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대한 변호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마립간입니다.

 
드팀전님의 글 대부분에 동감을 하나 저에 대한 의견 한 가지 정도가 사실과 다르군요.

 
저는 광우병 시국뿐만 아니라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는 종류의 소통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느껴왔던 겁니다.

 페이퍼 ‘광우병(http://blog.aladin.co.kr/maripkahn/2083976)’에 ‘라주미힌’님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드팀전님은 라주미힌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 주셨죠.) 라주미힌님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또는 정보의 부족)’고 이야기하셨는데, <과학, 광우병을 말하다> 책을 읽으니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지식 정도는 밝혀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 지식에 눈길을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던 것이네.’라고 느낀다면 저의 걱정은 기우였을 것입니다.

 저의 ‘
소통에 대한 상처’는 드팀전님이 이미 읽으셨던 저의 댓글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며칠 전 직장 비서(여자 30대 초반, 한 아이 엄마, 고졸학력)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것이냐고 물으니 당연히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단편적으로 동남아 여행을 가서 스테이크를 먹을까 생각했을 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미국산 쇠고기의 가능성이 높아도) 밖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나고 물으니 답변이 '밖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돌 맞아요.'하면서 웃었습니다.
다른 여직원(20대초반, 고졸 4명, 대졸 2명) 6명에게 물으니 한 명만 주저하고 나머지 5명은 걱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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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걱정하는 것은 ‘밖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돌 맞아요.’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괴담. (수년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지구 상의 어느 나라에서 광우병 위험성을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식물성 사료만 사용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동물성 사료를 사용한 흔적이 있었고 이 나라에서도 광우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 발표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연구자(전문가) 집으로 무기명 소포가 배달 되었는데, 소포에 식칼만 하나 달랑 보냈다고 합니다.

 
드팀전님의 저에 대해서 오해하신 한 가지는 제가 (자연) 과학보다 정치를 하급으로 놓았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30년 전쯤에는 그랬습니다. 왜 정치가는 우표나 지폐에 도안되면서 수학자나 과학자는 그러지 못할까. 저는 오히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정치보다 하급취급을 받는 과학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한 분들 모두가 과학지식에 관해 무지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통찰력을 갖고 정치적 맥락을 짚은 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드팀전님의 쓰신 글 ‘폴 크루그먼이 - (중략) - 정치의 영역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그래서 촛불 시위는 정치적 시위이어야 함에도 그 당시의 이런 언급은 정부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왜곡되어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역시 소통에 대한 상처입니다.

 
드팀전님의 언급하신 ‘생태주의’도 저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저의 구입도서 목록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독일의 ‘녹색당’이나 ‘그린피스 Green peace’를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단지 조심스러운 것은 식량의 풍요가 GMO를 비롯한 개량(육류의 경우 공장식 사육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유기농 농사나 소를 소로 키우는 축산 방식이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생산량이 근대 이전 즉 중세 시대로 줄지 않을까요? 드팀전님께서도 읽으셨겠지만 <육식의 종말>에서 보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육류 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미국의 축산이 변화되는 모습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수요)이 조절될 수 있을까요?

 
과학을 ‘이성과 합리성’과 제가 혼동하여 사용한 것을 인정합니다. 제가 의미하고자 한 것은 과학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에 해당합니다. 최근에 읽은 <인간 조정법>, <타임 패러독스>는 인문학 분야에 속하는 책이지만 방법적으로 볼 때 과학책에 해당합니다. 저의 페이퍼 ‘알라딘 서평단에 대한 단상’에서 과학책의 추천은 저 외에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루시퍼 이펙트> 추천한 분을 생각하면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 부분 때문에 페이퍼를 쓰고 조금 찜찜했습니다.) 현재의 과학이라 함은 방법적 의미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인문과학, 사회과학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자연과학의 첨단은 비선형非線型성에 대한 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상당히 근접했습니다. 한때는 통섭이 유행했지요. 그런데 왜 ‘과학’이란 용어를 사용했는가 하면, 앞에서 언급한 자연 과학 (또는 수학)의 하대下待 (또는 학대虐待에 가까운 대접)때문입니다. 알라딘 페이퍼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 과학 및 의학은 정치, 자본, 문화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현대의 모든 학문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옛날 페이퍼에서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한 것처럼 호기심에 의해 학문을 하던 시절은 이미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해도,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측해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야는 없습니다. 의학은 더욱 심합니다. 저의 옛날 페이퍼에서 의학은 돈과의 싸움이다.’라고 쓴 적도 있습니다. 어느 분은 순수과학도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분야이니 우리나라는 순수과학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분도 있습니다. 과학자 입장에서는 과학과 정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분리하고 싶은 것이죠.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한 독재자가 있으며 정권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반대파에서는 대중과 전쟁 방지를 위해 테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사고 반대파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데, 독재자가 환자로 왔습니다. 저는 독재자를 치료해야 하나요? (삼국지의 조조와 길평) - 윤리적 긴장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결정은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과학자가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을 때, 부작용이 없는 순수한 연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신대로 정치와 이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과학자는 연구를 그만두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권위원회는 다른 모든 조건을 무시한채 인권만을 생각한다고 하는군요.)

