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身邊雜記 131112

- 신변잡기 131111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6116  에서 계속되는 글

 

나의 바람은 다음 글과 같다. ;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말해. 철학도 수학처럼 계산해서 어떤게 답이다, 라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라는 마음을 품고 있던 러셀

 

그러나 내가 얻은 답은 ; 그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답은 ; 수학의 세계는 결국엔 불완전한 세계였었고, 사실일지도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추측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세워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체계였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사리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다. ; 나 역시 시대를 넘을 수 없다. 시대를 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밝혀진 지식조차 충분히 소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원한다. 지구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는, 시간적으로 Big bang부터 big crunch까지, 공간적으로 전 우주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을 포함한, 철학 및 과학) 지식을.

 

*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 심성이라던가, 신념, 사상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조금씩 깎여나간다. 어제는 신은 있다, 라고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안 외치고, 그 다음날은 신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어제는 신이 없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신이 있을까? 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은 신은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지난 주말 내가 알라딘에 올린 (주로 2003년말부터 2004년초에 게제한) 글들을 살펴보았다. 10년 넘게 알라딘에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렇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옳게 판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전쟁은 없다.’라고 선언한다면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우주가 소멸되는 시점까지 옳게 판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어제는 ‘신이 있다’, 오늘은 ‘신이 없다’. 내일은 ‘신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진리는 (특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기대는) 환상인가?/ “지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지나친 영리함이다.” ; 나는 영리함에 얽매여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 어떤이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주었다. ; (요약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론조차 더 나은 이론을 대체되면서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또 다른 분도 ‘착한 전쟁의 유무’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나에게 진리/세상은 내가 원하는 방식, 이런 질문에 보편적이 답변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세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럼에 불구하고 위와 같이 상대적 진리를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개신교의) 신은 없다고 단언하거나, 수학에서 일반각의 3등분은 불가능하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미래의 바뀔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다.

 

(러셀 본인이 강조하듯이) 그 신념이 그릇된 근거를 바탕을 하고 있거나, 설령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광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이탤릭체 글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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