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흑백영화 한편 본것같다. 아주 분위기 있고, 매력적인데다가 아스라한 애수도 함께 있는.
빌 벨린저의 <이와 손톱>을 읽을 땐,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떠올렸었는데, 두번째로 접하는 빌 벨린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을 읽을 땐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를 떠올렸다. 윌리엄 아이리쉬, 아이라 레빈, 빌 벨린저 세 작가는 내게 아스라한 안개속의 로맨스같은 흑백의 애수를 느끼게 하는 작가들이다.
그들의 소설속의 배경들이 꼭 내가 어린 시절 보아왔던 흑백영화속의 배경들과 일치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사랑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르리라.
아무튼 두번째로 읽는 빌 벨린저의 소설은 <이와 손톱>만큼이나 대만족했던 소설이다.
 
크래시라는 이름의 소녀는 어딘가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가난하고 남루하고 촌스러운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아둥바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초라한 자기자신에게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여자의 신분상승욕구를 현실화 시켜줄수 있는 것은 미인계뿐이었다.
다행히 크래시는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짜같을 정도로. 그리고 다행히도 그녀는 영리했다. 간단히 말해 몸을 팔아 자신의 야망을 채우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세상에 널린 나쁜 여자들처럼 천박한 방법은 쓰지 않으며, 어렵게 모은 재산을 허세로 쉽게 탕진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신문사 편집장을 유혹하고, 광고회사 부사장을 유혹하고, 결국에는 거대은행 오너까지 유혹한다. 처음부터 거대했던 야망, 그녀에게는 사랑보다 놓칠수 없었던 지배욕-
차근 차근 계단을 올라가듯이 그녀는 남자를 밟고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대니 에이프릴이 크래시를 쫓는다.
물려받은 약간의 재산으로 수금대행 회사를 사들인 대니는 장부를 정리하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다. 10년전 딱 한번 보았던 얼굴인데 잊혀지지 않는 얼굴-그저 한번 스쳤는데도 사랑에 빠져버렸던 그 얼굴이 거기 있었다. 대니는 그녀를 쫓는다. 그녀를 만나서 무엇을 해야할지는 자신도 모른다.다만, 그녀의 일생을 쫓으며 대니는 순수한 가면을 쓴 악녀 크래시에게 더더욱 빠져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팜므파탈 크래시가 야망과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행동은 그야말로 흔해빠졌다.
흔해빠진 거미줄인데도, 남자들은 어김없이 거기에 말려든다. 크래시는 미녀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미와 순수한 순종 앞에서는 어떤 똑똑한 남자도 바보가 되는가보다.
이런 수법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는데도 남자들은 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팜므파탈 크래시는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시궁창같은 어린 시절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평생 써도 남아돌 재산을 가진 부유하고 아름다운 미망인이 되어서, 그녀는 모든 것에 만족했을까. 딱 한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애매모호한 연인을 떠올리며 조금은 후회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녀에게 가정적인 안정감을 주었던 첫번째 남편을 떠올리며 조금은 후회하지 않았을까.
 
소설을 보며 크래시에게 필요했던 것은 여타 다른 여자들이 원하듯 평생을 함께 늙어갈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대체물로써의 안정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환상같은 거라고는 눈꼽만큼도 품지 않는 냉정한 그녀에게 그 안정감은 현실적인 부의 축척이었을 것이다.
정작 필요한 건 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적인 안정감, 평생 불안하지 않을수 있는 안정감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만족스러워보이지 않는다.
그 혐오스러운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그녀는 반평생을 가짜로 살아왔다.
크래시에서 캐서린, 캔디스-이름을 바꿀 때마다 그 이름으로 살았던 시절을 완벽히 덮어버리고 새로운 먹이를 찾는다.
주인공 대니 역시 크래시에게 다가설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고 새로운 가짜가 되어 다가선다. 가짜와 가짜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고, 그 가짜 사랑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지만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서로 가면을 쓴 채 잠깐 만나 춤을 추다가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이 작품에서 사랑이라고 말할 것은 그것밖에 없지만, 어딘지 로맨틱한 애수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소설이었고, 책장을 거듭할 때마다 나 역시 이 우아한 악녀 크래시의 매력에 허우적댔었다.

 
<이와 손톱>이 그랬듯이, 역시 후회없는 선택이라고 말할수 있는 소설이었고, 앞으로도 출간될 빌 벨린저의 소설들은 계속 읽게 될 것 같다. 요즘 소설에서는 느끼기 힘든, 쓸쓸하고 우아한 뭔가가 분명 있다.
또다른 윌리엄 아이리쉬-코넬 울리치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며 희뿌연 안개같은 흑백영화를 보듯이.
어떤 내용이든 이런 분위기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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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09-24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시대의 미국 추리소설들이 좀 더 소개되었으면 좋겠어요. 빌 벨린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은 이 전에 읽었던 빌 벨린저보다는 별로였지만(덜 코넬울리치스러웠지만), 재미있었죠? ^^

Apple 2008-09-24 17:31   좋아요 0 | URL
흐흐..그럼요...아 분위기 너무 좋아요~히히^^

쥬베이 2008-09-2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회없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라니 기대되는데요^^
줄거리를 보니까 재미있을거 같아요

Apple 2008-09-25 00:09   좋아요 0 | URL
네네~재밌어요..^^쥬베이님도 기회 닿으면 보시어요~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