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身邊雜記 131113

- 신변잡기 131106부터 신변잡기 131112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8237 의 후기

 

위 제 글 5편에 대해 몇 가지 지적 사항이 있어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비과학적’ ;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특히 수학과 물리)을 좋아했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비과학적이란 것, 예를 들면 점占, 굿, 유령, 이해 못할 종교 (사이비 종교) 등에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과학의 한계를 느꼈고,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과학적’이라는 것에 거부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라는 책에서

p28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p178 고흐의 마지막 말 “불행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는 말에 대해 이 긍정의 태도를 균형짓는 일, 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의 문제다. 이는 이미 철학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기 때문이다.

 위 글을 읽고 ‘비과학적’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라고 해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논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소시지 재료를 소시지 만드는 기계에 넣었더니 소시지가 나왔습니다. 소시기 기계에 음식물 쓰레기를 넣었더니 그에 합당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소시기 기계에 넣었더니 햄이 나왔습니다.

 소시지 재료는 (통상적인) 과학 분야의 관찰, 소시지 기계는 과학적 방법, 소시기는 과학적 이론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미신이고, 어떤 것은 통상적으로 과학으로 분류되지 않는 분야의 관찰 (예를 들면 도덕)이며 햄은 그 결과물입니다. 햄에 해당하는 도덕의 결과물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다른 용어( 예를 들어 철학으)로 부르든 학문적/진리 가치는 있고 그 햄은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생명 창조의 지적 설계론 ; 저는 생명 창조에 있어 지적 설계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 주장이 무가치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동설이 처음 주장되었을 때,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주장들을 들어봐도 꽤 과학적 반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그 반론을 설명할 만한 과학 지식이 없었죠.) 뿐만 이런 반론을 설명하는 과정은 지동설의 타당성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창조의 지적 설계론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다른 것으로 부르든.) 어떤 이의 생각에는 진화론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겠지요.

 

* 칸트 ; 지난 일주일간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의 이중 잣대를 발견했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칸트도 틀렸고, 뉴턴도 틀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칸트 생각을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뉴턴은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성이론으로 확장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칸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수학의 확실성> p404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그릇된 주장을 했지만, 이것은 당시의 철학자들과 수학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믿음이었다. 이런 오류로 인해 후세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칸트의 저작이 3권정도 있는데, 구입을 해 놓고 전혀 읽지를 않았더군요.

 

* 신변잡기 131106부터 신변잡기 131112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가연의 서평에서 비롯되었지만, 인용한 글들이 정확히 칸트의 생각인지, 러셀의 생각인지, 아니면 가연님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용한 출처만 표기하였습니다. (가연님께 미리 양해를 구했고 동의하에 글을 썼지만, 제 글을 읽으신 분들은 오해 없으시길. 인용된 글의 대부분이 가연님의 주장이 아닐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올리게 된 핵심을 언급하자면

러셀의 주장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에 (가연님이 동의한다고 하셨지만) 나는 이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칸트의 언급 ;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위의 언급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가연님이 동의하는지는 역시 불명확하고) 가연님의 말씀대로 칸트의 저작을 읽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인해야겠군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립간 2013-11-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변잡기 131107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9724 의 글은 가연님의 리뷰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확실성에 대한 것, 확실성의 기반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 것입니다.

기관차의 예화와 공작왕의 예화는 불확실성의 논거로 제시한 것인데, (물론 공작왕의 경우 줄거리 전체를 노출시키지 않아서 더욱 논쟁의 거리를 남겼을 수도 있지만) 제가 제시한 내용만으로 논거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구체적 설명을 하자면, 그야말로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될 것 같아, 그냥 지적하신 바, 부적절한 예였다고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연 2013-11-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동의하에 글을 썼다는 말씀엔 동의못하겠는데요... ㅎㅎ '인용한 글들이 정확히 칸트의 생각인지, 러셀의 생각인지, 아니면 가연님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용한 출처만 표기하였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처음 양해의 말씀을 하실때 제 글을 '어떻게' 인용하실지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하셨던 것 같네요. 제 글의 일부만 잘라서 인용하시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마립간님의 의견의 반대입장으로 몰리게 되죠... 마립간님께서는 오류를 집어달라고 하셨지만, 글들을 보면 오류를 집는게 아니라 반론을 원하시는 것 처럼 잘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등등등... 그래서 제가 악마의 변호인, 같은 역할을 졸지에 맡은 것 같다, 라고 말했던 겁니다. 지금에서야 인용한 글들의 대부분이 제 주장인지 아닌지 모른다, 라고 덧붙이셨지만, 사실 그런 작업은 처음부터 하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핵심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러셀이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가, 는 직접 '인기없는 에세이' 를 읽으시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저 부분만 덩그러니 놓아두면 당연히 동의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사실 책을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를 바랬습니다. 제가 러셀도 아닌데 러셀을 대신해서 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마립간님을 설득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추가로, 러셀의 말에 대한 제 입장은 제 리뷰에도 적혀있지만.. 명징하게 말씀드리는게 나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습니다. 저는 인도주의를 기억하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뒤의 문장,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은 인도주의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마립간 2013-11-13 13:40   좋아요 0 | URL
동의 관한 가연님의 지적은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한 개의 글로 작성할 계획이었다가 글이 나눠지면서 한번에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직접 읽고 판단해야 했었다는 지적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첫 알라딘 게제 때, 그냥 지나쳤다가 당선작 발표 후에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글을 쓰는 내내 약점으로 인지하고 있었구요.) 아마 책을 읽지 않고, 가연님의 설명 듣고, 대충 때우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