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속의 치요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박상희 그림 / 예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똑같은 얘기도 더 재밌게 할줄 아는 친구들은 따로 있는 법이다.
여러모로 상당히 의외책이었던 <벽장속의 치요>는 딱 그런 친구가 들려주는 이야기같은 책이라서,예상 외로 푹 빠져들어서 얘기가 빨리 사라지지 않게 야금 야금 아껴읽었던 책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듯 싶지만,) 벽장속의 유령 치요와의 동거를 시작으로 소소한 사건을 단편식으로 연결해놓은 책인줄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벽장속의 치요>는 수록 단편들중 한편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결론.
아, 이점은 분명 허무하다. 책편집을 다른 방식으로 했더라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수록된 내용에 비해, 캐릭터상품같은 일러스트가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내가 이 책에 기대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저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러모로 의외의 책이었다.
 
공포소설의 형식을 띄고 아홉개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말 요즘 많이 쓰는것같지만) 한편 한편이 잔혹동화같다.
모두 섬뜩함이라던가, 어두운 부분의 이야기를 기초로 삼고 있지만,
어떤 것은 웃기고, 어떤 것은 슬프고, 어떤 것은 피가 끓을 정도로 화가 난다.
표정변화가 아주 많은 친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같은 재밌고도 귀여운 책이 바로 이 책.
 
한 백수남자가 묘하게 집값이 싼 집에 이사를 갔는데, 집에서 유령이 나온다.
잠이 들만하면 벽장속에서 스윽 걸어나와 탁자에 올려놓은 육포를 몰래 먹으면서 뭔가 중얼거리는 꼬마유령 치요가 등장하는 표제작 <벽장속의 치요>.
할머니 같은 말투로 말하고, 찹쌀떡처럼 생겼으며, 저리 꺼지라고 소리지르면 소심하게도 물러난다.
너무나 귀여운 단편이라, 둘의 이야기가 더 나오길 바랬는데, 아쉽게도 이게 끝이다.
이 얘기로 더 긴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좋지 않았을까.
육포와 칼피스를 우물대며 관상을보는 치요가 더 보고싶다.
<샤바케>의 야나리들보다도 더 귀여운 유령이었다.


<call>은 이 단편집에 몇개 포함된 서술형 트릭 단편이다.
대학동기에 수상한 미스테리 동아리에서 만난 세남녀의 엇갈리는 사랑을 통해 묘한 아련함과 애잔함을 전해주는 단편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평범한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간에 서술도, 인물들의 대화도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단편이다.
중국 산속에 몰래 숨어사는 러시아 모녀들의 이야기 <어머니의 러시아 스프>는
그야말로 잔혹동화스러운 작품이었다. 책소개문구에 써있듯이 "마지막 한줄로 그간의 내용이 바뀌어버리는" 충격은 사실 없지만, (이 정도라면 읽다보면 예측가능한 트릭이다.)
이렇게 비밀스럽고 스산한 이야기를 좋아해서인지 무척 재밌게 읽었다.
 
<예기치 못한 방문자>에서는 코믹한 부분마저 보여준다.
불륜녀의 변심으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남자. 여자친구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청소업체 직원.
예기치 못한 방문자에 땀을 비오듯 흘리는 중년남자와
사람좋게 웃으면서 행사기간이니 청소서비스를 받으라는 멍청한 청소업체 직원과의 시체은닉 대결이 한판 벌어진다.
이 단편집 중에서는 가장 박진감넘치는 전개를 보여주는 단편이다.
<살인레시피> 역시, <예기치 못한 방문자>와 함께 가장 코믹한 작품으로,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부부가 등장한다.
남편은 불륜녀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이 괴씸해서 보험금을 노리고
산나물 가득한 밥상을 앞에두고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무척 박진감 넘치고, 마지막 대사들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마저 나는 즐거운 단편이다.

<냉혹한 간병인>에 등장하는 치매노인을 수발하는 며느리는 또 어떤가.
이 단편을 읽다보면 누구나, 피가 끓는 경험을 하게될 것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시부모를 공양하는 효부, 그러나 실상으로는 노인이 죽어서 유산을 받기만을 기다리며 꼼짝도 못하는 노인에게 가혹한 짓을 저지른다. 아들쪽도 별 다를 거 없다.
가장 불쾌한 작품이면서도, 가장 통쾌한 작품이다.
<늙은 고양이>는 돌아가신 숙부님이 물려준 집에 이사가게된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숙부님의 고양이로 추정되는 고양이가 가정의 평화를 갉아먹어가는 이야기.
추함과 역함의 묘사가 무척 사실적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단편. 그러나 다소 평면적이라 아쉽다.
 
<어두운 나무 그늘> 역시 조금은 평면적인 이야기라, 이 단편집에서 가장 처진다고 생각되었던 단편이다. (하지만 이런 거 하나 정도는 끼어있어도 상관없잖아.)
어린시절 잃어버린 동생의 행방과 동생을 잃어버린 장소로 되돌아가게 된 언니.
수십년이 지나 알게되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 전체적으로 평면적이라고는 하나, 마지막 장면은 꽤 섬뜩하다.
마지막 작품 <신이치의 자전거>를 보면 이 단편집의 색체가 단지 귀여운 유령이야기  <벽장속의 치요>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을 알게될 것이다.
마음속에 깊이 남는 상실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애잔한 이야기로,
대단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너무나 마음에 드는 단편이었다.

이렇게 아홉가지의 이야기로 묶인 단편집 <벽장속의 치요>.
서술형 트릭에서부터 씁쓸한 블랙코미디, 잔혹동화와 정통 공포물을 넘나드는 다양한 스타일로,
단편 읽는 것이 버겨운 사람들 역시도 무척 즐길수 있는 단편집이 되겠다.
최근에는 단편 형식으로 묶인 책들을 꽤 많이 읽었지만, 이 작품 만큼 재밌는 작품은
오츠이치의 <Zoo> 이후로 처음이다.
아주 독특한 상상력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아주 재밌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 작가같다.
간혹 일본 소설에서 느껴지는 언어적인 갭도 느껴지지 않고, 시원시원한 몰입감도 훌륭하다.
표지에 낚이지 말고, 제목에 낚이지 말고, 속내용을 바라보자.
"재밌게 얘기하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말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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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9-21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 근데 전 치요가 더 등장했으면 싶더라구요^^

Apple 2007-09-21 23:09   좋아요 0 | URL
네..치요가 더 보고싶어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좋았어요.^^
의외라서 더 마음에 들었달까...

쥬베이 2007-09-21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이 이렇게 칭찬하니...읽고 싶은데요ㅋㅋ

Apple 2007-09-21 23:09   좋아요 0 | URL
쥬베이님도 즐겁게 보실수 있을것같아요.^^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