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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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크리스마스 날 아침, 도쿄의 조토 제3중학교 교정에서 2학년 남학생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과 유가족은 죽은 학생 다쿠야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 짓는다. 다쿠야는 이미 한달 간 등교 거부를 하던 중이었고, 부모는 아이가 우울해 하고 있었으며 평소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위태로워 보였다고 고백했다. 다쿠야가 학교에 다니던 때에 교내 불량배 학생 3인조와 마찰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이의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건은 정리되는 듯했는데, 뜻밖에도 그 불량배 학생들이 다쿠야를 옥상에서 미는 것을 보았다는 고발장이 날아온다. 하나는 교장선생님께,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경찰인 다쿠야의 같은 반 여학생에게, 또 하나는 담임 선생님께.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교장 선생님과 경찰 측은 고발장의 내용은 신뢰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다쿠야의 학급 학생들 위주로 조토 제3중학교 학생들과 면담 시간을 갖는다. 경찰과 학교 측에서는 고발장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윤곽을 잡아내고 결정적인 심증도 갖고 있지만, 어린 학생인지라 이걸 표면화시키지 않고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담임선생님께 보냈던 마지막 고발장이 문제가 되어서 미디어까지 가세하고,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고 제2, 제3의 희생자를 내면서 학교 전체에 검은 오로라를 덮어 버렸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이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 시신의 첫 발견자가 보냈던 크리스마스, 학생이 죽은 뒤 찾아온 학교의 혼란, 학부모들의 항의, 학교측의 대응,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 그것에 대한 나름의 해법이 불러온 더 끔찍한 사태 등등... 사건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면서 더 크게, 역시 천천히 확장하면서 그 외연을 넓혀버렸다. 진행이 느린 탓에 700여 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직장에 두고서 조금씩 읽다 보니 다 읽는 데에도 무척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생각해 보면 모방범이나 이유도 이렇게 힘들게 읽었다. 가장 화끈하게,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급하게 읽어내려간 것은 처음 만났던 '화차'였다. 그때만큼의 격한 울렁임은 줄었지만 여전히 미미 여사의 내공은 무시할 수가 없어서, 캐릭터가 하나 등장할 때마다, 그 캐릭터의 심연을 들여볼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자아낸다. 작가가 이토록 정교하게 그물을 짜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급해지는 마음만 좀 달래놓는다면 이 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혹은 질러가며 이야기 속에 풍덩 빠지는 재미가 매우 크다. 


내가 아직 1권밖에 읽지 못한 관계로 다쿠야가 정말로 자살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쿠야의 가족, 특히 다쿠야 덕분에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던 형이 밝히는 에피소드를 보면 자살로 보인다. 이 어마무지하게 냉혹하고 독점력 강한 소년이 자신의 몸을 던져서 사람들에게 주었던 각인과 상처를 생각하면 그는 거의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난 게 아닐까 싶다. 


형에게 맞은 뺨이 부어오르고, 세면실 바닥에 웅크려 앉은 그의 찢어진 입술에선 피가 흘렀지만, 그럼에도 사실 그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두려움에 떨고, 울부짖고, 슬퍼하는 얼굴 바로 아래 그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형을 바라보는 눈에 그 냉혹함이 깃들어 있었다.

발버둥쳐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겼으니까.

형이 진 거야.

히로유키는 깨달았다.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진실. 그가 설마설마하며 물러서고, 시선을 피하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자라도록 거들어버린 끔찍한 것.

이것이 녀석의 본성이다. -132쪽


몸이 약한 탓에 더 품안의 자식으로 싸고 돌던 다쿠야가 죽었으니 그 엄마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는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엄마가 보여주는 병적인 집착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다쿠야가 아낀 러그를 그 방에 들어온 형이 밟았다고 적개심을 갖는 엄마라니! 심지어 아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의혹을 갖게 되자 그 형한테 네가 죽인 건 아니지? 라고 묻는 엄마라니! 아, 이런 것도 엄마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심정이었다. 막장 부모는 다쿠야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불량배 3인조의 우두머리 격인 오이데의 아버지는 어떠했던가. 많은 재산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협박하고 회유하고 윽박지르는 행태가 아주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막장 학생의 뒤에는 언제나 막장 학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달까. 


반면 이상적인 부모님도 계셨다. 학급의 반장을 맡은 료코의 아빠는 형사, 엄마는 부동산 감정사다. 두분 모두 바쁜 직장생활을 보내지만 한참 예민할 나이의 큰딸과, 사고뭉치 어린 여동생들에게 보여주는 다정함이 참 보기 좋았다. 열다섯이면 아직은 어리다고 보기에 충분할 텐데(게다가 이 작품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이니!)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을 내릴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는 신뢰의 부모님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선택권은 보장해주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는 철적히 지켜주려는 본능도 잊지 않는다. 


마쓰코의 부모님도 그랬다. 뚱뚱한 탓에 오이데 패거리는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해 다이어트를 결심한 딸 아이에게 부모님이 전해주는 충고는 따스하고 믿음직했다. 


살을 빼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더없이 진지하게 마쓰코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아빠는 슬퍼보였다. 둘 다 마쓰코가 다이어트를 한다면 기꺼이 거들겠다고 약속했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줄 알았다면서.

그리고 이런 말도 해주었다.

