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앤 더 시티 - 4년차 애호가의 발칙한 와인 생활기
이진백 지음, 오현숙 그림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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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문화적 허영심이 가득한 마립간의 발칙한 와인 생활기


 제가 와인을 처음 마셨을 때가 언제일까 돌이켜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J 회사에서 나온 소주병같은 병에 담긴 와인을 마셨던 기억이 떠오른 것을 보면 아주 짧지도 않은 듯.

 그러나 와인을 마시게 된 동기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문화적 허영심......

 다음과 같은 취미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고 합니다. ; 와인, 커피, 차茶, 그리고 오디오


 (<도도한 알코울 와인의 역사>를 읽어 보면 그렇게 와인 뿌리가 그렇게 고급스럽지도 않습니다.)


 요즘도 마트에 갈 때마다 와인 매장을 둘러보며 이름도 모르는 와인 한 병을 사가지고 오며 그럭저럭 혼자 분위기 내며 마실 때면 와인이 돈 값어치를 한다 생각합니다. 물론 최저가 중에서 고릅니다. 비싼 와인은 그 맛을 모르는 저에게 값어치를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복잡한 이름 기억도 못합니다.)


 틈틈이 차도 마십니다. 최근에 마시는 차는 용정차龍井茶와 국화차.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여행도 좋아하지도 않는 제가 휴가 때 항상 하는 것이 있습니다. 베란다에 의자 놓고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이 때 와인 한 병이 게눈 감추듯 사라집니다. 동양 고전 음악이라면 차를 마시기도 합니다. 아침에는 녹차, 밤에는 홍차.


 이렇듯 문화적 허영심에서 출발하였기에 저의 입맛은 이 책에서 설명하듯이 단맛, 신맛을 거쳐 쓴맛에 도착했는데, 앞으로 밸런스로 입맛이 진행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콜라 회사의 대표적인 두 회사의 고객들은 한 회사를 정해 놓고 마시면서 나의 입맛에는 ‘A 회사 콜라가 맞다, B 회사의 콜라가 맞다.’고 주장하지만 눈을 가리고 마시게 하면 콜라의 맛을 구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고 브랜드 즉 이미지를 즐기는 것이지요.


 예전에 제가 열 종류 이상의 와인을 한 자리서 마셔본 적이 있는데,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겠는데, 무엇이 좋은지 몰랐습니다. 옆에 계신 분이 ‘앞에 마신 와인 보다 뒤에 마신 와인이 다섯 배는 비싼 것이야.’라고 하시면 저는 ‘아 그래요.’라고 대꾸할 뿐이었습니다.


 와인의 이와 같은 문화적 위치 때문인지 와인에 관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지적 욕구(즉 와인이 어쩌구 저쩌구라는 설명)를 해결하는 책과 개인의 경험담을 소개하는 내용, 이 두 가지 적절하게 섞여있는 책. (알라딘에서 와인으로 검색해 보세요.) 이 책의 경우는 경험담이 주主가 되는 책입니다.


 한번은 와인에 관한 책을 사서 읽으려 했는데, 이유가 지적유희 때문입니다. 조금 쉬운 말로 하면 잘난 체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와인에 대해 아는 체를 해도 누군가 ‘마립간 당신, 그 와인 마셔봤어?’라고 하면 제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비싼 와인을 마시기는 가격도 부담스럽고 맛도 모르고.


 미술에 관한 책 <아는 만큼 보인다.>에 대해 이는 지적 오만이라고 비평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둘 다 틀린 이야기이고 둘 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마시다 보면 많이 알게 되고 궁금한 것을 찾아보게 되고, 찾아보다 보면 마시게 되고.


 밑줄긋기 p 52 시음 후 곧바로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느낌을 언어로 바꾸려는 노력이 오히려 시음을 망쳤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신 후에 물러나 않아 얼마간 전체적인 느낌을 되살리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 즉 ‘와인의 전반적인 느낌을 감상한다’에 올인한 것이다.


 저자는 빠른 시간 내에 와인 홀릭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다른 보통 사람의 여정을 거쳤습니다. 단지 시간, 돈, 노력을 집중적으로 투자했을 뿐.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와인을 마셔보자 외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도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상이 와인이라면.


