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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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이 소설의 시작이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고, 세실리아의 오빠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세실리아는 아침부터 심경이 불편했다. 로비와 자꾸 부딪혔기 때문이다. 가정부의 아들인 로비는 캠브리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아버지는 로비가 의대에 진학할 수 있게 6년 동안 학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캠브리지에서 몇 년 간 공부했지만 형편없는 점수를 받고 돌아온 세실리아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그렇지만 세실리아가 로비를 불편하게 여겼던 것은 성적 차이에서 오는 자격지심 따위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감정을 깨닫지 못했지만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엇갈리고 부딪히고 소모적인 감정 싸움을 했다. 사과 편지를 쓰려던 로비는 세실리아를 마음 깊이 원하던 자신의 속내-굉장히 원색적인 표현-가 들어간 편지를 잘못 보내고 만다. 문제는 편지를 전달해준 게 세실리아의 열살 어린 여동생 브리오니였는데, 열세살 소녀가 이 편지를 몰래 봤다는 게 사건을 더 키웠다. 이 날 분수대에서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갈등 장면, 이어서 편지, 마지막으로 서재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목격했던 브리오니는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오해하고 말았다.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궁금증은 또다른 궁금증을 낳았다. 다른 사람들도 정말 그녀처럼 살아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세실리아 언니는 브리오니가 그렇듯이 자기 자신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일까? 세실리아 언니가 된다는 것은 브리오니가 되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경험일까? 언니도 부서지는 파도 뒤에 진짜 자기를 숨기고 있을까? 그리고 손가락을 얼굴 가까이 대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을까? 아버지나 베티, 하드만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일까? 그렇다면, 20억 명의 사람들이 20억 개의 목소리와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20억 개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실 어느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브리오니는 겉으로는 대단히 지적이고 유쾌하지만 속으로는 그녀처럼 명민하고 은밀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기계들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불길하고 외로운 일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럴 가능성도 희박했다. 질서정연함을 좋아하는 그녀의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그녀처럼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61쪽


상상력이 풍부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브리오니. 이날도 자신이 완성한 희곡으로 오빠를 환영하는 선물로 연극을 올리려고 했던 브리오니는 자신이 상상한 그대로, 그리고 믿고 싶은 그대로 로비를 오해하고 말았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아 버렸다. 한 사람, 아니 로비와 그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함께 파멸로 인도하는 참극이 되어버린 것이다. 로비는 억울한 누명, 그것도 강간범이라는 아주 치욕적인 죄명으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불우한 환경이었지만 빼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탄탄한 앞날이 열려 있던 한 청년의 인생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는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으므로 더 나은 의사가 될 수 있으리라, 방대하고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 병을 부르는 자기 파괴적인 어리석음이나 불운을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의사가 될 것이다.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겪게 되는 질병과 노화, 번영과 퇴락. 이것은 의학의 관심사이자 문학-예를 들어 19세기 소설-의 관심사였다. 넓은 아량과 앞을 바라보는 혜안,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의사 로비 터너는 운명의 기구한 장난과,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해보려는 인간의 헛되고 터무니없는 발버둥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희미해진 맥박을 짚고, 꺼져가는 숨소리를 들으며, 따뜻하던 손이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문학과 종교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인간의 하찮음과 숭고함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136쪽


그 자신이 예상했던 것처럼, 이 비극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보다 좋은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읽은 문학작품들이, 그의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이 그를 좀 더 인간적인 의사로 만들었을 거라고 부질없는 짐작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예상되었던 모든 미래는 다 날라갔다. 미래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고, 이 책의 거의 정확하게 절반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제 시간은 5년을 뛰어넘어 1940년으로 향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감옥에 갇혀 있던 로비는 징집되어 전선에서 날마다 사선을 오고 갔다. 안 그래도 황폐해진 그의 심신은 전쟁으로 더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제정신이라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그가 앞을 막고 길을 건너가자 차 안에 있던 운전사가 경적을 울려댔다. 날카로운 경적 소리에 깜짝 놀란 로비는 순간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 참는 건 이제 충분해! 그는 몸을 돌려 운전석 옆으로 가서는 차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 왼손으로 그 남자의 멱살을 잡은 로비가 오른쪽 주먹으로 그 얼간이 같은 얼굴을 치려는 순간, 다른 억센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사람은 적이 아니야, 대장.”

메이스 상병이 그의 손목을 잡아 차에서 떼어냈다. -307쪽


작은 불씨 하나만으로도 화르륵 불이 붙는 심리 상태가 되었다. 억울함이 가득한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선 얼마든지 이기적인 사람이 되겠노라고 자신을 담금질하는 로비였다. 


