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인화 文人畵
알라디너 yureka01 님으로부터 책 두 권을 선물 받았다. (yureka01 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소리 없는 빛의 노래>, <그리움은 언제나 광속> 한 권은 ‘포토에세이’로 분류되고, 다른 한 권은 시화집이다. 이 두 권의 책을 받고 첫 느낌은 다르고도 같다는 느낌이다. 아니 ‘같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두 권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문인화’로 설명될 수 있다. ‘사진 수필집’은 그림대신 사진으로 대체되었지만, 읽는 사람에 작동하는 방식은 같다.
‘변호사’, ‘의사’를 우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직종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자녀가 이와 같은 전문가 직종에 종사하기를 바란다. 전문가를 expert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노예와 맞닿는다. 그러니까 (과거의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의 많은 사람)는 노예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포괄적 주인은 자본주의겠지.)
노예와 대척되는 것은 귀족이고, 전문직 (또는 전문적 지식)에 대척되는 것은 인문학 humanities이다. 귀족은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한다. 공부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와 같은 서양 고전, 사서삼경과 같은 동양 고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열역학 법칙과 같은 자연과학 지식도 다 어우른다. 수학과 시詩와 음악이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동치이거나 합동은 아니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나는 문인화가 좋다. 왜 좋을까? 알라딘에 올린 나의 어느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대중주의 성향보다 엘리트주의 성향이 있다. 아마 문인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제 그만 노예에서 벗어나 귀족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시서화 詩書畵는 서로 공유되는 부분과 독자적인 부분이 있어, 이 들이 어울리면 각각과 또 다른 완전체를 만들 수 있다.
* 옛날의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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