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견불여일행 百見不如一行
1980년대 말 대학 학생 시절, 실험실에 잠깐 있었다.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받을 겸, 실험 기법도 배울 겸.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 잡담을 나누는데, 실험에 관한 이야기가 성관계에 비유되었다. 학생 신분인 내가 있는 고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선생님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셨고, 나는 백견불여일습百見不如一習이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웃으셨다. 성관계가 언급된 상황이라서 더 웃겼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실용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한번 보거나, 실습한 것으로도 몸의 습득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실용지능에 대한 상황을 이해만하고 실감하지 못하였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는 ‘백문불여일견’이라면 ‘백견불여일습’이라고 조건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는 나는 내가 만든 한문 문장에서 습習이 적절한지 험驗이 적절한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습’은 능동적이지만, ‘험’도 수동적으로, 둘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 행으로 습과 험을 통합했다. 게다가 습과 험도 검색되어 조금 놀랐다.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비슷한 듯.)
백견불여일행을 다시 찾아보게 된 것은 어느 알라디너의 댓글 대화 때문이다. 먼저 예전에 알라딘 (댓?)글에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하나.’라는 문장을 보았다. 나는 대댓글을 달지 않았지만, 이 말이 맞나 생각해보았다. 며칠 전 본 문장은 ‘세실리아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앎에 ‘학습지능’에 의한 것과 ‘실용지능’에 의한 것이 있다. 학습지능에 앎의 경우는 모름과 앎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하다. 반면 실용지능에 의한 앎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리고 실용지능에 의한 앎을 대충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직접 경험이전에 아는 것이다. 본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간접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한두 번의 직접 경험에 의해 아는 것이다. 백견불여일행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도덕경에도 나오지만,) <아웃라이어>에서 언급한 (1만 시간으로 알려진) 일정 역치를 넘는 경험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살인만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봐라’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위치 때문에 절도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암시는 하셨다. 직접 경험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다른 알라디너 글에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저도 가끔 충고를 받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고요.’ 나에게 이런 충고주신 분의 뜻을 새겨보면 직접 경험을 너무 경시하지 말라고, 학습지능과 실용지능은 균형을 가져야 된다는 충고로 해석했다. (역시 말은 쉬운데, 행동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