군화를 벗자 발을 짓누르던 무게는 사라지고, 황홀한 편안함이 무릎을 타고 올라왔으므로 네틀이 뭐라고 해도 오늘밤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몇날 며칠을 걸어서인지 바닥에 앉아서도 걷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 앉아 있지만 갑자기 다리가 기울어지고 헛발질을 하게 되었다. 이제 다른 군인들에게 들켜서 뺏기는 일 없이 음식을 먹는 게 문제였다. 살아남으려면 이기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었고, 마음도 텅 비어 있었다. -366쪽


그러나 그런 마음에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전쟁이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이건만, 도처에 널려 있는 시신을 접할 때마다 로비의 마음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한다. 이럴 때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고 버틸 힘이 되어주는 것은 세실리아의 존재였다. 지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세실리아. 


너는 항상 내 생각 속에 있어. 사랑해. 기다릴게. 돌아와. -301쪽


돌아오라는 이 말은 이 책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영화에서도 come back이라는 말이 자꾸 반복되어 나온다. 로비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혼미한 정신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잡고 있는 중심줄이기도 하다. 


2부는 전쟁터에 가 있는 로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두 사람이 나눈 편지를 통해서, 로비의 기억과 마음 속에서 재생된다. 오년 전의 사건 이후 세실리아는 가족과 의절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로비는 그런 세실리아가 안타깝다. 자신과의 은원이 남아 있지만 자기에게 아무 빚도 없는 세실리아가 가족과 완전히 등지고 사는 것은 원치 않는다. 로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 착한 사람이 터무니없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더 억울한 게 이 책의 단점이다. 그렇다면 로비와 세실리아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3부로 가보자. 


이제 열 여덟살이 되어버린 브리오니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캠브리지로 가기로 되어 있던 브리오니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이 언니의 뒤를 따라 수련 간호사가 되었다. 이제라도 다시 잘못을 바로잡고 싶지만 언니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다. 전쟁 중의 병원이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공간. 이제 수련간호사에 불과한 브리오니는 끔찍한 피로와 싸우면서도 몸이 힘든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상념에 젖을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은 온통 괴로움과 번민, 그리고 후회로 덮일 테니까.


그녀는 구속과 규칙, 복종과 잡일, 그리고 비난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이 전부인 삶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수련 간호사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고-이삼 개월마다 신입 수련 간호사들이 들어왔다-명찰에 새겨진 이름 외에 다른 자아란 없었다. 이곳에는 개인지도도 없었고, 지적 계발을 위해 밤잠을 설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호나자용 변기를 비운 다음 물로 씻어내고, 병실 바닥을 쓸고 윤을 내고, 코코아와 쇠고기 수프를 만들고,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가져오는 심부름을 하면서 자기 반성에서 해방되었다. (...) 그녀는 다른 일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늦은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창가에 서서 불이 꺼진 도시와 강을 바라볼 때면 병실뿐만 아니라 저 밖의 거리에도 퍼져 있는, 마치 어둠 같은 불안을 기억해냈다. 피곤한 일과나 드러먼드 수간호사조차 그녀를 불안으로부터 보호해줄 수는 없을 듯했다. -386쪽


브리오니의 잘못은 명백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을 참이라고 확신했고, 확신이 흔들릴 때조차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스스로 정한 '의로움'과 '정의'가 그녀를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었다. 이후 평생에 걸쳐서 속죄하려고 한 그녀의 행보를 볼 때 그녀는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악'이 아니어도 '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은 그런 그녀의 죄를 더 진하게 채색하고 말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떨어진 더 큰 비극이었다.


로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실리아와 로비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면...... 그녀만의 비밀스런 고통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항상 서로 다른 세계의 일처럼 보였는데, 전쟁이 그녀의 범죄를 얼마나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과거를 되돌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브리오니는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갖고 싶었고,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403쪽