-하지만 마쓰코, 네가 살을 빼든 안 빼든 오이데와 이구치의 그런 행동은 잘못된 거야.

-네가 단지 그 두 사람에게 놀림받기 싫어서 살을 빼고 싶은 거라면 그것도 잘못이야.

-너는, 적어도 네 일에 대해서는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해.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기준으로 뭔가를 결정하면 안 돼. -578쪽


이런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마쓰코는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한 기운을 나눠줄 수 있는 씨앗을 스스로 제 안에 심어버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마쓰코의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을 이용하는 아이도 있었다. 미야케 주리. 안쓰러움을 느낄 만큼 심한 여드름 때문에 아이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건만, 무심하고 이기적인 부모들은 아이의 고민을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고, 조금의 부지런함을 떨어 아이의 상태를 개선시켜 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기적인 부모 아래에서 이기적인 주리가 나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착한 친구를 자신의 아래로 깔보고, 그 아이의 선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채우려고 하고, 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도 죄책감마저 갖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폭력을 휘두르는 오이데 패거리도 위험하고 나쁘지만, 미야케 주리가 보여주는 폭력성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아찔한 위험을 동반한다. 또한 '말'이 가진 그 아득한 위험성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언론은 어떻던가. 모기 기자는 학교의 부당한 사후처리와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여러 차례 이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잘못 짚었다. 그가 단두대에 올려서 가차 없이 머리를 치게 한 쓰자키 교장 선생님은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해주는 분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위치한 아이들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첫째도 둘째도 학생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교육자였다. 그러나 그가 언론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제기한 의혹은 학교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고, 더 큰 구덩이로 밀어붙이는 역할을 했다. 그걸 제대로 간파하고 휘둘리지 않으려고 정면도전한 료코의 반격이 1권의 끝을 장식했는데 무척 짜릿한 쾌감을 주기까지 했다. 역시 똑부러지구나, 료코!


당신은 단 일 초도 우리 편이 되어준 적 없어요. 우리에게, 우리 학교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해요?”

말을 할수록 몸이 떨렸다. 료코는 그 떨림을 억누르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모기 씨가 우리 마음을 알 리 없어요. 미야케의 마음도, 아사이의 마음도, 하시다의 마음도 전혀 몰라요. 그저 우리 모두를 이용해 자기한테 유리한 이야기를 만들고, 자기가 싸우고 싶어서 안달난 적과 싸울 무기로 삼으려는 것뿐이잖아요!” -690쪽


지나치게 예민하고 그래서 몸이 약한 엄마를 둔 노다 겐이치의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가족이 건강하지 못한 것도 아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당연하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자꾸 뒤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할 때의 긴장감이 어마어마했다. 아이가 맞닥뜨린, 아이가 선을 넘겨서 목격하고 만 자신의 또 다른 얼굴에 얼마나 절망했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본의아니게 웃자란 아이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그 마음에는 비정상적으로 자라버린 마음이 불안하게 자리한 애처로운 아이들을 부모가 만들어 낸다. '부모'라는 존재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산이며 하늘로 존재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담임 교사 모리우치라는 캐릭터도 할 말이 참 많다. 이 여자의 위선과 무책임함은 진절머리가 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당한 억울함에는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찬물을 씌운 인물의 부당한 복수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이 누구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누가 미운지에 대한 표적을 잘못 세운 인물 덕분에 사건은 이렇게 커지고 말았다. 정작 자신은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고, 피해를 입은 모리우치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모든 사람이 이 엉뚱한 판 위에서 제 의사와 상관없이 춤을 추고 있다. 애처로울 지경이다.


자, 이제 사건은 던져졌고, 배경 설명도 모두 끝마친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커다란 판을 벌려놓고, 이제는 마치 자신이 창조해낸 주인공더러 알아서 뒷 이야기를 꾸려보라고 뒷짐지고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작가의 창조물들은 엄청난 불행 속에 풍덩 빠져버렸고, 이제는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입시를 앞두고 있어 시간도 없고 마음도 급하고, 죽은 아이는 나랑 친하지도 않았고, 여러모로 이 모든 것에서 이제는 발을 빼고 잊고 싶었지만, 줄을 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이들의 발목을 자꾸 잡는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간접적으로는 이 모든 사건들의 당사자이기도 한 아이들의 손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숙명처럼 되어버렸다. 피할 수 없으니 바지 걷고 뛰어들게 된 것이다. 


해가 바뀌어 이제 겨우 열여섯. 아직도 많이 어린 이 아이들이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 갈지, 어떤 방식으로 진실을 향해 다가갈지 기대가 되고 염려도 된다. 그래도 미미 여사니까, 이 아이들을 가볍게 보지 못하게 한다. 어려도 진실을 알아보는 눈이 분명 이들에게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런 마음으로 아직도 한참 남은 뒷이야기를 겁먹지 말고 시작해보련다. 손목은 좀 아프겠지만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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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2-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연말 잘 마무리하고 계세요? 한 해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

마노아 2013-12-22 23:1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어요. 한해의 마무리가 벅차네요.
한숨 돌리고 차분히 시간 보내야겠어요. 프레이야님 올 한해도 고마웠어요. ^^

2013-12-2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5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12-25 14:14   좋아요 0 | URL
네네,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