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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삼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30쪽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는 말이 콱 박혔다. 백세 시대에 삼십은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나이지만 무언가에 도전하려고 할 때는 참 애매한 나이이기도 하다. 내 경우는 스물 네살에 전공을 바꿨는데 그 때 생각하기를, 지금 못 바꾸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스물 넷이면 어린 나이이지만 동시에 대학 졸업할 나이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고작 이학년이었으니까 부담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기존의 과가 더 잘 나가는 과였고, 바꾸려는 과는 훨씬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긴 했지만 결론은 역시 바꾸자!였다. 그리고 성향을 생각할 때,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고단하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꼭 전과의 탓은 아니니까... 나로서는 대학 이름보다 자기에게 맞는 과를 택해서 가라고 말한다. 좋은 대학 나와도 태반이 백수가 되고 비정규직이 되는 세상인데, 그렇게 모두가 잔인한 경쟁 대열에 서 있게 되는 세상이라면, 즐겁게 일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지 싶었다. 이래저래 힘들긴 해도, 그래도 마음 한켠 즐거움도 있어야지...
'시인 이성복에게'에서는 이 대목이 눈에 걸렸다.
행복이 없어 행복한 너
절망이 모자라 절망하는 너
무엇이나 되고 싶은 너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은 너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더 극적으로 들린다. 무엇이나 되고 싶은 너,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은 너...
이승환이 곧잘 쓰곤 했던 표현이 떠오른다. 무엇도 아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당신께...
때가 때인 만큼, 무엇이든 되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될 수 없었던 고등학생들이 떠오른다. 차가운 바다 속에서 온 세상이 캄캄해질 때 이 아이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생명이 사그라들기까지 잔인하게 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면, 가족을 떠올리고, 살아온 시간을 되짚어 보고, 그 다음에 또 무엇을 생각했을까? 채 닿지 못할 것 같은 미래의 어느 시간도 생각해 보았을까? 어느 쪽이든 가엾고 아프기만 하다. 이 아이들에게는 삼십 세도 어마어마하게 장수하는 것일 테지...ㅠ.ㅠ 이 어마어마한 죄업을 누가 갚을 것인가. 이렇게 사악한 세상이 그냥 유지되어도 되는 것일까,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우울함이 지나쳐서 그런 것일 테지. 그렇지만 진심이기도 해......
이 시대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만큼 마음을 힘겹게 하지만, 그러니까 우린 인간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니 그 와중에 폭탄주를 마시고 헹가래를 치고, 골프를 치고, 혼자 라면을 쳐드시고, 온갖 막말과 되도 않는 변명을 쏟아내는 거다. 사이코패스도 아니고..ㅜ.ㅜ
잔인한 사월이 지나가고 있다. 지독히 무섭고 서러운, 눈물 가득한 4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