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관계 사립탐정 켄지&제나로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 이 책의 제목이 왜 "신성한 관계"일까 의아했었는데, 책을 거의 다 읽고나니 알게되었다.
이 책의 전 내용을 통틀어 데니스 루헤인이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 시리즈의 바로 전 편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굉장한 생명의 위협과 함께 마음으로 아끼고 있던 사람을 잃은 박탈감에 빠져있던 켄지와 제나로가 오랜 세월 연인이라기엔 부족하고, 친구라기엔 서로의 삶을 연민을 가지고 대하는 그들이 "신성한 관계"- 사랑 그 이상의 무언가를 깨닫고 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으면서, 동시에 정 반대로 신성한 관계로 맺어져 각자에게 지옥을 선사하려는 악질적인 관계로 거듭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악질적인 관계에는 항상 거짓과 위선이 등장한다.

트레버 스톤이라는 어마어마한 갑부가 시한부를 받아놓고 패트릭과 앤지를 납치해온다.
그는 엄청난 돈을 쥐어주며 패트릭과 앤지에게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고 얘기한다.
하루하루 삶을 갉아먹어가는 육식성의 슬픔을 논하면서.
지난번 사건으로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당분간 쉬기로 했던 패트릭과 앤지도 결국 이 어마어마한 돈에 무릎을 꿇고 사라진 딸 데지레 스톤을 찾아나서는데, 어머니와 남자친구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시한부 선고까지 겹치며서 엄청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던 데지레 스톤과 그녀의 주변인물들의 흔적을 일종의 사이비 종교인 슬픔 치유원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데지레 스톤의 흔적이 눈앞에 보일때쯤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패트릭과 앤지는 진짜가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신성한 관계>는 켄지&제나로 전 시리즈 중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는 조금 약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에 따라서 깊게 생각하면서 봐야할 부분도 그닥 없는 편이었지만, 이야기가 다섯개나 되는데 이런 작품 하나 있다고 이 시리즈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부바의 활약이 가장 미미했기 때문에 아쉽긴 했지만...)
권력과 탐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점과 이 시리즈의 강력한 매력중 하나인 재치있는 대화법 또한 주제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안에서 쏠쏠한 재미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다른 작품보다 조금 가벼워 보이는 이유는 이 작품의 결말이 어떤 한 사건을 종결시키는 의미를 지녔다기 보다는, 지긋지긋한 두 인물을 말그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나와버리는" 나름의 코믹함을 가지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 시리즈중 가장 패트릭과 앤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고, 저마다 상처입은 부분을 보듬어 안아 연인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가벼워 보인다고해서, 그것이 결코 깃털처럼 가벼운 것은 아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점철시키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서로를 신성한 관계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또다른 희망일테니까.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것에는 여러가지 조건들이 있을수가 있다.
외모, 성격, 사고방식, 취향, 지식의 유무, 보유재산 등등, 사람을 만나는데 누구나 조금씩은 보는 조건들일수는 있지만,
그 관계가 다른 차원의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특별한 무언가 있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내 인생만큼이나 네 인생도 가엽다 여기고, 상처를 보듬어주려는 노력부터가 어쩌면 사랑이 아닐까.
완전히 타인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 욕심이나 이기심은 사라지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 또는 "신성한 관계"라 부를지도 모른다.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이제 모두 읽게 되었다.
출간 순서대로 읽어서 패트릭과 앤지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서, 언젠가 한번쯤은 이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 읽어보고싶다.
대체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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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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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에 선 두 부자가 여기에 있다.
세계는 망해버렸고, 그나마 생존자라고 있는 사람들은 약탈자가 되어버리거나, 또는 힘없이 당하거나, 또는 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끝없이 어디론가 걸으며 "생존"해 있을 뿐이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다. 그들이 예전에 품었을 지도 모를 희망이나, 욕망이나, 분노나, 철학이나 예술.