(알라딘 서평단에 뽑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별 4개, 이는 와인을 포함한 술을 마시거나 푹 빠져있는 취미를 갖고 계신 분에 해당합니다.)


cf ; 이럴 때 난 와인이 싫다. p171 와인의 알콜 함유량은 맥주의 1.3배 - 와인의 도수는 폭탄주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마트 와인은 와인이 아니다? p 144 ‘국민 알코올’ - ? 뭐라고 말해야 될 것 같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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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2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마립간님, 펩시와 코크는 분명히 차이가 있던데요? 제가 워낙 콜라를 좋아해서 그럴까요? ^^

마립간 2007-01-2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물론 구분하는 분들도 계시죠. 대개의 경우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제 와인에 한번 도전해 보시지요.^^
 

* 와이키키 브라더스 ; 2001

* 고양이를 부탁해 ; 2001

* 가족의 탄생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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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영화들만 보셨네요 "가족의 탄생"은 안 봤지만 위의 두 영화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어요 특히 고양이를 부탁해!~~ 리뷰도 부탁드려요^^

마립간 2007-01-1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가족의 탄생도 볼만한 영화입니다. 리뷰를 시간 간격을 두고 올리겠습니다. 리뷰도 좋지만 시간이 있을 때 영화를 직접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천양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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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평균 도서 구입비를 지출하는 저에게 책에 관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바로 문맹文盲 ; 여기서 문맹은 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문학에 대해 모르는 것을 이르는 말로 제가 지금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문학의 무게에 대해 처음 느꼈던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흙>을 읽고 나서의 느낌이 <상록수>보다는 <흙>이 문학적 깊이가 있어보는데, 왜 문학이 깊이가 있었는지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천박한 문학 독서의 수준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


 고등학교 때  대학 입시 준비로 책도 읽지 못하는 상태에서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문학 도서를 읽었을 이유가 없었고, 대학 입학 후 처음 읽은 소설이 강석영씨의 소설 <숲속의 방>이었는데, (지금 줄거리도 생각나지 않고) 재미없었다는 기억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문학에 취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효석, 괴테가 천재로 불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을 포기하고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기에 안절부절... 이런 감정만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이 책은 시기심을 발동시켰습니다. 시도 아름답지만 시에 대한 감상, 시인에 대한 감상도 이렇게 문학적(?)으로 쓸 수 있을까? 심연深淵같은 문학의 깊이가 있다기보다 시골 동네에 있는 크지도 작지 않는 연못의 깊이를 갖은 이야기들. 글쓴이가 시 또는 시인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을 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글들에서 감동이 아기자기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저의 말’을 보니 조선일보 <문학의 숲>에 실렸던 글이다. ...... 어! 몇 개 스크랩scrap을 한 것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네루다의 시와 숨결’을 제일 먼저 찾았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글과 너무 잘 어울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한 줄이라도 분석만 하지 말고 감상문을 적어보자. ; p 96 문명은 직선이지만 자연은 곡선이듯이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보이는 직선이라면 무슨 살아갈 맛이 날까?


 인생이 직선이라면 과연 살맛이 없을까? 제가 좋아하는 노래, 임희숙씨가 불렀던 가요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위로 받고 싶다. 서로를 위로해 주고 곳에 서고 싶다. 시의 끝자락을 붙잡고서라도.


(알라딘 서평단에 뽑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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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7-01-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언급된 시를 몇 편이나 읽었나? 부끄....
그래도 문학책을 읽으려고 노력해야지.
그리고 별 5개... 오랫만에 제가 5개 주는 책입니다.
 
 전출처 : 로쟈 > 인터넷 서평꾼

아침에 내가 자주 들로는 카페에 들렀다가 나와 무관하지 않은 펌글을 읽었다.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책의 오피니언 리더'로 다음카페 '비평고원'과 알라딘서재를 소개하고 있는 기사인데, 쑥쓰럽게도 '로쟈'란 이름의 그 '리더'의 하나로 거명되고 있다. 물론 그 리더는 '책벌레'들의 리더이다.

