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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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

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

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

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


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지구의 시간.

해 지자 비가 내린다.

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

잠시 겹쳐진 우리는

잠시의 기억으로도 퍽 괜찮다.


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

이런 시간이 좋아.

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

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


있잖이, 몸이 사라지려 하니

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야.

알게 될 날이야.

축복해.


43쪽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느니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만과 무능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살아 있어라, 산 자들이 숙제를 다할 때까지.


98쪽

달걀 삶는 시간


(엄마는 반숙을 좋아한다) 냄비에 물을 채우고 달걀을 넣은 후 가스 불을 켠다 말갛게 쫄깃한 흰자 속의 노른자 목숨이 되려던 우주 (우리는 먹고 먹이고 먹힌다) 물이 끊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7분 반숙의 최적 기술은 시간을 맞추는 일


물이 팔팔 끓는 순간부터 시계를 본다 1분이 지난다 놀라며 흔들리는 2분이 지난다 견디는 3분이 지난다 2분 전의 그 달걀이 아니다 다른 우주 회오리친다 4분이 지난다 1분 전의 그 세계가 아니다 엉기기 시작한다 인생처럼 5분 6분 7분이 지난다 가스불을 끈다 매 분마다 죽음ㅇ르 통과해 매 분마다 달걀은 변한다 찬물에 집어넣는다 찬물 속에서 다시 5분


자주 내 이름을 잊는 팔순 엄마의 입속에 4등분한 달걀 반숙을 넣어드린다 (기억은 먹고 먹이고 먹힌다) 엄마가 웃는다 괜찮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변화해가는 것일 뿐이다 달걀도 엄마도 나도 정신도 마음도 존재한다면 신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힘껏 잘 변해보자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향해 엄마가 웃는다


147쪽


花飛, 먼 후일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그 나무 아래서

꽃잎을 묻어주는 너를 본다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너는 아름다울 것이다

네가 있는 풍경이 내가 살고 싶은 몸이니까


기운을 내라 그대여

만 평도 백 평도 단 한 뼘의 대지도 소속은 같다

삶이여

먼저 쓰는 묘비를 마저 써야지


잘 놀다 갔다

완전한 연소였다


160쪽


10억 광년의 신호가 내내 떠올랐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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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e 2017-08-03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그런생각을 했어요. 예전에 가끔 시를 올려주셨던 분이 계셨는데. 오랫동안 그분 서재에 가보지 못했구나 하구요. 그랬는데 마노아님이 올려주신 글을 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저 10억 광년의 신호 지금 들으려구요.

마노아 2017-08-05 23:45   좋아요 0 | URL
가끔은 시가 필요한 날이 있더라구요.
이렇게 지칠 만큼 더운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에어컨 빵빵한 카페에서는 시 한구절이 최고의 사치 같기도 했어요. ^^

2017-08-0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5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