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카하라는 20여 년 전 가택에 침입한 강도에게 딸을 잃었다.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혼율은 급격히 높아진다고 했다. 서로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아이를 잃은 원망이, 죄의식이 부부 사이를 금가게 한다고 했다.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나카하라도 그렇게 아내와 헤어졌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는데 이번엔 전처의 살해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러 온 형사에게서 들은 소식이다. 세상에나...


뜻밖에도 전처를 살해한 사람은 너무나 쉽게 자수했다. 범인은 바로 수감되었지만 나카하라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두번씩이나 유족이 되어버린 이 상황. 가해자를 잡지 못한 것보다는 잡힌 것이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면수심의 가해자와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더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딸 아이를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부부가 그토록 매달리면서 간절히 바래왔던 일이지만, 그 일이 성사되었다고 해서 죽은 딸아이가 살아돌아오지도 못하고, 부부 사이에 흐르던 불편함 감정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카하라는 부인과 헤어지고 난 뒤 직업도 바꾸고 이 사건을 잊기 위해서 애를 썼다. 하지만 부인은 달랐다. 사형이 감형으로 바뀌곤 하는 형벌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유가족이 겪는 고통을 전달하고 제도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녀 역시 한계점을 알고 있었다.



사형은 무력하다는 변호사의 단언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온전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는가? 저런 인간들을 위해서도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 그건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이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할지라도, 그 빈 십자가라도 지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가해자는 진정 감옥 안에서라도 공허한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인지 재차 묻게 된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그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를 잔뜩 지고 고통에 짓눌려 살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했던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형제는 폐지되는 게 이성적으로는 맞다고 생각해왔다. 혹여라도 있을 억울한 죽음이 있을까 봐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게 사형 판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100번을 더 살펴보아도 죄가 확실하다면, 그때는 사형을 시켜도 되는 것일까, 다시 묻게 된다. 범죄는 더 잔인해지고 악랄해지고 끔찍해지는데, 교정효과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폐지해야 마땅한가? 잘 모르겠다. 사형보다 더 큰 벌을 내릴 수 있다면, 그런 게 있다면 제발 그들의 어깨에 지워주고 싶다. 


1989년도에 이모는 강도를 만나 살해당했다. 범인은 연쇄살인범이었고, 잡혔을 때 첫 심경 고백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기록을 갈아치우지 못한 게 아깝다고 했다. 충격을 받으신 외할아버지가 몇 달 뒤 돌아가셨다. 이모부는 몇 해 뒤 췌장암에 걸려 돌아가셨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다가 큰아버지 댁으로 동시에 입양되었다. 파란만장한 가족사다. 그때 잡혔던 범인은 몇 해 뒤 사형당했다. 놈이 목표로 삼았던 화성의 기록은 이미 갈아치워진지 또 몇 년이 지났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범죄로 인한 그늘 그 이상의 그늘을 종종 지적하곤 한다. 미성년자라는 무기를 내세워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 따위 갖지 않는 청소년들을 그려낸 '방황하는 칼날'도 겹쳐 보였다. 나아가 영화 '밀양'도 떠오른다. 아이를 유괴해서 살해한 남자를 용서하려고 했던 어미가 신께 이미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 가해자로 인해 영혼까지 바스라지던 모습이......


살인자를 변호하던 변호사의 지적처럼 사형은 무력할 수 있다. 가해자들은 감옥 안에서 공허한 십자가만 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빈 껍데기에 불과한 십자가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지워야 한다. 그것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0.0001%라고 할지라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은 자만 가여울 때가 많다. 고 성완종 씨는 자신의 죽음으로 일련의 억울함을 풀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았다. 고 장자연 씨는 어떠했던가. 대한민국의 권력을 가진 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게 뻔하므로 포기해야 하는가? 같이 망가져야 하는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 한발자국을 앞으로 내딛을 수가 있다. 이 공허한 십자가가 제 무게를 가질 수 있도록, 마땅히 짊어져야 할 사람이 짊어지도록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야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이야 익히 아는 바지만,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이 정도의 완성도로 이 정도의 속도로 책을 낸다는 건 더 충격적이지만! 두 건의 죽음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먼저 밝히고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에는 그 죽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진짜 죽음의 이유, 진짜 사연들이 담겨 있다. 믿고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이니 추천도 주저하지 않겠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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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0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리뷰...정성 잘 읽었어요...

마노아 2015-05-01 08:4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유레카님 ^^

에이바 2015-05-0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요. 꼭 읽어 보겠습니다. 생각할 여지가 많네요. 좋은 리뷰 감사해요.

마노아 2015-05-06 08:26   좋아요 0 | URL
어이쿠, 댓글 빼먹은 걸 방금 알았네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을 함에도 함량이 떨어지지 않는 작가 같아요. 적극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