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身邊雜記 160608
- 알라딘 ‘좋아요’
서재잡기로 올릴까, 신변잡기로 올릴까 하다가 ‘신변잡기’로 올린다.
우선 저와 ‘친구’를 맺고 있는 알라디너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친구 관계가 아니더라도 제 글을 읽고 주시고, ‘좋아요’를 눌러 주시는 분들에게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서재가 처음 생겼을 때, 대인기피증이 있는 내가 다른 분의 서재를 방문했어도 댓글을 남기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즐겨찾기 10명 ~20명 정도였다. 그리고 내 글은 당선작에 뽑힐 성질의 글도 아니다. 이런 상황은 어떤 글이 ‘당선작’으로 뽑히게 되는지, 누가 ‘주간 서재의 달인’에 뽑히는지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2011년부터는 내가 연간 ‘서재의 달인’에 뽑히면서, 현재 유일하게 관심이 남아있는 것이 되었다. (한 때 신간 평가단에도 관심이 있었다. 안 뽑히니 이것도 관심이 멀어졌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부터 한 동안 내가 글을 올리자마자 ‘좋아요’가 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반복되니 나는 혹시 기계 오류가 아닌가 생각했다. 기계 오류라면 기분 좋은 기계 오류다. 북플을 통해 기계 오류가 아닌 것을 알았다. 당시에 스마트폰 북플이 제공되었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PC 인터넷 버전에서 북플 아이콘이 생겼다. 이것을 눌러보니, 내 글에 누가 ‘좋아요’를 눌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서재 지기에 물어보니, 상대를 알려면 반드시 로그인을 하고 스마트폰 북플에서 ‘좋아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있었던 것은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분이 참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글에 감사의 인사말과 함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나는 아무리 ‘좋아요’를 눌러도 상대가 나를 알 수 없다. 요즘 다른 분의 서재를 많이 방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서재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닉네임 실명’으로 ‘좋아요’를 누르고 싶다. 그리고 댓글에도 ‘좋아요’를 누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이해를 구한다. (그리나 나는 ‘닉네임 실명’으로 ‘좋아요’를 받고 싶다.)
‘페미니즘’ 글과 관련하여 어렵게(?) ‘좋아요’를 눌러 주신 여성 알라디너들께 감사드린다.
어느 여성분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는 나를 벽으로 느끼고, 나 역시 상대를 벽으로 느낀다. 내가 어떤 여성과 소통에 벽이 있다고 해서 모든 여성과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느낌은 알라딘 서재 활동 이전에 오프라인에서도 느꼈던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내가 여성의 단점을 지적했는데, 상대의 여성은 자기주장이 확실한 분이라 반론을 예상했는데, 오히려 내 의견에 동감을 했었다. 나는 잠깐 당황했었고, 결과적으로 나의 편견이 되었다.
나와 대립되는 의견을 가진 여성 알라디너에게도 감사해야 마땅하다.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의 페미니즘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딸아이가 내 알라딘 서재를 보더니, ‘좋아요’가 뭐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고 호감을 표시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좋아요’는 많은데, 왜 댓글은 없냐고 묻는다. (딸아이는 20개 넘게 ‘좋아요’를 받은 글을 보지 못했나 보다.)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내 글을 두고 (부정적 감정을 실어) 같은 이야기를 했다. 마립간의 글은 ‘좋아요’에 비해 댓글이 없다고. 너무 많은 이유가 떠올라 아이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