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 Old Par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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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40년간 아버지의 지휘 아래 일하면서, 가끔은 욕설을 듣고, 가끔은 매질도 당하고, 아파죽겠는 날에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을 시킨다. 아들이 병이 들자 아버지는 힘좋은 새 일꾼을 집에 들이고, 아들의 방을 빼서 일꾼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아들은 찬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밖에서 잘수밖에 없다. 밥은 준다. 정성껏 아버지가 차려서 밥은 준다.
만약 내가 이 죽어가는 아들이라면, 죽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에게 의지할수 밖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을까.
이제 곧 소멸해 버릴 내 존재와 함께 소멸해갈 아버지와의 기억에 대한 회한으로 죽는 순간까지 마음이 아팠을까.
인간과 소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짓이지만, 한번 영화에 등장하는 소가 인간이었다면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무자비한 생각이 들더라. 아, 그렇다면 아들은 재산이었구나.하고...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소의 정을 왜곡시킬 생각은 없다.
40년간 매일같이 일을 나가고, 집으로 돌아왔던 동행자들에게 전혀 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말도 안되리라.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웠던 것은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대한 아련한 향수때문도 아니었고, 일평생 일하며 죽어가는 두 존재들에 대한 연민때문도 아니었고, "그저 지켜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로써 이 영화를 볼것이냐, 아니면 내가 느끼는 감정대로 이 영화를 볼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다큐멘터리 영화로써는 충분히 훌륭했지만, 감정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도 괴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예전에 어떤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메마른 사막에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아이가 숨을 고르며 앉아있고, 그 뒤에서 까마귀는 아이가 죽기만을 바라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진. 사진작가는 유명한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세상의 비난 또한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예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물한방울 주지 않고 그 순간만을 포착하기를 기다린 사진작가가 인간적으로는 잔인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어떤 쪽인가 싶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한 사진작가의 예술로 평가해야 했을지, 아니면 타인의 불행을 포착한 인간의 잔인성으로 평가해야했을지,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쪽의 이야기도 틀린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바라보는데 그 얘기가 내내 떠올랐다.
인간과 소의 40년 우정도 틀린 말이 아니고, 죽을 날을 받아놓고도 일하다가 죽어간 소에 대한 연민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아직도 어느 관점을 택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관점이 덜 괴로운지는 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극장을 나오면서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해져서 나왔다.
동물이 나오는 영화는 이래서 괴롭다. 꼭 제대로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이면의 다른 걸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삐뚤어진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댓가없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런 아버지를 가졌더라면, 또는 이런 남편을 가졌더라면, 나라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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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 Doub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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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상박이라는 말은 이런 영화를 보고 등장한 말일런지도 모른다. 그저 연기력 하나로 좌중을 후덜덜상태로 몰아가는 메릴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연기대결만으로도 충분히 별 다섯개 만점짜리 영화 <다우트>.
제목대로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에서 끝을 맺는 영화이다.

고지식하고 규율을 최고로 여기는 깐깐한 원장 수녀, 그리고 교사에의 열망만으로 가득찬 뭣도 모르는 순진한 수녀.
의심의 시작은 이 젊은 수녀에서부터 시작된다. 학교의 유일한 흑인학생이 어느날 신부실로 불려간다.
자유분방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플린 신부에게 불려간 흑인학생은 어두운 얼굴로 다시 교실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서 풍기는 술냄새, 어느 날 플린 신부가 그 아이의 캐비넷에 속옷을 몰래 넣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젊은 수녀는 의심하기 시작하고 원장수녀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신부와 학교의 단 하나뿐인 흑인 학생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두 수녀는 플린신부와 대면해서 이 일에 대해 따지지만, 학생의 비밀을 지켜준다며 신부가 대답을 어물쩡 피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사실을 고했는데도 의심은 풀리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진실보다도 인간이 의심을 품는 과정의 잔혹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이 파고들어오고 추문이 시작되기 시작하면 더이상 무슨 말을 하든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영화속에 원장수녀의 의심에 시달리다못한 신부가 그녀의 행동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배게 깃털이론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찢어진 배게에서 떨어져나와 사방으로 흩어진 깃털을 다시 주워담는 것, 잘못된 추문이라는 것을 다시 되돌리기는 그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의심과 의혹, 추문에 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세치 혀만으로도 사람을 죽일수 있는 잔혹한 존재이다.
믿음이 무엇이었는가, 정의나 사랑이 무엇이었는가, 도덕이 무엇이었는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쉽게도 그런 것보다도 의심이었다. 확실한 증거없는 의심.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또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 원장수녀가 흘리던 눈물에서 어렴풋이나마 알수 있을 따름이다.

