, 그리고 주위의 걱정스러운 눈길로 넘쳐난다.
 
그리고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다.
선천적인 파괴본능을 지닌 소악마. 타고난 살인자.
아이를 가진 순간부터 해리엇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다섯째 아이 벤은
착상이 된 순간부터, 태어난 후까지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괴물이다.
아이를 가진 몸에서 그래서는 안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해리엇은 다섯째 아이 벤을 가진 8개월동안 약물에 의지하며 아이가 발길질을 해대는 배를 때려대고,
죽도록 뛴다.
어쩌면, 태어나기전에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며-
 
다른 네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조금도 사랑스럽지 못한 아이 벤은
엄청난 식욕으로 엄마의 젖을 멍들게 하고, 3살이 되기 이전에 두마리의 동물을 목졸라 죽이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람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아이답지 않은 괴성을 지르며 발광한다.
무작정 뛰쳐나간 벤이 도로를 달릴때 해리엇은 생각한다.
차라리 저 애가 차에 치어 죽어버렸으면-
창문가에 위태롭게 서있는 벤을 바라보며 해리엇은 생각한다.
차라리 저 애가 저리로 뛰어내려서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이 아이가 장애아 였다면 이다지도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해리엇은 생각한다.
말썽장이 벤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히스테릭해져가는 엄마 해리엇,
점점 벤을 포기해가며 자기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아버지 데이비드.
벤에게 엄마를 빼았겼다고 생각하며 벤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네 아이들.
벤은 결국 가정을 파탄내는 소악마가 되어버린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가족주의와 보수주의에 가득찬 두 남녀가 꿈꾸는 안정적인 가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위선인가를 보여준다.
어떤 아이들은 가진 순간부터 부모 속 썩이는 일 없이 순조롭게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10달 내내 엄마와 아빠를 괴롭히며 태어나기도 한다.
비단, 이 소설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10달 내내 입덧과 고통으로 고생을 하며 아이를 낳는 엄마들은
현실에서도 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가정을 파탄내 버린 것은 모두 벤의 책임일까.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한 이 다섯째 아이 벤이 단 한순간이라도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나.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아이, 차라리 멀쩡한 몸이 아니었으면 하는 아이.
뱃속에 있을때 부터 엄마의 주먹질을 받아가며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의 증오가 서린 눈길을 받아가며 큰 아이가
소악마가 되거나, 또는 심각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자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복잡한 사고는 하지 못하지만, 본능적인 사고는 어른들보다 뛰어나다.
원망이 섞인 엄마의 눈길과 자식이기를 부정하는 아빠의 눈길을 받으면서 자란 벤이,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공포와 경멸을 몰랐을까.
벤을 악마로 만들어버린 것은 그런 주위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구제불능인 아이라해도, 부모이기를 포기하고 정체를 알수 없는 단체에 보내버리는
(정확히는 버린 것이다.) 장면에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벤이 불쌍해졌다.
부모의 눈길, 친인척의 태도, 형제들의 공포로 언제나 갈기갈기 찢겨져 자라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벤이 아니었을까.
벤은 태어날때부터 악마가 아니라, 그냥 그런 성격의 아이였는데
사람들은 그 애를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여긴다.
평생 교육되어온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사람의 태도를 바라보며
그것이 죄인 것도 아닌데, 마치 돌연변이를 바라보듯 이상야릇한 시선을 보내며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경멸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화목한 가정안의 다섯째 아이 벤을 바라보며
그런 전체주의와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을 때에는 거의 해리엇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가진 내내 입덧으로 아무것도 먹을수가 없었고,
끝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제대로 몸을 움직일수도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결국 나는 두달 일찍 이틀을 고생한 끝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태어났다.
태어난 후에도 나는 죽도록 말을 안들어먹는 아기였고,
틈만 나면 또래 아이들을 때리고 다녔으며, 마음대로되지 않으면 뭐든 부수었고,
자존심이 무척 강해 엄마한테 혼나고 나서는 일주일을 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아마도 애정결핍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관심이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말썽이라도 부려서 시선을 내게 집중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다섯째 아이 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이 책을 보는 내내, 묘하게도 닮은 벤과 나를 보며,
벤처럼 경멸을 받지 않으며 자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도, 벤처럼 자라났다면 악마인 채로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인데,
마음은 무거워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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