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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 ㅣ 보리 한국사 3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9년 3월
평점 :
드라마 못본지 한참 됐다. 마지막에 본 드라마가 '미스터 션사인'인데 기억에 2월에 보았나? 싶어 검색해 보니 세상에, 작년 9월이었다. 시간, 참 빠르구나.
정확히 회차까지 기억난다. 9회 마지막 부분이었다. 강물이 하얗에 얼어붙어 있고 애신과 유진이 그 위를 천천히 걸었다. 거기서 유진(이병헌 역)이 자신이 조선을 떠난 이유를 말했다. 노비의 아이였던 그가, 상전의 손에 죽게 되자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던 9살의 시린 기억들에 대해서. 애신(김태리 역)은 충격을 먹었다. 예상했던 반응과 마주하며 유진이 되물었다.
"무엇에 놀란 거요? 양반의 말에, 아님 내 신분에?"
애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은 무엇에 놀란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더 놀랐을 것이다. 유진이 재차 물었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그 질문이 폐부를 뚫고 지나갔다. 그대가 구하려는, 그대가 살고 싶은 이 땅은 과연 모두를 위한 세상인가?
백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날 무심코 사용했던 단어들에 대해서 반성했다.
심지어 살인을 일삼는 패륜아를 두고 ‘인간 백정’이라 부르며 가슴 찢는 모멸을 주기도 합니다. -20쪽
그러니까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어느 인사를 떠올릴 때 같이 떠오른 단어는 '인간 백정'이었다. 미안하다. 잘못 사용했다. 그렇게 내뱉을 단어가 아니었다. 그런 대접 받을 당신들도 아니었다. 백정, 백정, 백정......
책은 정성을 담아 백정의 기원을 정성껏 밝힌다. 사료와 구전 정보까지 샅샅이 훑으며. 천 년도 더 전에 이 땅에 흘러 들어온 유목민들의 후예, 혹은 나라가 망했을 때 새 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버티던 이 땅의 후예들. 뿌리가 어디이든 그들은 가진 재주가 많아서 더 많이 착취당했던, 농경민과의 '다름'을 인정받지 못한 자유인들이었다.
항심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항상 잔잔하고 편안한 마음을 뜻한다. 항상 마음이 편안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일단 등 따습고 배불러야 한다. 등 따습고 배부르려면 또 어찌해야 하는가? 당연히 먹고살 재산이 있거나 밥벌이가 가능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평안할 수 있으니 이런 재산이나 직업을 ‘항산(恒産)’이라 했다. 곧 사람은 누구나 항산이 있어야 걱정 없이 배부르게 잘 살고, 그래야 잔잔하고 편안한 항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니 참된 군왕은 백성이 항상 항심을 가지도록 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함부로 방자하거나 치우치거나 사악하거나 사치스러워지지 않는다. 거기에 맹자가 말하는 인의 정치, 왕도 정치의 핵심이 있었다.
그런데 조준은 백정을 “항심이 없는 자들”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항심, 곧 항산이 없다는 것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생업이나 재산이 없다는 말이다. 백정들에게도 엄연히 사냥이나 도축, 고리 짜는 기술들이 있었지만 그저 천한 재주로 치부했을 뿐 제대로 된 생업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농사짓지 않는 백정은 나라 백성이 아니었다. 이 확고한 농본주의, 꿋꿋한 농경 중심 사회에서 백정들의 재주는 하릴없이 묻혔다. -62쪽
농본주의 조선에서 농사짓지 않는 백정들을 천시하고 학대했으면서 그들의 재주는 또 필요했다. 농사에 가장 필요한 소를 잡는 건 경을 칠 일이면서, 그 소를 잡기 위해선 백정이 필요하고, 그래놓고 소 잡았다고 백정을 핍박하고...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의 반복. 백정의 한이 쌓이고 또 쌓일 일이었다.
비단 지배층만 백정을 이용하고 학대한 것이 아니었다. 피지배계층도 자신보다 천한 신분의 백정을 손가락질하고 욕보이기 바빴다. 그렇게 나보다 낮은 누군가가 있어야만 내가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즘 무대 위에서 한참 관객의 흥을 돋우는 뮤지컬 '스웨그에이지:외쳐, 조선!'에서 순수는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노래한다.
내는 말이여
전라도에서 온 백정의 딸내미란 말이여
울 아부지 나가 말 한마디 잘못 혀서 뒤져 부렀어
그 날로 아갈통 싸물고 무술연마 거시기 해부렀어!
소원이 있는디 울 아부지 관이라도 짜달란 말여
그 소원 다함께 응원하며 한잔 하세! (얼쑤!)