의심이 번지고 추문이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의 잔혹함에 대한 멋진 영화이다.
원래는 연극이라고 하던데, 그만큼 영화속에 등장하는 장소나 인물이 무척 제한적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영화적 장치없이 솔직담백하기 담아내는데도 스릴이 절절 넘치는 것은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호연때문이다.
그저 소리한번 질렀을 뿐인데 후덜덜하게 만드는 메릴 스트립의 독한 연기, 진실이 뭔지는 알수없지만, 그저 믿고 싶도록 만드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진실된 눈빛, 나약한 어머니이자 아들이 무사하게 성장할수 있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덮어두고자 하는 비올라 데이비스의 절절한 눈물, 에이미 아담스의 나약한 순수함. 모든 배우의 연기와 아우라가 멋지게 빛났다.
흥행할 것 같은 영화는 아니지만, 꼭 한번씩은 보고 의심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의심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깊은 영화이다. 아주 쩐다, 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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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9-06-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어떤 영화일지 궁금합니다.^^

Apple 2009-06-02 19:10   좋아요 0 | URL
정말 재밌습니다.흐흐...^^
 
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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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틀이 뜨면서, A True Story라는 말이 뜬다. 보통 다른 영화에서는 Based On True Story라고 쓰는데, 왜 이영화에서는 유독 A True Story라는 말만 썼을까.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게 아니라 실화이기 때문이다.
줏어듣기로는 이 이야기는 기자였던 각본가가 시청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폐기되려는 자료를 얻게 되었고, 그 자료에서 얻어낸 이야기로, 각본을 다 쓰는데 걸린 시간이 한달반 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시나리오를 뚝딱 집필해 낼수 있는 것은 그가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류에 적힌 사실 그대로를 옮겨적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실화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의 차이. 그래서 이 기가 막히는 얘기는 영화적 장치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이처럼 솔직하게 진실만을 털어놓는 <체인질링>은 처음부터 끝까지 꼼수부리지 않고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적인 긴박감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다행히도 지루하지 않게 2시간이 넘는 런닝타임을 그대로 감상할수 있는 영화이다.

5개월동안 사라졌던 아이가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그 아이는 이 엄마의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를 진짜 아이라고 하면서, 자식도 못알아보는 미친 어머니 취급을 해버린다. 그 시간 진짜 아이가 저 멀리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어머니도, 사람들도, 살인자도 알지 못했다.
나는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영화 외적인 것들이라던가 간단한 시놉시스 말고는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고 가는 편이라, (그래서 보기도 전에 다 알려주며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취해야할 입장을 정해주는 듯한 영화 프로그램이나 잡지가 싫다.) 아이가 뒤바뀌었고, 엄마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정도의 이야기 밖에 알지 못하고 간 상태에서 중반부쯤에 소아연쇄살인이 등장하자 무척 놀랐다. (이런 얘기일줄은...)
이런 기가 막힌 기만과 기가 막힌 우연이 세상에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적어도, 의지가 강한 개인이 나라를 바꿀수 있었던 판례라도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마지막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는 자신안에 "희망"이 있다고 하는데, 불합리함을 바꿀수 있다는 꿈 자체가 우리 실정에서는 "희망"이 아니라 어느 날 잠깐 기분좋게 꾸었던 돼지꿈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부르짖을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 고깝지만 부럽다.