한겨레(07. 01. 05) 책의 오피니언 리더 ‘인터넷 서평꾼’

밥을 먹듯 책을 파먹고 숨을 쉬듯 문자를 호흡하는 이들. 인터넷상을 어슬렁거리는 책벌레들이 있다. 새 책에 관한 정보를 재빨리 잡아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책의 내용을 평가하며 책의 허점을 일러준다. 열렬히 옹호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냉정히 외면하는 책도 있다. 책에 관한 한 이들은 인터넷상의 안내자이며 파수꾼이고 정보의 허브다. 책에도 여론주도층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익명의 바다에서 등대 노릇을 하는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합처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 포털 다음의 카페 ‘비평고원’이다. 책의 숲이라 할 이곳은 저마다 무림의 고수를 자처하며 갈고 닦은 내공으로 일합을 겨루는 공간이다. 일본의 최근 소설에서부터 프랑스 현대 철학까지 막 출간된 책들이 품평의 대상이 된다. 서슬 퍼런 칼날이 책의 허점을 찌르고 오래 쌓은 지식으로 책의 특장을 증명한다.

지난 2000년 문을 연 이 카페의 회원은 줄잡아 3천명에 이른다. 매일 500여명이 이곳에 들어와 책의 정보를 얻어간다. 이 무림에서 돋보이는 고수는 30~40명 정도다. 대다수가 문학·철학·정신분석학 등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박사과정이다. 이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매번 새로운 초식을 선보인다.

이들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사람이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 알려진 필명 ‘로쟈’다. 로쟈의 강점은 문학·역사·철학·사회서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나온 책은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개해준다는 점이다(*한때는 그랬다). 로쟈의 순발력은 전광석화급이다. 책이 나오면 즉각 해당 책의 내용과 배경을 설명해주고 저자의 다른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며 중요한 서평을 끌어다 덧붙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책과 관련이 있는 해당 분야의 다른 책들도 성격별로 정리해 소개해준다. 말하자면 로쟈는 최근에 나온 책의 지도를 그려주는 사람이다. 로쟈의 지도는 오차가 적을 뿐더러 군더더기가 없고 신속한 편이어서 책 정보 전달꾼으로서 그의 지위는 확고하다. ‘비평고원’의 초기화면에는 로쟈가 운영하는 코너 ‘책의 바다’가 떠 있다.

비평고원 회원인 최성희(37·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씨는 “로쟈처럼 책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올려주는 회원도 있지만, 회원들의 다수는 책 자체를 놓고 평가하고 토론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이 카페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글 쓰는 이들이 주로 대학 박사과정급 이상이기 때문에 전공 지식이 풍부하고 그러다 보니 논쟁이 일며 격렬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한번 싸움이 붙으면 몇 달씩 진행되기도 하고 논쟁에서 졌다 싶으면 아예 카페에서 탈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논쟁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평가가 많지만, 외서의 경우 번역의 질을 놓고 벌어지기도 한다. 잘못된 번역을 문제 삼아 품평이 오고가는데, 때때로 번역자가 직접 들어와 항의하다가 일대 격전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최성희씨는 “비평고원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좋은 번역서를 추천하고 질 나쁜 번역서를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 곳”이라며 “대학에서 강요하는 답답한 논문식 글쓰기의 대안을 찾아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상에서 필명으로 교류하지만 1년에 한두 번씩 오프라인 모임도 연다. 지난 연말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 10여명이 서울 종로 맥주집에서 모여 송년회를 열기도 했다. 이 카페를 만든 운영자 조영일(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씨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많다”며 “책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을 원하는 네티즌들이 물어물어 이곳으로 찾아들다보니 지금은 인문학 책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곳으로는 가장 다채로운 곳이 됐다”고 말했다.

비평고원이 인문학 연구자들의 자생적 모임이라면,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나의 서재’는 서점에서 북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준 방이다. 로쟈를 포함해 비평고원의 주요 필자 가운데 일부가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 글을 쓰는 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알라딘의 인문서 담당 김현주씨는 “‘나의 서재’는 서점을 찾는 독자들에게 책을 안내해줄 수 있는 필자들이 주로 사용한다”며 “2003년 8월에 문을 연 뒤 3만~4만명이 서재에 필자로 가입했고 그 가운데 40여명이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현직 일간신문 기자로 알려진 필명 ‘딸기’, 대학 3학년 때부터 3~4년째 활약하고 있는 ‘평범한 여대생’, 계간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서평을 쓰는 ‘바람구두’,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마태우스’ 등이 알라딘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대표급 필진이다. 김현주씨는 “이분들은 책이 서점에 깔린 직후에 번역이나 내용을 꼼꼼히 따져 품평하기 때문에 일종의 검증장치로서 기능한다”며 “특히 인문서의 경우엔 이들의 평가가 초반 판매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고 말했다.

