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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4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정수 ㅣ 미생 4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미생 드라마에 꽂히게 된 건 우연이었다. 언니가 열심히 시청하고 있었지만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계속 못 보고 있다가, 내가 애정하는 82쿡 게시판에 "어제 김희원 연기가 갑이지 않았어요?"란 글이 있는 거다.
그런데 마침 언니 방에 갔다가 김희원 나오는 부분을 재방송으로 보고 있는 언니를 발견했다. 그 장면에서 김희원은 여자가 타주는 커피가 제맛이라며, 커피 타주는 여직원 다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잘 빠졌다~라고 희롱을 던지며 자동차 카달로그 보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 재수 똥!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연기'로만 따지면 너무 리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는 영화 '카트'에서 알바생 임금 떼먹으려고 수작부리던 재수 없는 편의점 주인을 연상시켰다. 그 인물이 바로 파란을 일으킨 4권의 주인공이다.
제목에 소제목으로 '정수'라고 붙었는데 표지만 봤을 때는 그게 등장 인물 이름인 줄 알았다. 기풍, 정수.. 모두 이름처럼 들렸다. 그런데 책날개 안쪽을 보니 바둑 용어라고 설명이 붙어 있다. '정수'란 바둑에서 속임수나 홀림수를 쓰지 않고 정당하게 두는 기술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서라면 오과장같은 인물이 정수에 해당하겠고 그 반대편에 박과장이 있다.
내부고발자가 되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올바른 일을 해내고도 욕을 먹기 일쑤고 사필귀정이 되지 않는 걸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이번에도 영업3팀은 황금호흡, 드림팀임을 증명해 냈지만 내상이 있을 것 같다. 여긴 대한민국이니까.
바둑 덕분인지, 성정이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장그래는 무척 직관이 날카롭다. 그의 비상한 머리가 순간순간 번뜩이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줄 때가 많다. 이렇게 빛나는 인물이 끝내 정규직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결말을 미리 일고 지켜보는 건 참으로 착잡하다. 헛된 기대감은 줄일 수 있지만...
학력운운하는 게 얼마나 천박한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력의 벽을 쉬이 넘지 못하는 사람이 천지다. 문득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랐다. 김대중 대통령보다 훨씬, 훨씬 더 우습게 보였던 것은 그가 고졸 출신 인사여서가 컸을 것이다.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장그래를 보니 한숨이 나와서 같이 떠올랐다. 뭐, 고졸 아니라 대졸, 석사, 박사 출신 실업자, 비정규직도 쎄고 쎈 이곳 대한민국이지만...
즐겁게 기대하며 보고 있는데 그 끝은 이렇게 쓰기만 하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잔인할 텐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