그동안의 이미지를 벗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 안젤리나 졸리는 약간 어색하지만, 연기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간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지, "어머니" 역활 보다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있을 때가 제일 어울리더라;;;;(게다가 영화내내 욕같은 거 못하는 요조숙녀처럼 베베 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욕을 내뱉는 씬에서는 욕이 어쩌면 그렇게 입에 착착 붙으시는지.......)
이미 거장이라고 부를수 있는 감독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써의 역량이 "거장"급인지 나는 긴가민가 한 편이라서, 이 영화에 걸작이나 거장의 손길같은 거창한 문구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물흐르는 듯한 진행과 꼼꼼함, 감정적 오버가 없는 점때문에 그럭저럭 재밌게 볼수 있긴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간의 영화를 놓고 볼때는 평작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실화에 많이 기대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

요즘은 왠일인지, 연쇄살인같은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무척 찝찝하다. (게다가 <체인질링>에 등장하는 연쇄살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분나쁜 소아연쇄살인이다.) 그간 책이나 영화나, 연쇄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도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살인자체의 잔인함 보다도, 살인범의 공허한 암흑을 보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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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 The Chas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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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추격자>를 보게되었다. 작년 우리나라 영화중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한 영화라고 했는데, 사실 개봉했을 당시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지금보니 개봉일이 작년 2월인데, (여름에 개봉했는줄 알았는데...) 바쁘기도 했었던 것같고, 흥행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흥행하는 영화들이 나와 궁합이 그다지 맞지 않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센스없는 포스터도 한몫한다.)
2008년을 보내면서 자주듣던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자기들끼리 2008 영화결산을 하던데, 남들이 좋다는 영화중에 안본 영화가 몇 있더라.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관심두지 않고 있던 영화중에 재밌는 영화도 있을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개를 찍어놓고 시간날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가 <추격자>였다.

미술관도 다녀오고, 화방가려고 남대문도 다녀오고, 잠도 별로 못자고 외출했고, 여러모로 피곤했기 때문에 함께 있던 친구와 DVD방을 들어갔다. 2시간이나마 편하게 누워서 슬슬 아픈 다리도 좀 쉬고 하려고.
별로 볼 영화가 없길래 <추격자>생각이 나서 아무 생각 없이 골랐다. 별 기대는 없었다. 그냥 그럭저럭 보려니 싶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 후 10분후에 우리는 편하게 쉬기는 커녕 손에 땀을 쥐면서 영화에 몰입해버렸다.
이렇게 재밌는 영화를 왜 극장에서 보지 않았을까? 그래도 꺼진 불도 다시 봐서 다행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대놓고 살인자와 추격자를 뚜렷히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출장 안마소를 운영하는 김윤석과 선량하고 평범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몇번이고 살인을 저질렀던 하정우.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자들이 몇번 없어지자, 장부를 들여다보던 김윤석이 똑같은 번호로 호출되어 간 여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되고, 감기몸살로 누워있다가 자신이 닦달해서 불려나간 여자를 호출한 번호도 그 번호라는 사실을 깨닫고, 추적이 시작된다. 살인과 관련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여자들을 빼돌려 다른 곳에 팔아버렸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불려나가서 살인범에게 죽을 고비를 겪고 있었고, 나름대로 추적하던 김윤석은 우연히 범인 하정우와 마주치고, 그놈이 문제의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영화가 끝날때까지 쫓게된다.