알라딘은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책을 구입할 경우 책값의 1%를 적립해주는 인센티브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필진은 한달이면 1만원 이상의 적립금을 받기도 한다고 김현주씨는 말했다. 적어도 100명의 독자가 필자의 글을 읽고 책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의견이 책을 선택하는 데 기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데, 말 그대로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셈이다.

또다른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알라딘과 유사한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리뷰를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을 위해 독자칼럼란을 두고 있는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한동안 인기를 끈 난이었고, 요즘 가장 조회수가 많은 칼럼난은 ‘정군의 책 대 책’이다(*이 분은 우리의 '정군' 아닌가? 양다리를 걸치시다니). 이 칼럼의 필자인 ‘정군’은 1주일에 한두 번씩 두 권의 책을 선정해 비교 분석해준다. 예스24에서 블로그 관리를 담당하는 심현숙씨는 “40명 정도가 개인 블로그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적으면 1주일에 한두 편, 많으면 하루에 한 편 정도 책 리뷰를 올린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 필자들 가운데 특히 인기가 있는 필자에게 따로 코너를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정군의 코너가 바로 이 경우다. 심현숙씨는 “주목도 높은 필자들의 글에는 적어도 열 건 정도의 댓글이 달린다”며 “대다수 댓글이 좋은 정보를 고맙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교보문고도 알라딘·예스24처럼 서평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책 오피니언 리더의 시대다.(고명섭 기자)

07.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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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0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바람구두가 선정한 2006년의 책

바람구두가 선정한 2006년의 책
(2005. 10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우리에게 2006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 질문에 답하기 전, 우리는 잠시 20년 전의 오늘을 떠올려보는 것이 좋겠다. 1986년은 아시안게임이 있던 해이고, 한동안 “86, 88”은 번영을 이룩해줄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 시대의 우리들은 지금보다 암울했을까? 이 무렵 한국의 노동자들은 주당 52.4시간 노동으로 세계1위를 차지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미국의 전폭기들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했고, 소련에서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7월에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다.

과거를 기억하는 서로 다른 방식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양산, 정치개혁실패가 잇따르면서 권위주의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현실인식은 극단을 달린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2』(책세상, 2006)은 지난 시대의 필독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대한민국이 성취한 결과를 부정하는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자학사관을 담은 책이라고 비판한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엄밀한 고증에 입각한 학문적 성과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론 노 대통령이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했다는 발언과 그런 분위기에서 과거사 청산 법안들이 만들어지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대한민국이 성취(?)한 또 하나의 결과를 보여주는 두툼한 책 『야만시대의 기록 - 고문의 한국현대사』(역사비평사, 2006)가 출간되었다. 앞의 책이 노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발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책은 지난 2004년 12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열린우리당의 이철우 의원에 대해 “지금도 조선노동당 간첩이 국회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말한 사건을 보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올바른 청산과 정의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과거사는 언제라도 정치의 중심에 부각될 수 있는 뇌관이다. 그 이유는 과거사가 단 한 번도 깨끗하게 청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철우의 경우에도 과거 재판기록만 놓고 보자면 자백한 간첩이다. 권인숙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당시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믿거나, 그 재판기록이 “한 번 들어오면 대통령도 무사히 나갈 수 없다”던 고문 기술자들의 고문과 용공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본주의, 성장과 시장 논리가 제압한 도박판에서 살아남는 법

언제인가부터 우리 사회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조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좌파 신자유주의’, ‘인권을 위한 전쟁’, ‘평화를 위한 핵실험’이 그것이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프로메테우스, 2006)을 통해 핵발전소를 책임진 성실한 한 가장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온가족을 잃는 참사를 피할 수 없었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확히 20년 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발생한 체르노빌 참사는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발표하지 않았고(대략 1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 지금도 체르노빌에는 192톤의 핵연료가 미봉된 채 잠들어 있다. 우리가 북한의 공포와 미국의 증오 사이에서 벌어진 핵실험에 찬성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난 해 우리는 한 과학자가 벌인 언론플레이에 얼이 빠졌던 경험이 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지금도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지는 것일까? 도로시 넬킨과 로리 앤드루스는 『인체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궁리, 2006)를 통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 몸의 생체(유전자) 정보에 특허권이 부여되고, 이를 상품화하여 이익창출의 도구로 삼는 시장과 생명기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황우석의 숭고한(?) 연구를 위해 몸 바친 이들에게 난자체취의 위험성은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황우석의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풍요의 도마 위에서 우리의 몸(유전자, 생체정보)은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일들에 둔감한 걸까? 얼마 전 모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TV광고는 미인선발대회를 코믹하게 엮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47%는 주가지수연동정기예금에, 48%는 환매조건부 채권에 투자하며 5%는 부족한 미모에 조금 더 투자”하겠다는 미인의 소감 뒤엔 좀더 긴 뒷이야기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더 이야기해보라는 권유에 참가자는 “얘들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고 외친다. 젊은 세대는 언제나 기성사회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기 마련이지만, 오늘의 젊은 세대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자기경영, 자기혁신에 전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그런 논리를 담고 있는 경영처세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로 개처럼 벌어도 좋은 걸까? 지난 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마시멜로 이야기』(한경BP, 2005)의 이중번역 논란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어디로 향하는지 잘 보여준다.