 
정치는 어떻게 이끌어져야 하나? 정치는 잘 모르겠고 조직이 성공적으로 이끌어지는 것에, 어느 경우는 다수가, 어느 경우는 엘리트가 기여하기 때문에 저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세상의 소통에 있어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라딘 마을에서는 아닙니다. 저의 초창기 페이퍼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다’라는 도발적 페이퍼도 이해를 받았고, 아니면 이해를 받지 못해도 거부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라딘 마을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외에는 인터넷을 잘 하지도 않아 다른 곳은 잘 모르지만 악플없이 토론이 잘 이루어지는 Website를 보신 적이 있나요?

 
마지막으로 농담 한마디 하겠습니다. 제가 가끔 재미로 ‘내가 정치를 해야 하나?’라는 한탄을 하면 아내가 절대로 못하게 말리겠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여자를 군대에 보낼 것이고, 두 번째는 수학, 철학 몰입교육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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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2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19 15:57 
    *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2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의 댓글에 대한  우선 다시 한 번 저의 글이 드팀전님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 먼저 드립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탈정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비유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페이퍼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드팀전님께서 ‘탈정치’를 유인하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2.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3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19 18:09 
    *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3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의 댓글에 대한  첫 번째 댓글의 ‘과학과 신학’이나 ‘의사와 독재자’의 극단적인 비유가 논의를 과학적 논의를 유지 못하고 감정적이게끔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여럿의 자녀에게 동일하냐는 논의를 하였습니다. 사랑이 동일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친구에 다음과
 
 
마립간 2008-12-1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우병에 대한 페이퍼를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에 페이퍼를 올리지 못하고 일정 시기가 지나서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알라딘 마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제가 어느 정도 조절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평범하고픈 콸츠'님은 마을을 떠났지요.

마립간 2008-12-1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후 FTA 비준을 통과에 관한 뉴스를 보니 정치가 과학 아래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위에 있을 것 같지도 않네요.

드팀전 2008-12-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꽤 춥군요. 직장인이 뽑은 올해의 한자가 '은인자중'이라고 하더군요. 잘 피하자라는 말인데...더 줄이면 누를 '압'자일 듯 합니다.

알라딘에서 제가 '진보'에 칼을 새울 때, 더 거대한 상대는 외면하고 그나마 열심히 싸우는 이들에 돌을 드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울때가 있습니다. 제게 이명박은 절대 악은 아닐지언정 '적'이기때문에 거기에 말로 하는 악다구니를 써봐야 별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래서 전 단 한번도 이명박을 '쥐명박'이니 '개xx' 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그건 그가 그런 존재가 아니기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을 보고 뜨겁다고 뭐라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언어의 사용 속에는 사라지거나 묻혀가는 무엇이 있습니다.(이건 기회가 닿으면 한 번 페이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페이퍼에서 올렸듯이 저는 어떤 정치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올인 하는 것의 위험함을 말했습니다. 물론 올인 하는 사람들의 몫이 있고,또 거리를 두는 사람들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늘상 공허한 생각과 과잉된 행동만 남아 현상이 유지될 뿐입니다.(대학 다닐때 운동권 선배들의 실수중 하나는 '의지'의 과잉과 '성찰'의 부재로 오히려 감싸 안을 수 있는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어 버린겁니다.)
그러나 성찰이란 것 역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의지와 움직임이 선행되고 그것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성찰을 위한 성찰로는 공허할 뿐입니다.