당장 한시간 내에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괜찮아. 아빠 여기에 있어.
그냥 그런 말들. 이 무자비하고 황량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그런 말들이었다.
세상은 계속 무너지고 있고, 그들은 살아있다.
무언가를 꿈꾸고 있지는 않다.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세상은 무저갱이 되어가고, 초식동물처럼 이리저리 쫓기면서 그날의 양식을 얻을수 있으면 그 뿐이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편할텐데, 왜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는 것일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니 살아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외향만을 가지고 있을 뿐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살아지기 때문에, 지친 몸을 끌고 정처없이 걷는다.
음식을 얻기위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남쪽으로 가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예정된 마지막을 향한 행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끝에 새로운 시작도 있었다.

종말후의 세상을 얘기하는 영화를 보고, 나는 다시 내게 묻는다.
살아가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건지, 아니면 살아지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건지.
대부분의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은 살아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종종 처참하고 비참해지는 인생. 그 길을 매일매일 걸어가면서 언젠가 나는 바다를 보게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이 영화가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가혹한 세계에 내버려져도 희망이 남아있는 것이 당연한거라면, 그것만큼 소름끼치는 일이 또 있을까. 어디엔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희망때문에, 행복해질지도 불행해 질지도, 아니 그보다 먼저 살아있는 의미를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일일지.....신이 있다면 차라리 희망의 불씨조차 빼앗아가버리는 것이 최소한의 배려이자 미덕이 아닐까.
오히려, 극한의 상황에 놓여진 주인공들을 통해, 살아지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삶의 고달픔과 허망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리고 소설속의 그들의 여정이 무섭도록 고달프지만 서로를 위로하는 말들은 아름답고, 그 마지막은 슬펐던 것처럼,
이 인생이라는 길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사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실망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어야 겠다.
코맥 맥카시의 소설 <더 로드>에서 중요한 건 비주얼도 아니고, 플롯 자체도 아니다.
악몽처럼 처참한 공간에 내버려진 두 부자의 생존하는 방식, 아무것도 아닌 단어가 주는 마음 짠해지는 감동이 이 소설이 주는 미덕이요, 가치인데, 이 "비주얼로 풀이할 수 없는" 매력을 어찌 스크린으로 풀이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기본적으로 종말후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영화로 풀이되면 분명 2012같은 느낌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실망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재밌게 보았던 소설이니,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냈을지 두고보자는 느낌이 강했는데,
막상 영화로 본 <더 로드>는 내 지례짐작보다 훨씬 괜찮고, 훨씬 멋있는 영화였다.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한 감독의 노력이 엿보이고, 실제로 아이의 엄마의 이야기가 꽤 많은 부분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해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소설속의 버석거리며 쓸쓸해지는 단어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비고 모텐슨의 목소리가 소설속의 그런 느낌들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준다.
황량히 무너지는 세상에 내버려진 비고모텐슨의 한없이 지친 목소리로 읊조리는 대사들은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괜시리 슬프고 가슴아프더라...
나 혼자, 몇번이나 눈물을 삼켰던지....
벅찬 감동이라고 할지, 먹먹한 슬픔이라고 할지, 어떤 감정을 남기고 영화가 끝나버렸는데,
원작만큼 재밌는 영화는 거의 본 적 없지만, 소설만큼이나 재밌었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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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2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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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이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시간은 없고, 자꾸 다른 일들이 생기고, 영화를 보러가려고 하면 시간표가 맞지 않고....
그러던 중에 그냥 놓쳐버렸는데, 뒤늦게 <시간 여행자의 아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을 보고 있을 때는, 반짝이던 영화의 트레일러가 생각났는데, 책을 덮을 때는 전혀 다른 감상이 이어졌다.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
우리 사랑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 역시 방해할수 없다는- 다소 낯간지럽지만 로맨틱한 상상을 하면서 이 책을 보았는데, 다 보고 나니 물론 그런 추측도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정작 이 책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소설은 시간을 감내한다는 것, 시간의 무력감, 완벽한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주인공 헨리는 시간 여행자이다.