노래는 흥겹지만 그 내용은 얼마나 슬픈가. 그랬다. 백정은 시집갈 때 남들 다 입는 그 화려한 옷도 치장도 할 수 없었고 신랑 역시 말을 탈 수 없었다. 흔한 비녀 하나 꽂을 수 없었고 죽어서 관에 눕지도 못하고 거적데기에 싸여 나간 게 백정이었다.
백정의 역사를 짚어본다는 건 그들이 학대받아왔던 눈물의 역사를 돌아보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숨 나오는 이야기만 등장한다면 책 보면서 우울에 빠질 일. 다행히 반전의 기미가 보인다. 백정 박성춘의 등장이 그것이었다. 아들만은 백정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예수교에서 운영하는 학당에 아이를 보내면서도 골깊은 불신 때문에 주일 예배는 보내지 않던 그가 콜레라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 봉주리에게서 박성춘의 발병 소식을 들은 무어 선교사는 무려 고종의 주치의를 동원해서 박성춘을 살려 냈다. 그러니까 백정의 병을 살피기 위해 임금의 주치의가 움직인 것이다. 이 조.선.에서 말이다.
기적처럼 살아난 박성춘이 새사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마음문도 활짝 열렸다. 이후 그는 만민운동회에서 대표 연설을 하는 인물로, 우리 역사책에 소개되는 한 사람이 되고 만다.
만민공동회는 우리나라 역사 최초로 열린 근대적인 민중 집회다. 제1회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 육의전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만여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공동회 대표는 쌀장수 현덕호가 맡았고, 연사들은 천을 파는 백목전 다락 위에 올라가 연설을 하였다. 마치 120여 년 뒤 종로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와 같았다.
더 놀랍게도 이틀뒤 곧바로 열린 제2회 만민공동회는 남촌 사는 평민들이 열었다. 독립협회의 지도 없이 백성들 스스로 연 것이다. 그리고 이틀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만 명 시민이 모였다.
서울 인구가 대략 17만 명이었던 당시 이 규모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리고 10월 29일 규모가 더욱 커져서 관까지 함께해 시작된 만민공동회는 그야말로 시민운동의 꽃이었다. 일반 배 백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부 관료와 대신들, 외교 사절들, 지식인과 학생, 승려와 상인들까지 그야말로 각계각층 온갖 사람들이 다 모였다. 특히 이때 고종 황제에게 국정 개혁을 건의하는 ‘헌의6조’를 결의하기로 했기에 공동회의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이 뜨거움 속에 첫 연설자가 단상에 올랐다. 숨 막히는 긴장과 기대 속에 나타나는 이는 다름 아닌 박성춘이었다. 조선 최초로 열린 이른바 대정부, 대국민 집회의 첫 연설자가 바로 ‘천민 중의 천민’ 박성춘이었던 것이다. 박성춘은 떨리면서도 옹골지게 첫마디를 떼었다. “저는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입니다”하고. -211쪽
박성춘의 아들 봉주리(박서양)는 제중원 1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된다. 와우, 백정의 아들이 조선 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이후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하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이 다 있을까. 그러고 보니 꽤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제중원'에서 박용우가 맡았던 역할이 봉주리가 아닐까??
박성춘의 이야기가 반갑게 들렸다면, 강상호의 이야기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백정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 그 형평운동의 산 증인 강상호.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서 평탄하게 양반입네 하고 살 수 있었던 그가 '새백정'이란 평판을 들으며 백정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해방에 일생을 바쳤다. 백정의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 양자를 만들고, 67번이나 되는 체포도 감내하였다. 정작 그는 재산을 다 잃고 굶주리며 살다가 세상을 떴지만, 그의 죽음 소식은 전국의 백정 출신들을 움직였다. 무려 9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에서 백정들은 기꺼이 상주가 되어 주었다. '일생'으로 인간 해방의 가치를 말한 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백정을 주제로 시작한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인간과 인간 해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형평운동의 대상에는 비단 백정뿐 아니라 백정을 잘못 생각하는 ‘일반 사회인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또한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평등, 불공평, 부조리함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당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38쪽
책을 덮으며 이 시리즈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본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시리즈. 더 나은 세상이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씩 발을 옮겨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책을 쓰고, 또 누군가는 책을 읽고, 그리고 또 주변을 돌아볼 테지. 선한 영향력을 주는 고마운 책이라고 생각했다. 책 날개에 보니 출간 예정에 '친일파와 반민특위, 나는 이렇게 본다'가 있다. 와우! 몹시 기대가 되는데 과연 언제 나올지...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 리뷰 쓰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리뷰 안 쓰고 산지 너무 오래 되어서 뭐라고 글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중요한 건 한걸음이니까. 일단 나는 등록 버튼을 누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