그녀가 어떻게 자신이 다른 사람을 로비로 착각했는지 소설에서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그녀가 보았던 인물의 얼굴이 뒤늦게 떠오른 것으로 표현된다. 소설을 읽을 때 내가 짐작했던 사람이 범인이 아니어서 다소 김이 샜는데, 나중에 내가 지목했던 사람이 진범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약간 시원했다. 그 역할을 영화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비치가 맡았다. 이 때는 셜록으로 스타가 되기 전이었는데 이 소설이, 그리고 이 영화가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3부부터는 온전히 브리오니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1부가 가장 지루하게 전개됐고, 2부는 전쟁터의 로비의 시점이어서 안쓰러움을 갖게 했다면 3부는 참회의 마음으로 가득찬 브리오니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여러모로 연민을 갖게 했다. 그녀가 마침내 언니를 찾아가고, 거기서 감히 짐작하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못한 인물을 만났을 때, 마침내 속죄의 시간이 다가오는가 기대도 갖게 되고 응원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3부 막바지의 단 두줄은 이제껏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기원하며 따라온 독자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무려 59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뛰어버린 사인 하나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이 작품의 최대 반전. 세상에, 이게 이언 매큐언이구나!


부커상에 빛나는 이언 매큐언 최고의 걸작이라는 수사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간은 새벽 세시. 나는 팔에 잔뜩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천천히 문장들을 씹었다. 아련하고, 아프고, 안타까운 감정과 감탄이 모두 함께 터져나왔다. 이 작품은 2003년 작인데, 언뜻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떠올랐고,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도 같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 작품 뭐더라? 두 가지 결말을 내리고 그 둘을 모두 따라가라고 하는 식은 늘 별로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완벽했다.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소설 곳곳의 장치들이 떠오르면서 이 영리한 작가의 완벽한 덫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지만 기꺼이 잡히고 싶은 덫이었다. 


브리오니가 마지막에 베풀었던 그 친절은 사실 세실리아와의 기억에서 온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악몽에서 깨어날 때 돌아오라고 말해주던 다정한 세실리아. 다정한 그 언니가 얼마나 그리울까. 그녀의 행복을 앗아간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제일 잘못한 것은 브리오니가 맞지만, 더 미운 것은 롤라와 그녀의 남편이다. 한명은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되었고, 또 한명은 가해자에서 공범자가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려놓고도 잘 먹고 잘 살고, 게다가 장수까지 하는 그들.... 아, 소설 속으로 들어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갖게 했다. 비단 그게, 소설 속만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500쪽이 훌쩍 넘는 이야기를 두시간 짜리 영화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원작이 훌륭하기 때문에 그걸 영화로 옮겨서 더 낫기는커녕 동급으로 만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원작보다 꽤 아쉬웠던 영화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거라고 정리해본다. 내가 생각한 로비의 이미지와 제임스 맥어보이는 아주 안 어울리지만, 세실리아 역에 키이라 나이틀리는 맞춤 배역이었다. 고집 세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 그녀의 얼굴에 있다. 


브리오니는 그 넘치는 상상력과 작가적 오만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지만, 바로 그 재능을 통해 속죄의 길을 걸었다. 이 역시 역설적인 운명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쪽


시간이 걸려도 속죄할 수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면 다행일 테지만, 시간이 늘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런 기회가 반드시 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타이밍을 잡아야만 한다. 애초에 이런 참혹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게 더 중요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잘못으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면, 나도 모르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휘둘렀다면, 제발 더 늦기 전에,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속죄하기를.... 그 사람과 당신,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당신의 인생뿐 아니라 역사라는 큰 그림 안에서도......

그리워할 집도 없는데 그리움이 일었다. 언니를 떠나는 것이 슬펐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언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비와 함께 있는 언니였다. 그들의 사랑이었다.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490쪽

(역자 후기)
누가 내게 『속죄』의 주제를 묻는다면, ‘폭력’이라고 말하겠다. 『속죄』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폭력, 다른 이의 말에 귀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눈과 판단만 믿는 오만함이라는 폭력,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휘두르는 폭력까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자기가 본 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세상을 재구성하려는 브리오니의 상상력은 두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
이언 매큐언은 9.l11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직후 『가디언』지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 도덕성의 시작이다.” 세상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상상력과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주는 상상력....... 그 경계는 어디인가. 이언 매큐언은 참으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시하는 작가이다. -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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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8-1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죄, 저도 읽었던 책인데요 님의 리뷰를 보니까 제가 이 책을 과연 읽었던가 싶네요. 의미를 놓친 부분이 많다는 게 그 첫째고, 둘째로 이 책을 매개로 이토록 깊은 사유가 가능하다는 게 존경스러워서입니다...

마노아 2014-08-19 11:38   좋아요 0 | URL
어이쿠 마태우스님! 왜 이리 과찮을 하십니까. 몸둘 바를 모르게요.(>_<)
이언 매큐언 정말 대단해요. 어제 이언 매큐언 책을 하나 더 구입했어요. 지금 오고 있어요. 기대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