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 곽재구의 달빛으로 읽은 시
곽재구 엮음, 지성배 사진 / 이가서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곽재구 시인이 엮은 시 모음집이다. 무려 '달빛으로' 읽은 시라니, 달밤에 읽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일지 않는가.


네모난 삼각형


_ 김 중

 

어머니 뱃속에서 나는 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놀았다

아픈 그 여자, 숨어서 울 때마다 비가 왔다

그럼 나도 종이로 우산을 접고 따라서 우는 척했다

그 여자 뱃속은 늘 김이 서린 목욕탕의 거울

어느 날은 거기 네모난 삼각형을 하나 그렸다

삼각형인데 각이 네 개나 되지

대각선도 그을 수 있었다

어수룩한 천사들을 붙들고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기억에, 태어나던 날 도립병원에는 큰 불이 났고

불 그림자 일렁거리며, 난

이 시상한 세상을 향해 힘껏 팔을 뻗었던 것이다

白衣의 바보들은 놀라 주춤 물러섰지만

그 여자, 젖은 나를 꼭 껴안으며

네모난 삼각형을 그려 보이고 기절했다, 오오!

어머니가 삼십 년을 습작하여 발표한 최초의 詩集

그게 바로 나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이다 -57쪽


어머니가 삼십 년을 습작하여 발표한 최초의 시집이 나라는 고백! 어머니라는 창조주가 빚어낸 예술품이 나라는 황홀한 인정! 


지하철에서 1

 

최영미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98쪽


자극적이고 처연한 표현이다. 발끈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서럽기도 한......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올릴 때

 

고정희

 

하루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 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 연기 하늘에 느돞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 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102쪽


고된 노동과, 따뜻한 국수 한 사발이 한 폭으로 겹친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이 떠올랐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노동과 식사, 신성한 두 가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곤 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한줌 따스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책꽂이를 치우며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 앞에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오는 것을 -109쪽

 

간서치 이덕무가 벗들과 함께 아끼던 경서를 팔아서 술 한잔 마셨던 대목이 떠올랐다.

지금도 이고 지고 꾸역꾸역 쟁여두고 사는 이 많은 책들, 다 치우고 빈 벽에서 자유를 좀 느껴보고 싶을 때도, 솔직히 있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126쪽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과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 목울대를 뜨겁게 만든다.

먹는 것은 신성하고, 그 먹거리를 위해 몸에 새겨온 노동의 흔적이 계속 내 마음을 두드린다.


고요

 

이원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거리는 시간이 있다 -171쪽


다시금 읽어보자니, 어째서 이승우가 떠오르는 것일까? 어째서......



시인은 좋은 시를 골라 읽고, 거기에서 따라오는 감흥을 같이 적었다. 어떤 것들은 시인의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어떤 것들은 곽재구 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만 느껴져서 공감이 안 되기도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좋은 시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또 좋은 사진을 같이 만나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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