인간이 법을 만든 것은 그나마 공평하기 위해서이다. 유력해보이는 용의자에게도 인권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일단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여나 용의자가 진범이 아닐 가능성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헛점이 있을수 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여러 영화와 스릴러 소설에서 경찰이 무능하게 그려지는 것은 그 헛점 때문이다. 관객은, 혹은 독자는 누가 범인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그러나 경찰 역시 위아래가 있는 "직장"인 이상 결국은 "결제"가 필요한 것이다.
완고한 법앞에서, 윗사람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뛰어들어서는 안되는 그 점때문에 본의와는 상관없이 경찰이 무능하게 그려질수 밖에.
영화나 소설에서 경찰이 무능하게 그려지는 것처럼 실상 그 헛점이 발목을 잡고 경찰을 무기력하게 만들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색다른 처단자를 원하게 된다.
법따위 뛰어넘어서 못된 노무시끼를 신나게 두들겨 패주고 응징할 심판자가 필요해진 것이다.
현실에서는 있을수 없으니 꿈이라도 꾸는 것이지.
느리고 더뎌서 범인을 눈앞에서도 놓치는 법의 심판에 지친 사람들은 급기야 픽션에서나마 안티히어로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경찰이 아니므로 자가응징을 할수 있다. 내가 쫓고 내가 심판해버리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면서, 욕을 입에 달고사는 비열한 남자 김윤석의 역활이 그런 안티히어로이다.
우리는 가끔은 그런 응징자를 필요로 한다. 알면서도 놓치는 일 없이 그자리에서 처단했으면 좋겠는 이 사회의 악에 대항하는.
영화속에서 김윤석이 경찰서에 붙들려있는 하정우를 두들겨패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경찰들이 조용히 묵인하는 것은 그런 대리만족의 쾌감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내가 범인을 쫓는 것 같은 스릴을 느끼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에
별 다른 잔혹한 장면이나 깜놀 장면없이도 이 영화는 대단히 잔혹하게 느껴졌다.
불편하게 시리 이놈의 범인은 자기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살해방법을 대놓고 말한다.
경찰은 알면서도 이놈에게 사근사근하게 굴면서 그저 대답이나 잘해줄 것만을 바랄수 밖에 없다.
끔찍한 살해현장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뒹굴던 여자는 시체 두구를 앞에 두고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있고,
좁고 쓸쓸한 집에서 딸아이는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린다.
그리고 쫓는 자는, 자신이 사지로 내몬 여자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고, 난폭하게 굴면서도 그 아이가 신경쓰여서 어쩔줄을 모르고, 결국은 자신이 조금 더 예민했다면 구할수 있었을 여자의 잘려진 머리를 보고 말아버린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심난하고 불편하다.
이 영화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 불편함이었던 것 같다.
헐리우드 스릴러처럼 범인이 사라져서 막판에 2편을 예고하듯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오거나, 범인을 묵사발내서 죽이고 정열의 키스신 따위 날리지 않는다.
범인은 죽었다. 그리고 어쩌면 살릴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도 죽었다.
아이는 남겨졌고, 쫓는 자는 사건이 다 끝나고나서도 찝찝한 허무함에 내동댕이 쳐진다.
아...영화가 끝날때는 정말이지 이 짜증나는 불편함과 허무함에 울고싶은 기분이었달까.

줏어듣던대로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좋았고, 사이코킬러 하정우의 연기도 그렇지만, 김윤석아저씨 연기는 손발이 오그라들지경이다. 이 영화는 거의 하루정도에 일어난 일을 모두 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윤석이 실제 추격자인듯 점점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장면이 보여지는 것 같다.
이제라도 보기를 잘했지만, 극장에서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둘이 이런 영화가 제발 실화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집에와서 찾아보니 실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쇄살인범 김영철을 모티브로 한 영화더라.

