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 식탁 위에 바나나를 산더미만큼 쌓아놓고 콧소리를 내가며 신나게 먹는다. 사람인지 배고픈 고릴라인지 알 수 없는 진풍경이다.
“태연아, 그러다 진짜 원숭이 되겠다. 그만 좀 먹어!”
“아빠는 지금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그 유명한
바나나 다이어트를 위해 억지로 먹는 거라고요. 호호호, 지금 저의 웃음은 깊은 고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해탈의 웃음인 것이죠.”
“바나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열량이 높은 생과일 중 하나야! 100g당 무려 93kcal, 토마토의 3배가 넘는다고.
또 100g당 탄수화물은 24.1g로 파인애플의 4배가 넘어요. 대신 지방이 적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을 쉽게 느낄 수
있어서 다른 음식을 적게 먹으니까 살이 빠진다는 건데…. 그런데 넌, 정말 너무 먹잖아! 고기를 먹어야만 살찌는 게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도 풀만 먹는다고!!”
“정말요? 저는 바나나를 먹을수록 살이 빠지는 줄 알았잖아요. 좋아하는 바나나도 엄청 먹고
살도 빼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는데, 힝~ 완전 망했어요. 어쩐지 점점 코끼리 몸매가 된다 했더니.”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지금
먹을 수 있을 때 실컷 먹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구나. 바나나 값이 크게 오르거나, 아니면 바나나가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니 말이야.”
“아빠…, 그… 그런…, 무서운 얘긴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맛있는 바나나가 사라진다니요. 12년 평생 그렇게
무서운 말은 처음 들어봐요.”
“슬픈 얘기지만 사실이란다. 최근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바나나 불치병’, ‘바나나
암’이라고 불리는 ‘변종 파나마병(TR4)’이 중동과 아프리카의 바나나 농장으로 급격히 퍼져가고 있다고 발표했거든. TR4는 바나나
풀(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여러해살이 풀이다)의 뿌리가 곰팡이에 감염돼 서서히 말라죽는 병으로, 보통 2~3년이면 거대한 농장 전체를 고사
상태로 만들지.”
“난 또 뭐라고. 사람들이 참 뻥이 심해, 그죠? 아니 전염병 한두 번 겪어봐요? 조류 독감, 구제역 할 것
없이 허구한 날 전염병이 퍼진다고 해도 닭이나 돼지가 멸종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과학자들이 다 잘 알아서 할 텐데 뭘 그러세요. 휴~,
진짜 바나나 못 먹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런데 바나나는 좀 경우가 다르거든.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 한 가지 품종뿐이야. 씨를 뿌려서 재배하는 게 아니라 우수한 품질을 가진 바나나 풀의 뿌리나 줄기를 접붙여서 번식시켰기
때문에 유전자가 극도로 단순해졌지. 바나나 풀이 수만 개가 있다 해도 각기 다른 바나나가 아니라 모두 복제품이라는 거야.”
“그게 어때서요? 제일 좋은 품질의 바나나만 먹을 수 있으니까 좋잖아요.”
“잘 생각해봐. 세상에 딱 한 가지
유전자 조성을 가진 바나나만 있는데, 그 유전자 조성에 치명적인 질병이 생겨났어. 그럼 어떻게 될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염이 될 거고
차단도 쉽지 않을 거야. 실제로 캐번디시 이전에는 ‘그로미셜’이라는 한 종류가 바나나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파나마 병이
창궐해 멸종됐단다. 농장들은 다행히 파나마 병에 잘 견디는 캐번디시라는 품종을 개발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지. 그런데 캐번디시에 치명적인
TR4가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해 제2의 그로미셜 사태, 즉 바나나 멸종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 거란다.”
“진짜요? 그럼
빨리 제2의 캐번디시 품종을 개발해야죠!!”
“물론 그래야겠지. TR4는 한 번 발병하면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염병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유전자군을 찾는 것뿐이야. 그러나 그 전에 유전자 다양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단다. 자연
상태의 생명체는 여러 유전자들이 끊임없이 섞이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이가 일어나면서 풍부한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하게 돼있어. 그래서 질병이나
가뭄 같은 급격한 환경 변화가 발생하면, 그 변화에 취약한 유전자군은 죽고 이를 이겨낸 유전자 변이 개체들은 살아남아 종을 보존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뛰어난 품질의 동식물을 대량 생산하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점점 유전자군이 단순화되고 바나나 멸종 같은 극단적인
일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란다.”
“그러다 몽땅 멸종돼 버리면 난 뭘 먹고 살아요. 흑흑”
“실제로 1847년에 ‘아일랜드 대기근’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어. 아일랜드 전체 인구 800여만 명 가운데
200여만 명이 사망하고 200여만 명은 먹을 것을 찾아 해외로 이주한 일이었는데, 유전자 다양성을 무시한 인재(人災)로 유명한 사건이지.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지속적으로 감자를 품종개량해서 거의 동일한 유전자를 보유한(매우 낮은 수준의 유전자변이) 감자만을 생산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갑자기 감자 잎마름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가 출현해 모든 감자가 죽어버린 거야. 그래서 감자가 주식이던 아일랜드인들의 1/4이 굶어 죽는
참변이 발생한 거지. 그런데 그 이후로도 인간의 욕심은 점점 더 유전자 다양성을 축소시켰고, 지금은 감자, 바나나 같은 식물은 물론 가축들의
유전자도 극히 단순해져 버렸단다. 외부의 환경 변화에 저항할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뜻이지.”
“아빠, 진심으로
12년 평생 가장 슬픈 이야기에요. 제가 사랑하는 이 세상의 엄청나게 많은 먹을거리들의 유전자가 단순화되고 있다니요. 그러다가 인간 유전자까지
단순해지는 거 아니에요? 좋은 유전자를 가진 아가들만 만들어내면 어떡해요! 인간도 멸종되는 거여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유전자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다 같이 진지하게 해야겠지. 그런데 태연아, 너 대화하는 내내 바나나를 무려 17개나 먹어치운 거
알고 있냐!! 멸종에 대한 불안감이 너에게 폭풍 바나나 식탐을 불러온 건 이해하겠지만 이건 아니지, 정말 코끼리가 될 수도 있다고!!”
“코끼리의 특성을 지닌 인간이라…. 유전자 다양성 측면에서 좋은 일 인거 같아요. 그럼 전 딱 17개만 더 먹을 게요~! 그리고
딸기로 다이어트 시작!”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