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트의 골짜기 - 소설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소설 열두 편을 묶어낸 선집이다. 그간 고종석의 단편 '제 망매가'와 '엘리야의 제야'가 절판인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글을 몇 차례 보았던지라 그의 글빨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읽어보고 난 뒤, 확실히 그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꼭 매력적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제는 영화 '군도'를 보았다. 감독의 기본 내공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괜찮은 배우가 여럿 출연하니 당연히 기대를 갖는 게 자연스러웠다. 또 좋아하는 사극 영화니 더더욱 기대감이 있었는데 먼저 보고 온 언니가 별로라고 해서 한풀 기대치를 꺾고 보았음에도 나 역시 그냥 그랬다. 본 걸 후회하진 않지만 기대에는 못 미쳤다. 굳이 따지자면, 아주 못 만든 건 아닌데 '매력'이 없었다. 이 괜찮은 배우들로 이 만큼밖에 못 만들다니.


어쩌면 그건 취향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단편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긴 호흡으로 큰원을 그리면서 하나로 수렴되어지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를 키워서 절정을 맞이하고 마침내 결말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원하는데, 단편소설은 그런 그림을 그리기에는 호흡이 너무 짧으니까. 


이 책의 여러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고종석이 확실히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구나.... 라는 것과,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된 면(사실 이건 그의 트위터 글을 줄곧 보다가 극도로 피곤함이 몰려와서 결국은 언팔하게 된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이 있구나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근친의 뉘앙스를 꽤 풍겼는데 이건 의도된 것인가? 직전에 읽은 '해피 패밀리'와 겹쳐서 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고전소설이나 혹은 고전 시가의 제목을 가져와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덮은 것은 꽤 신선했다. 특히 '찬 기 파랑'이 그랬다. 홍세화 씨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두편 있었는데 두분이 어떤 친분이 있나?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거나 혹은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데 본인의 경력에 기반한 것일 테지? 


깔끔한 문장이 돋보였지만 크게 가슴에 남지는 않았고 그간 절판되었던 책들을 드디어 만났다는 반가움도 그리 크지 않았다. 나하고는 그다지 궁합이 좋지 않다. 

언어라는 건 권력인 것 같아. 아니 억압인 것 같아. 무지막지한 억압. 예컨대 타자기로 글씰 쓰다가 ‘사랑’이란 말을 ‘사렁’이라고 오타를 냈대봐. 종이 위에 찍힌 그 ‘사렁’이라는 말을 그리도 촌스럽고 낯설게 만드는 게 결국 말이 가진 억압의 힘 아냐. 말의 그 전제주의, 표준어의 그 전제주의 말이야. 자기와 다른 걸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릇된 것으로 판정해 매정하게 배제해버리는 그 완고한 전제주의 말이야. ‘사랑’이란 말의 어감이 ‘사렁’이란 말의 어감보다 꼭 그 자체로서 더 사랑다운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사렁’이라는 말은 전혀 ‘사랑’의 감정을 환기시키지 못하잖아. 정말 끔찍한 독재자야, 말은. 물론 그 독재력의 원천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힘이나 귀함 때문이겠지만. -36쪽

그날만은 아니었다. 골수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러니까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한 뒤로 줄곧 그 아이는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썼고, 그럼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45쪽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은 표정이 다르다. 묘하게도 일본 사람들의 표정은 뭔가 어둡고 비장한 데 견주어 조선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낙천적이다. 그 거꾸로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영국인과 에이레인의 표정에 대한 내 관찰과도 일치한다. 그런 낙관주의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된 건지, 아니면 나라를 잃은 아픔을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낙관적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과는 무관한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프랑스인들이나 심지어 앵글로·색슨계 미국인들의 표정도 영국인들의 표정에 비하면 대체로 밝고 낙천적이니까. 그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든. 내가 에이레 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듯이 나는 조선 사람들을 금방 좋아하게 돼버렸다.
-270쪽

그는 전 스페인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가 이 자유의 투사들에게 올린 감사의 말에 대한 답사를 옛 전우들을 대표해서 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은, 비록 의례적인 말일지라도, 겸손과 연대로 무르익은 어떤 정신의 경지로서 기록해둘 만하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입니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들은 파시즘과 싸울 기회를 얻었고, 참다운 국제주의를 배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들 가운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옛 전우들과 스페인 사람들을 눈물범벅으로 만든 기 파랑의 그 답사는 그가 오십팔 년 전에 피에르 맹데스-프랑스에게 한 말을 다시 연상시킨다. "모든 정치가 더러운 것은 아니다. 모든 행동이 헛된 것은 아니다."
-308쪽

뒷자리의 아이에게 뭔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어 주머니를 뒤저보았지만,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24시간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나는 민우에게 그 앞에 차를 잠시 세우도록 부탁한 뒤 초콜릿을 한 상자 사다가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한국어로 고맙다고 말하며 수줍게, 환히 웃었다. 민우도 뒤질세라 콘솔 박스를 뒤지더니 오르골 하나를 꺼냈다. 민우가 태엽을 돌리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을 받아든 아이는 다시 한 번 환히 웃었다. 아이는 주머니를 뒤져 땅콩 한 줌씩을 민우와 나에게 내밀었다. 우리도 환한 웃음으로 그것을 받으며 아이에게 사의를 표했다. 차는 다시 출발했고 뒷자리에서는 오르골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계속 흘러 나왔다. 오늘 밤 이 캐럴은 온 누리에서 수백 개의 언어로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네팔에도 그 나라 말로 이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있을지 모른다. 한 움큼의 허우룩함 속에서 그들의 초라한 집 앞에 세 식구를 내려주었을 때 시각은 자정이 넘어 있었다. 구세주가 오신 날이었다.
-41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14-07-27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고종석에게서 근친의 혐의를 몇번 느꼈어요. 해피패밀리 말고도 제망매인가 거기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저는 저희 자매님들과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아 공감은 안갔답니다. 그나저나 저는 원래 사극을 안좋아해서, 역린도 안보고 민란도 안봤어요. 그러면서도 광해같은 영화는 봤단 말이죠. 아무튼 사극을 피하는 제 선택이 이번엔 연속으로 맞은 것 같네요

마노아 2014-07-27 16:17   좋아요 0 | URL
이 책 안에 제 망매가 있는데 그거 포함해서 둘인가 셋인가에서 근친 내용이 좀 있더라구요. 의도한 것인가 싶어 궁금해졌어요.
역린은 평가보다 재밌었는데 너무 폄하된 느낌이 있고요. 광해는 만들어진 폼새보다 더 과장되게 평가받은 것 같지만 그래도 충분히 수긍이 가요. 군도는 강동원 헌정 영화였어요. 여자들은 비명을 지를만큼 멋진 강동원을 보고 올 수 있지만 그게 다였거든요. 이제 저는 '명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