SF 영화처럼 약물의 오용이나, 현대 과학의 승리 따위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타고난 존재이다.
헨리에게 있어 시간 여행이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그냥 내던져 버리는 그런 종류의 "체질"에 가까운 장애이다.
막연하게 생각해보면 꽤 좋을 것 같지 않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실수들을 바로 잡을수도 있고, 미래로 갈수 있다면 면 로또번호라도 알아내거나, 오르는 주식을 미리 사놓을수도 있고, 미래의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모습도 훔쳐 볼수 있다.
그러나 시간여행에 이렇게 좋은 점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시간 여행을 몇번이고 되풀이 하면서 헨리가 얻게 되는 것은 벌어질 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결국 벌어지고 만다는 운명의 무력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으로 몇번이고 다시 돌아가 살아있는 엄마를 바라보고, 사고도 막으려고 하지만, 이미 그는 그 세계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이고, 벌어질 비극은 필연처럼 피해갈 수 없다.
내일, 아니 당장 1분후에 어디로 사라질지도 모르기 떄문에, 어디론가 뿅!하고 사라져버려 알몸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타인들에게 그 모습은 상당히 이상한 모습으로 보일 뿐더러, 잘 모르는 사람 집에라도 떨어지게 되면 범죄자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
때문에 헨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만나러 온 성인이 된 또다른 자기자신에게 도둑질하는 법, 자기 몸을 지켜내는 법, 열쇄따는 법 등의 잘못된 것을 배울 수 밖에 없다.
한때 좋아했던 밴드의 공연장에 떨어져도, 언제 죽을 지 뻔히 아는 사람의 공연을 보고있는 것이 마냥 신나지도 않게 되고, 미래에 벌어질 일의 원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상처받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아무 시간에나 내던진다는 것이 헨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인생은 부질없고, 노력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을 다치게한 사건은 잊어버릴수도 없게 계속 되돌아 가게 되고....
그 무력감과 허무함때문인지, 헨리는 한때 오염된 인생을 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이 찾아오는 건지, 찾아가는건지, 기이한 인연으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는 여섯살. 그리고 헨리는 서른 중반쯤 되었다.
알몸으로 들판에 내던져진 헨리를 경계하면서도 자꾸 말을 걸어오던 이 소녀는, 미래의 자신의 아내이다.
어린 시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그 소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젊은 시절 만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 여자의 어린 시절로 내던져 지는 것인지, 이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는 알수 없다.
헨리의 말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몸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뒤죽박죽 엉켜버리기 때문에.
나이든 헨리는 자신이 언제 나타날지를 적은 목록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소녀는 그가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준비해두고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현실의 헨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고나서도 헨리가 시간 여행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클레어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캐릭터일까.
내가 보았던 시간여행자의 아내 클레어는 그렇지 않다.
나름 자기 의견과 취향이 확실한 전형적인 요즘 여자같은 이미지인데, 클레어는 현실의 헨리를 만날 때까지 단한번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채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헨리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고, 현실의 헨리가 자꾸 사라져버리는데도 초조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왜 그럴까.

시간이 뒤엉켜버린 헨리를 만난 덕에, 클레어의 시간 역시 뒤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자꾸 과거로 회기해버리는 헨리를 붙잡으려 해봤자 어쩔수 없는 일임을 알고, 또 그 시간 여행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헨리를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교적 초연한 태도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 얼마나 거대한 기다림인지.....
언젠가 찾아올 헨리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기다린다.
그 찰나의 순간을. 또 바보같이 기다리게 된다.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다른 시간을 멤돌게 되는 사람.
그 "의지와는 상관없는"행위의 무력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클레어는 한없이 기다린다.
그래도 그 시간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헨리라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 뿐이니까....
이 변덕스러운 시간과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이 초조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클레어의 그런 현명함과 분명함이 나는 무척 부러웠다.

