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런 페미니스트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아마 10년쯤 똑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몰라, 정리하고 넘어간다. 아래에 언급할 이들이 페미니스트라고 해야 할지, 말지 ... 역시 페미니스트의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1) 정형 stereotype과 편견 prejudice을 혼동하는 사람
나는 정형을 자료가 축적된,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과학적 근거가 있는 상식이라면, 편견은 과학적으로 틀린 사실을 상식으로 믿는 것이다. 나의 정의에서 자료가 축적되지 않거나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예로 설명하겠다.
여자는 자동차 주차를 남자보다 잘 못한다. ; 이 문장이 정형일까, 편견일까. 이와 같은 문장을 대할 때, 어떤 이는 이렇게 반응한다. “어떤 여성이 주차를 잘 못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 시킨 것이다. 남자보다 주차를 잘하는 여자를 여러 명 알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남자가 여자보다 키가 크다’는 명제도 부정할 것이다. ‘어떤’과 ‘집합적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
개념적 차이가 나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어머니는 분명히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2) 문화적 여성주의를 가장한 마초 남성
어떤 남성들은 여성 군 입대에 관해 몹시 흥분하기도 한다. 진중권 선생님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페미니스트들은 참전권을 요구했어. (중략) 근데 그 요청 마초들이 거절했지’라고 트위에 글을 남긴다. 진중권 선생님은 여성의 군입대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왜 ‘문화적 여성주의’라고 하지 않고 ‘마초’라고 했을까?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몇 남성들을 볼 때, 이재오, 김문수 국회의원을 떠 올렸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일관되게 비판하는 것은 ‘가부장제’다. 그리고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는 통상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집단에서조차 양성 평등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3)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여성
10년 전 ‘따우’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에게 나는 이런 의견을 밝혔다. ‘여성들은 스스로 보호받아야 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따우 님은 내게 ‘제 (따우) 주위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라고 답변을 했다. 나는 당시에 반론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따우 님은 민우회에 연관된 일을 하셨고, 답변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답변에 ‘(대개의) 여성’이 아니라 ‘본인 주위에는 있는’ 여성이라는 한정된 의미를 제시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할 때, 크고 건장한 얼룩말을 사냥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먹을 것이 많고, 질병이 없는 신선한 고기가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번의 남성과 3)번의 여성은, 삶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1)번보다는 나의 부정적 감정이 약하다.
* 결과적으로 시간이 흐름으로써 진보를 할까
남녀 불평등이 현실이 상황에서 양성 평등은 분명 진보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전망은 희망적이기 보다 회의적이다. 인류 역사가 과거에 비해 진보했는가? 대大 철학자간의 논쟁도 있었다. 철학 전반은 너무 거창하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주제와 시간을 한정시켜보자. 여성( 알라디너)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2003년과 2015년) 남녀불평등에서 양성평등으로 진보했는가?
* 그렇다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곰곰생각하는발님이 댓글로 내게 소개해 준 어느 주부.
제 아시는 분은 아들만 둘인데 철저하게 가사 분담을 시킵니다. 그게 고3 아들에게도 시키더라고요. 그분 말씀이 자신은 아들이 설겆이 따위 때문에 좋은 대학을 못 가더라도 설겆이 따위는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서 결혼했을 때 둘이 반씩 가사 노동을 분담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신다고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