영화속의 범인 하정우가 왜 살인을 하게되었는지는 확실히 등장하지 않는다.
추측은 해볼수 있도록 영화에서 여러가지 장치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 역시 확실한 살해동기라고 말하기는 뭣하다.
애초에 범인이 한번 잡혔다가 풀려난 것은 증거불충분때문이었고, 두번째 잡혔다가 또 풀려나는 것도 증거불충분때문이었다.
심증은 가고, 범인도 자신이 범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증거도 없을 뿐더러 살해동기도 이해할수 없다.
그 이해되지 않는 살해동기가 범인검거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도 데려다가 심문해봤는데, 별 소용없다. 마지막에 범인이 살던 집에 범인이 그려놓은 커다란 십자가와 그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 교회에서 만난 장로의 집에 처들어가서 가족들을 죽이고 그 집을 차지했다는 점까지는 나와서 삐뚤어진 종교관에서 비롯된 창녀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나 닥치는대로 죽여버리고 되는대로 시체를 유기해 버린다.
뒷맛이 찝찝한 채로 집에와서 검색하다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것을 알게되자 어느 정도 이해가더라. 양심없는 차가운 마음, 무계획에 돌발적인 범죄. 딱 사이코패스의 짓이로구나.
어쩌면 영화속 범인에게는 처음부터 동기자체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되는 대로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는 창녀니까 이렇게 죽어도 돼. 너는 나를 귀찮게 했으니 죽어도 돼.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살해동기이다.
아...ㅅㅂ.....현실은 더더욱 심난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제발 이런 얘기는 영화에서나 보고싶거늘.
여러모로 닮긴 했지만, 뒷맛이 꼭 <살인의 추억>을 봤을 때랑 거의 비슷하다.
갑갑하고,  안타깝고, 짜증나게 불편하고, 그리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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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카인드 리와인드 - Be Kind Rewi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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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을 기다려서 보게된 <비카인드 리와인드>.
미쉘공드리가 <이터널 선샤인>을 찍고나서, 공드리에게 카우프만이 없다면 어떤 영화가 나올까 싶었는데, 비록 독특한 카우프만의 아이디어가 없어도 공드리의 영화는 사랑스럽다. 아마도 영화를 제일 귀엽게 만들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도 당연히 귀여웠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20분짜리 패러디 비디오. 제작기간이 반나절도 안되니까 그 허접함이란 이루 말할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자꾸 꼬인다. 그 기분을 왠지 알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애정이 떠올랐다.
아직도 좋아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세상은 너무 빠르고 모두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다. 붙잡고 싶지만, 그 애정은 무형의 것이니 붙잡을수 없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비디오>라는 것은 그런 애정담긴 옛물건 중 하나이고, 공드리가 이 패러디 비디오 소동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애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속의 마을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영화를 찍어내듯이, 마음속으로 그 애정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저작권 관련해서, 시고니 위버아줌마가 뜬금없이 등장해서 패러디 비디오를 니네 맘대로 찍었으니 350억달러를 물거나, 6천년 징역을 살라는 얘기를 했을 때는, 이제 세상이 너무나 차가워진 것 같아서 괜히 슬퍼지더라.
공드리의 환상에서 보여준 것이 저작권따위 신경쓰지 않았으나 은근히 끌리는 허접떼기 비디오였다면, 저작권협회에서 출동한 것이 보여준 것은 어찌됐거나 그것이 법인 차가운 현실뿐이었으니. 재밌는 꿈이 와장창 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당연한 얘기면서도 잔혹하게 느껴져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조금 슬펐다.
투박하고 어설프지만, 왠지 나도 그 영화가 좋았다. 당연한 논리에  걷어 차여버려도, 따뜻하고 좋았다.
사라지면 싫을 것들이 많은데, 아무리 붙들어도 사라져버리는 것은 어쩔수 없다.
그래서 영화가 거의 끝나가면서 묘한 감동과 아련한 슬픔이 느껴졌다.

<이터널 선샤인>과 <수면의 과학>, <비카인드 리와인드>까지- 세가지 영화는 여러모로 다르게 느껴지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상당히 닮아있다. 빈티지와 키치에로의 미쉘공드리의 애정이 그것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세 영화다 "잘라서 갖다 붙이는" 퀼트의 미학이 느껴진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각난 기억을 이어붙였다면, <수면의 과학>에서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한땀한땀 꿰맨듯한 이미지들을 전면적으로 차용했고, <비카인드 리와인드>에서는 주요 장면들만 잘라 이어붙인 패러디 영화가 또 그렇다.
그래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 줄기가 있다기보다는, 그 조각 조각들을 이어붙여 하나의 커다란 이불을 만드는 셈이다.
완전한 스토리 전개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 삐뚤삐뚤한 바느질이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조각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도 없는 것이다.
대량생산되는 공산품이 아닌, 어설픈 솜씨로 하나씩 이어붙인 수제품에 가까운 영화-
미쉘 공드리의 영화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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