마냥 핑크빛 로맨스로 점철되어있지 않아서 더 좋았다.
시간이 주는 무력감.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버리는 운명의 속성같은 것은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서늘하게 짠해지는 뭔가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걷고 있을까.
내게 주어진 운명은 무엇일까.
두근두근하면서도 두려운 상상들이 책을 덮고나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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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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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상상을 구현해내는 능력은 좋은데, 마무리는 급하고, 스토리는 설득력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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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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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뮤지컬 영화들 왜 이러나?
그래도 <시카고>까지는 볼만했는데, 롭 마샬, <나인>에서 너무 큰 실망을 안겨준다.
영화는 영화감독이자 여자들이 너무 잘 꼬이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바람둥이가 되어버리는 귀도의 여자탐방기라고 볼수 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아내, 열정적이고 낯뜨거울 정도로 섹시한 내연녀,
평소 흠모하고 있었다며 수작 걸어오는 보그지 기자, 영감의 원천이 되는 자신의 페르소나 여배우,
처음으로 욕망을 깨닫게 해준 동네 누나, 죽었어도 언제나 곁에서 지켜봐주는 엄마.
이 여자들을 둘러싸고, 슬럼프에 빠진 영화감독 귀도 콘티니는 열정과 스트레스와 혼란속에 남겨지게 되는데,
뭐 여찌저찌해서 갑작스럽게 아내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영화를 마무리 된다.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리해보자.

첫째,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슬럼프에 빠져서 여자로 스트레스를 잊고, 또 여자로 스트레스를 얻는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아내가 그렇게 소중했으면 내연녀는 왜 존재하고, 유혹하는 여자에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넘어가는 것은 무엇일지.
그래서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1. 구관이 명관. 현모양처만큼 좋은게 없더라-인지, 2. 여러여자 거느리고 살기는 참 힘들어-인지,
3. 작품에 대한 욕심과 대감독으로써의 정체성에 혼란을 얻는다-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어진다.
엄청나게 정신없이 산만한, 그리고 곁가지가 많은 영화였다.
사실 내용만 따지고 들어간다면, 아내와 내연녀 이외의 여자들은 다 필요없는 배역인데,
대스타급 여배우들이 한장면씩 등장해서 자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과시하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너무 많은 나머지
필요없는 곁가지가 지나치게 많이 끼어들어버렸다.
그리고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조차 구태의연하고 지루하다.

둘째, 그래. 귀도 콘티니의 매력이 뭔데?
여자들이 귀도귀도귀도하며 울부짖고 유혹하지 못해 안달인 이 감독의 매력을 도무지 찾을수가 없다.
저마다 포스가 너무 강한 여자들 덕택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찌그러져버린 남자주인공.
자기가 저지른 짓에 변명하기 급급한 우유부단 한 남자주인공.
고뇌에 찬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에 퀭해진 이 남자 주인공의 매력이 대체 무엇인지 왜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는 것일까.
서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설득력 또한 떨어진다.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에 정극처럼 줄줄히 스토리와 캐릭터를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서도,
다 보고 났는데도, 이 남자의 무엇에 여자들이 빠져드는지 알수가 없다.
어쩌면 이 영화의 존재이유는 단지 "여배우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셋째, 인상적인 음악이 없다.
뮤지컬 영화인 이상, 어느 정도 귀에 꽂히는 음악이 있을 법도 한데,
전체적으로 노래가 별로다.
노래라기보다는 억지로 음을지어 대사를 읽는듯한 느낌은 나만 받은 것일까.
지나치게 화려하기만 한 효과들 역시 별로.
<시카고>에서는 조명의 매력을 충분히 살렸던 것 같은데, 세트 역시 화려하기만 할뿐, 그저그렇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퍼기의 탬버린 춤만 남더라.
모두 악을 쓰고 노래를 하는 와중에도, 잠만 솔솔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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