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목요일은 긴가민가 일어나기 힘든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었다.
사무실에 일이 소강상태에 잠깐 빠지는 바람에 다들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 거기다가 소장마마까지 출근을 안하셨다. 다들 딩가딩가 웹서핑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하며 갑작스럽게 찾아온 평화(그래봤자 폭풍전야의 고요함)를 어찌할 줄 모르면서 서투르게 보내고 있던 차에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호기를 부리자며 사무실 부근이 아닌 조금 멀리 떨어진 김치찌게집 투어에 나섰고 만족할만한 점심시간을 보낸 후 오후시간이 받아들였다. 허나 여전히 소강상태의 연장선상의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내 뿐 이였다. 그러자 실장마마의 급제의가 들어온다.
"모델하우스 가보자."
그리하여 비교적 사무실에서 가장 가깝게 위치한 "H"건설사가 지어놓은 용인쪽 모델하우스를 찾아내어 무작정 그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비가 오는 날씨에 차들은 길거리에 넘쳐났고 여차저차 막히는 차를 뚫고 무사히 도착했더니만 주차장 입구에서 하얀셔츠에 검은 정장바지를 입은 젊은 총각이 잠깐 제지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라는 정중한 질문에 핸들은 잡은 나는 '모델하우스 왔는데요'라는 대꾸로 무사통과하였고 생각보다 규모가 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모델하우스에 입장하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놀란 것은 그 옛날 높아봤자 2층 규모의 모델하우스가 아닌 꽤나 층고가 높은(일반건물로 하면 5층정도) 3층의 큰 규모의 위용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을 해야 한다는 그 광대함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에 도착하니 진행요원이 주머니를 주며 신발을 이곳에 넣고 실내화로 갈아신고 입장하시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말대로 신발을 갈아신고 입구에 도착하니 연기력은 항개도 안늘면서 줄창 선전만 찍어대는 K모여배우의 등신대비 입간판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코에 있는 점도 선명한 걸 보니 꽤나 좋은 출력기계로 뽑은 듯 하다.
진입부에서 스킵플로어식(아싸 전문용어!)식으로 구성된 모델하우스는 제법 의리의리 하다 한참 분양이 거의 마감단계에 온 H사의 아파트는 꽤나 히트를 쳤는지 여기저기 신문기사를 크게 확대한 인쇄물들이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초입부에는 대지현황 축소모형과 단지 축소모형이 번쩍뻔쩍 빛을 내고 있었다.
짦은 치마, 화사한 미소, 화려한 언변을 교육받은 미녀군단은 모델하우스 곳곳을 지키며 이곳을 찾은 고객을 영접하였으나 사실 우린 초대받은 손님이 아닌 입장이였다. 실수요자가 아닌 단지 직업적인 이유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 뿐이니까. 이러한 사실은 단지모형을 보며 대번에 들통이 나버린다. 생글생글 웃으며 '몇동 몇호가 당첨되셨습니까?'라는 화사한 질문에 '그냥 보러 왔는데요' 라는 답변을 해줘버리니 미소는 여전하지만 슬쩍 시야권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모형을 보니 고급스런 외관 디자인과 함께 실면적도 꽤나 크게 잡아먹은 평면들이 눈에 띈다. 190제곱미터라는 한층을 통으로 다 써버리는 펜트하우스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모형을 본 후 각 면적별로 자리잡은 모델하우스 내부는 어찌나 기가막히게 꾸며놨는지....객지생활 하는 여직원 둘은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돈 모아 이런 아파트 하나 빨리 사야겠다는 다소 유토피아적인 발언을 흥얼거렸다. 허나 모델하우스 내부를 하나하나 살펴보니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좀 있어 보이며 멋져 보이는 구성품들에는 어김없이 "옵션" 딱지가 붙어있는 것. 그리고 예전 아파트 평면과는 다르게 발코니와 실사이의 경계를 하얀 점선으로 표시하며 확장/비확장의 구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발코니 확장이 이젠 합법이다. 단 충분한 대피공간 마련과 함께 법적으로 1.5미터 이상 넘어가면 전용면적으로 산정된다.)
물론 옵션이라고 써붙인 딱지와 발코니 확장은 기본 분양가에 절대 포함되어있지 않았고 실사용자들이 모델하우스처럼 구색을 맞출려면 기본 분양가만으로는 택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파트 한채를 산다고 끝이 아니라 발코니 확장 그밖에 여러가지 옵션을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들이 부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옵션상품들을 알게 모르게 모델하우스를 통해 권장하며 선전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
사무실 노땅의 위치에 있다 보니 철 모르는 직원들 질문에 답도 해주고 해설도 해줘야 하는 입장때문에 같이 붙어다니며 이런 설명 저런 설명을 하다 어쩌다 마주치는 실사용자들의 대화를 듣고 여직원 두 명은 바로 급좌절 모드로 돌아서버렸다. 대화 내용은 이러하다.
"9억이 기본 분양가니까...이거 하고 저거 하고 옵션 붙이고 발코니 확장하면 결국 13억 정도 소비가 될 꺼 같네" (비교적 적은 면적의 모델하우스에서)
어느정도 금액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같은 공간을 다른 이유로 찾은 바로 옆사람의 대화를 듣다보니 실물경제로 돌아서 버린 듯 하다. 박봉에 시간도 무진장 뺏기는 이 직종의 특성상 9억은 커녕 은행에서의 대출 자격 또한 바닥을 치니 아까 말한 '돈 모아 이런 아파트 한 채 사는 것'은 여간해선 현실불가능한 단지 꿈일지도 모를 것이다.
공짜로 주는 아이스티와 라떼를 들이키며 열 불난 속을 달래는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사는게 대체 뭔가라는 생각이 든다. "로또만이 살 길이다" 란 우수개 소리 해주고 순대국 한사발씩 저녁으로 해결하고 평소보다 상당히 일찍 퇴근하는 걸로 위로를 삼았다.
뱀꼬리 : 순대국집과 안어울리는 것 - 교복입은 상콤한 여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