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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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는 기사 중 하나가 '보복운전'이다. 최진기 씨는 도로 위에 서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빈부격차'가 운전자의 심리를 더 극단으로 몰아가게 한다고 진단한 바가 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차종의 차이에서 이미 모욕감을 받은 것일까? 그런 상대가 나를 제치고 가는 것에 욱하고, 나보다 못한 차를 모는 자가 '감히' 끼어들거나 하면 분노가 폭발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수치심을 느끼는 대한민국이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는데, 물질적인 부분에서만 노골적으로 비교하고 열등감을 갖는 것은 아닌지?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또 다른 모멸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68쪽


낮은 자존감이 유리멘탈을 불러오는 것일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이들이 식당에 가면 종업원에게 지나치게 불친절하게 군다는 것이다. 굉장히 까칠하게 군달까? 내 생각엔 문제 삼을 만큼 상대방이 불친절했던 것도 아닌데 자긴 너무 기분 나쁘다며 틱틱 댄다. 차라리 조목조목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다고 따지기라도 하면 낫겠는데 그러진 않으면서 자신의 불쾌함을 보란듯이 드러낸다. 같이 있는 내가 불편할 정도로. 내가 공통적으로 느낀 건 이들이 '돈 쓸 때' 그런다는 것이다. 평소 '을'로 살면서 느낀 부당함과 서러움을 돈 쓰면서 손님이 될 때 '갑' 행세를 한다고 느껴졌다. 이런 깨달음이 참 슬펐다. 


돈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 본질이 사악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돈은 인간에게 자유를 증진시켜주었다. 문명의 탄생과 함께 출현해 1,2세기 전까지 세계 곳곳에 존재하던 노예는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예를 대신해 임노동자들이 대거 도시에 등장했다. 노동자는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일을 할 뿐, 그 누구도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없다. 이런 변화는 돈이 사회의 지배 원리가 되면서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돈은 일정 정도의 진보성을 갖는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똑같은 대접을 받는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귀족들만 누릴 수 있던 호사를 이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다. -87쪽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바로 그 돈 때문에 빈곤해지고 구속을 받는다. 금융자본의 막강한 힘과 지식 정보 중심의 산업구조 재편, 그리고 비민주적인 국가정책과 경제 시스템 속에서 빈부의 격차는 계속 벌어진다. 게다가 시장 원리가 사회질서를 대체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이 상품화된다. 이제 돈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돈 벌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공급과잉과 노동의 종말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밥벌이를 하려면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87쪽


우리는 남들을 열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한다. 자기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과의 선 긋기를 통해 스스로의 잘남을 확인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절대적인 기준이다. 경제의 수단으로 고안된 돈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삶 자체가 수단이 되어버린다. 사용설명서specification의 약자인 ‘스펙’이 경력 및 자격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90쪽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단순히 불편한 것에서 그치던가? 


서울의 청계천이 그러했듯이,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개천이 매우 더러웠고 그 주변에서 하층민들이 애옥살이하고 있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비유는 그런 구체적인 공간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표현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은연중에 가난을 더러움으로 직결시키는 고정관념이 지속되기 마련이다. 경제적인 궁핍이 단순한 결핍이나 불편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저열함으로 등식화되는 것이다. -170쪽


 자주 쓰는 표현인데 저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저자의 지적이 맞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서도 이젠 개천에서 아예 용이 나오질 않고 있다. 속담 자체를 수정해야 할 판이다.


타인의 시선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상처와 아픔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것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마음의 습관은 상대방을 그 굴레에 가두어둔다. 그의 모든 성격과 행동을 트라우마와 결부시키면서 비정상의 부류에 묶어버린다. 그 결과 연민의 눈길은 수치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는 자는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일종의 권력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197쪽


 자각을 하든 못하든 저런 우를 범하기 쉽다.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같은 선상에서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도 이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차태현과 자신을 좋아하는 김수현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공효진에게 막내 작가가 조언을 한다. 더 미안한 쪽을 버리라고. 동정으로는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다. 그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연인사이뿐 아니라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해서 노숙자를 찾은 얼 쇼리스 씨의 이 대목은 감동 그 자체다.


온갖 고통을 모질게 겪어왔고 하루하루 생계가 막막한 이들에게 안부나 위로 대신 다짜고짜 시를 좋아하느냐는 질문, 그것은 그분들의 삶에 대한 깊은 경외감과 신뢰가 없이는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여성 노숙인과 미국의 남성 지식인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존재 조건에서 너무나 차이가 크다. 그런데 얼 쇼리스 씨는 그 거리를 뛰어넘어 시詩라는 ‘섬’을 찾으려 했다. 빵의 문제로 허덕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장미 한 송이에 대한 소망을 클릭해주었다. -257쪽


쉽게 모멸감을 주고 쉽게 모멸감을 느끼는 사회를 살고 있다. 급격하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급격하게 받아들인 민주주의는 성장속도를 맞추지 못했다. 저자의 지적대로 '역지사지'를 뛰어넘어 '역지감지'가 필요한 때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나자신이 먼저 건강한 멘탈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은 4월에 읽었는데 그 무렵에 나에게 '갑질'을 한 누군가로 인해 큰 모멸감을 느꼈더랬다.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썼지만 며칠간 분노가 일었고, 그 후로는 상대방을 볼 때마다 그 감정이 되살아나서 마음이 활활 타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대로 사과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몇 번에 걸쳐서 자신이 사실은 아픈 상태라는 것을 거듭 말하는 것을 보며 미움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타인 위에 군림하지 않고 위엄을 누릴 수 있을까.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기품은 어디에서 우러나올까. 품격은 겉멋이 아니다. 예절은 단순한 고분고분함을 넘어선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품에서 격조 있는 삶이 가능하다. 높은 것에 사로잡혀 삶을 창조하기에 자기를 돌볼 줄 안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며 스스로 채워진 마음이 타인에게 스며들기에 품위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위엄과 기품이 사회적 풍토로 자리 잡을 때, 모멸감의 악순환도 줄어든다. 그 길은 자존의 각성과 결단에서 열린다. -307쪽


모멸감의 악순환을 낳는 것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분명히 있지만 개인도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앞서 제시한 사례처럼 식당 같은 곳에서 '손님은 왕이다'라는 생각은 제발 하지 말기를. 난 언니의 가게에서 8년 동안 일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자영업의 고단함이 너무 크게 공감이 간다. 불친절한 사장이나 종업원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당신이 불친절한 손님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안 그래도 피곤한 세상에서 제발 갑질들 하지 맙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음반이 같이 들어 있다. 책의 주제에 맞게 '힐링'용 명상음악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런 뻔함을 깨버린 것도 참 신선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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