생태주의는 저 역시 관심대상이지만, 생태근본주의가 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 견지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태적 사회주의' 같은 개념에 그 출구를 찾습니다. 생태주의를 신화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과학포기'로 생태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생태주의가 전근대로 회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생태주의의 과학관은 오히려 동양적 세계관,자연관과 유사합니다. 그것에 근대 서구적 과학관에 배치되는 부분도 있지만 늘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는 부분입니다.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서구과학에서도 말하는 지구 유기체론이나 가이아론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마립간님이 생태주의를 신화적으로 환원했다고 하는 지점은 어떤 사회이론이나 정치적 이론이 갖고 있는 '상상력'과 '지향','경향'것은 개념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모델을 '과거'나 '미래'에서 찾는 대안의 방법론 이지 현실을 부정한다거나 축적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량의 생산량 감소문제를 반박하기 위해 쿠바 유기농운동에서 보여준 생산량 증가 모델을 반론의 근거로 내미는 것도 사실 이런 측면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분법적 이해와 오해가 등장하는데...각 영역의 독자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독재자를 살려야 하는가 마는가의 질문을 던진다면 결국 선택적예를 들어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즉 과학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게끔 만드는- 방식일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적절한 예는 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되돌려줄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의사의 가족들이 그 독재자 횡포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여있다는 조건 하나만 더 붙이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겁니다. 이 말은 마립간님의 예가 그만큼 본래 논의의 목적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설의 주체로서 의사의 위치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의사는 이미 자신의 생존과 안위에 대해 그 독재자의 파장 속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장의 예가 그렇고 마립간님이 본인 내지는 과학을 위치시키는 발화의 위치가 그럿습니다.제가 정치의 옹호를 말했다는 것은 이런 '초월성'에 대한 반감입니다. 그 예로 돌아가 볼까요? 그 의사는 독재자가 아무리 날뛰고 몰아붙여도 윤리적으로는 잠시 고민하고 반대하는 의견을 가질 수 있으나 실존적으로 피해를 그다지 보지 않는다는 위치라는 말입니다 그 위치는 흔히들 역사에서 '부르주아-테크노라트'의 결합으로서 근대 권력의 중심세력의 등장을 말하는 거기도 합니다.

만약 진정으로 그 의사가 전쟁에서 죽어나갈 수 백만의 '희생자'의 절규와 고통 위에 자기를 위치하고 고민한다면 그 의사는 독재자를 살리지 않는 쪽으로 더 기울겁니다.(앞에 총부리가 없다는 조건하에서)단순히떠밀려와서 고통에 신음하는 일개 적군의 병사와는 다르지요.그가 진정 반대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자 한 것이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자고 한 것일뿐입니다. 눈 앞의 공포 앞에 어쩔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자기 보존을 위해 담론의 외피로 변호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요. 역사에서 전문가나 관료는 그래서 어떤 시대에든 살아남을 수 있게 됩나 봅니다

FTA와 관련해서 하신 말씀은..정치가 과학 아래 있지 않지만 위에 있지도 않다는 말은 맞습니다. 어느 것도 위에 둘 수 없습니다만, 마립간님의 대응에는 '탈정치'를 유인하는-제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탈정치화'-시니컬이 있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탈정치'하지 말라는 것이 '정치로 모든 것의 환원'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본과 이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때문에 과학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꺼낸 문제입니까? 전 한번도 그런 말을 태어나서 단 한번도 한적이 없습니다.마립간님의 페이퍼에 글을 단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꺼내신것은 여러 논의를 자의적 이해에 의해 마립간님에 쓰신 겁니다.

어쨋든 긴 댓글이었는데...이 정도에서 마감하겠습니다.

마립간 2008-12-19 15:50   좋아요 0 | URL
지난번과 같이 저의 변명은 페이퍼로 정리하겠습니다. 가을산님과 논쟁때는 대립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드팀전님의 첫 번째 댓글은 오히려 저와 보충적인 느낌을 가졌습니다. 오늘 아침 수정 전의 댓글과 지금 다시 읽은 댓글과는 많은 느낌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드팀전의 감정에 상처를 주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드팀전 2008-12-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에요...저의 감정이 아니라 저의 이성입니다. 제가 든 '발화자의 위치'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일겝니다. 몰입교육하시고 싶으시다는 철학의 주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마립간님이 관심을 가지실 분야일 듯 합니다. 마립간님께서 말하는 그 위치란것은 다분히 초월적이군요. 신학으로서의 초월이 아니라 과학으로서의 초월...마립간님에게 과학은 종교입니까? 아닐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를 하면 어떤 것이든 몰입 교육은 막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철학이 아무리 형편없이 대접을 받더라도 수업시간을 늘리고 지금보다 강화는 하겠지만 몰입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군대 보내지 않겠습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집니다. 징병제를 점차 줄여서 모병제로 나가겠습니다.굳이 농담을 하신다니 제 농담은 그렇습니다. 의외로 농담 속에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