만화 『타짜』(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는 대중적 호응에 힘입어 영화화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대 배경을 갖고 있는 만화 『타짜』에서 자전거를 갖고 싶었던 곤이의 소박한 욕망은 결국 그의 청춘을 도박판에 저당 잡히도록 한다. 빨치산과 국군이 밤낮으로 번갈아 출몰하던 지리산에서, 살벌한 승부가 펼쳐지는 도박판에서 주인공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 다른 타짜들처럼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지 않고, 몸성히 살아남는 방법으로 깨우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멈췄다. 그것만이 돈을 위해 체면도, 염치도 없이 벌거벗은 욕망들이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도박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1986년엔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라는 <아, 대한민국>의 노래가사처럼 유람선이 정말 한강 위로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아~ 대한민국”을 외친다. 다만 지금의 “아~”는 풍요와 번영을 상징 조작했던 그 시절의 외침과 달리 한숨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의 집권 세력은 이른바 민주화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한숨짓고 있는가? 다가오는 2007년 새해는 개인적으로는 87년 시민‘혁명’이라 규정하는 87년 민주화운동이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바로 그 시민혁명이 만들어냈던 87년 체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고비에 서 있다.

박태균의 『우방과 제국』(창비, 2006)이나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는 모두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체제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살펴야 하지만, 문제의 복잡성을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한미FTA'라는 하나의 사안을 두고 우석훈은 크게 세 가지 층위의 각기 다른 고민거리를 제기한다. 첫째는 생산력 중심, 발전 중심의 패러다임은 결국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폭주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기존의 87년 체제에 의해서는 어떤 대통령이 선출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체제를 개혁하거나 보수하기 어렵고, 호민관으로 선출된 대통령 자신의 폭주를 국민직접행동 이외에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것, 셋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라도 새로운 시스템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국민적 합의에 의해 도출해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즉, 우석훈은 우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느닷없는’ 한미FTA 폭주를 통해 우리 사회의 경제시스템, 국가시스템 전반에 걸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폭주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박태균은 그간의 한미관계가 대등할 수 없었던 것은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정권들의 태생적인 한계에도 있지만 ‘국가안보’를 빌미로 ‘정권안보’에 치중한 정권을 경제성장 혹은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승인해온 우리들 자신에게도 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만약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면 한미관계는 좀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인가? 87년 혁명 이후 어느새 20여 년간 지속된 절차적 민주화에 의해 수립된 민주주의 정부 아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한미관계의 불평등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박태균은 이것이 지속되는 독재의 유산이며,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진화론적인 약육강식 담론을 우리들이 내면화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통해 누렸던 경제적 ‘특수’를, 미국과의 동맹으로 덩달아 우리도 ‘제국’이 될 수 있다는 음험한 욕망이 왜곡된 한미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상상력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가 꿈꾸셨던 대한민국입니다.”라는 CF가 있었다. 이 광고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이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 광고가 호명하는 아버지들이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것은 사실이고, 분명 그들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은 배고픔을 극복하는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저당 잡히긴 했지만 분명히 성공했다. 그러나 87년 체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었지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그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할 때이다. 이제 소개하려는 두 권의 책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 해답의 단초가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순홍 유고전집 1. 2 - 생태학의 담론, 정치생태학과 녹색국가』(아르케, 2006)과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그것이다. 책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지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합리적이고, 급진적 실천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책 소개를 가름하고자 한다.

<출처 : 함께사는길, 2006. 12월(통권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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