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속에 8
강경옥 지음 / 애니북스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작가님은 이 작품을 87년도에 썼다. 작가님 나이 23세였다. 이야, 젊어서, 아니 어린 나이에 대작을 쓰셨구나. 갑자기 존경심이 팍팍 든다. 개정판은 97년도에 나왔고, 현재 애니박스는 그 다음 버전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 온다. 마지막 권을 읽는 동안에는 소름도 돋았다. 이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라니!

(아르만의 마음을 끝내 거절해야 했던 시이라젠느가 마지막 인사를 하던 장면이다.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만나지 못했는데, 미안하단 말 대신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했다. 미안하단 말보다 그게 나았다.)


초능력자 왕족이 존재하는 카피온에서는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도 자주 일어났다. 기레스의 선조 대에서 2계급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그것이 결점이 되어 기레스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왕이 될 왕녀였고, 자신은 집안에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한 세기 전의 유전이 시이라젠느의 대에 일어나서 발현되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여자아이를 기레스는 불온함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결국 그녀는 멸망을 앞둔 카피온과 카라디온 모두에게 구원이 되는 존재였다. 그 대가로 그녀의 삶은 이토록 고통 속에서 헤엄치게 되었지만.


기계의 힘으로 유지되던 카라디온. 모행성 카피온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완벽한 독립, 나아가 카피온을 제압하고 발 아래 꿇리기를 원했다. 카피온도, 카라디온도... 모두 '공존'을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를 원했을 뿐. 그리하여 나온 결과가 사만 작전이었고, 그 대가는 '파멸'이었다. 


사만호는 거대한 폭발 장치다. 핵무기가 가득 들어 있는 항공 모함 정도로 상상하면 될까? 카라디온은 물론 카피온까지 함께 날릴 정도의 규모다. 세상에, 이런 미친 물건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도, 그것을 발사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다. 슈퍼 히어로물이나, 혹은 SF액션물을 보면 지구를 날려 보낼 위기나, 아니면 그 만큼의 위험한 무기가 등장한다.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한 무기는 그보다 더 거대해 보인다. 일견 핵무기에 대한 은유로도 여겨진다. 점점 더 경쟁을 올리며 많이 만들지만, 그럴수록 서로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엄청난 무기. 

(성역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여왕의 화려한 예복 대신 활동성이 편한 새옷을 골랐다. 그녀다운 선택이다. 카피온의 새 여왕은 모든 면에서 파격적이다.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더 싫겠지만, 누군가는 그래서 더 그녀가 좋다!)


시리아젠느. 그녀는 또 다시 성역으로 들어가서 신의 음성을 찾았다. 그리고 카피온의 앞날도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했던 이유도 찾았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도. 신은 알려주었지만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다. 카피온도, 지구도. 


레디온은 어떠했던가? 그는 제2계급으로 태어나서 그 신분의 굴레에 사로잡혀 껍질을 깨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그가 시이라젠느를 지구에서 데려오면서부터 바뀌었다. 스스로 주군을 선택했고, 충성을 다했다. 그 충성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그 마음 전달할 수 있을 만큼은 늦지 않았다. 그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이제껏 살아온 그 어떤 시간보다 행복한 얼굴로 그는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시이라젠느는 다시 지구로 돌아갔다. 그것이 어느 세대인지, 어떤 환경인지 알지 못한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조차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돌아갔다. 그녀가 카피온에서 여왕으로서 해야 했던 모든 책임을 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내고 이제야 자유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잃고 그녀 자신도 온갖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또 다시 별이 흐르는 하늘 아래 놓여 있다. 마지막 순간에 모두를 사랑할 수 있었던 그 마음은 모두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복수도, 증오도 다 내려놓은 그 시점은 그러나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잃은 뒤였다. 그녀가 생에 대한 의지를 놓을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마지막 언덕 위에서 그녀가 잊어버린 한 사람이 가슴 아팠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살아달라는 그의 유언을, 그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그 마음 속 가장 아픈 것 하나를 내려놓아야 했을까. 

(모든 걸 다 끝내고 지구로 돌아온 시이라젠느다. 자신도 모르게 레디온의 부재를 느끼면서, 그러나 그 사람을 떠올리지 못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절절하게 아파 와서,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도 다 보고 나서 집에 울면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왜 2부 안 써주냐고 마구마구 원망했던 기억도 난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결말은 여전히 아프다. 


작가님도 애니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게 애니로 만들어진다면 보다 섬세하게, 보다 스펙터클한 연출도 가능하겠지만, 여긴 대한민국이어서 말이다. 만화는 여전히 어린이 전유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고, 애니메이션도 여름방학을 기대하며 어린이를 공략하느 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지극히 매니악하니까.... 그러니 이 작품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현해 보는 상상은 내 머리 속에서나 가능하겠다. 


강경옥 샘은 이 작품 이후에도 다작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다. 현재도 '설희'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80년대 데뷔한 작가들 중에선 그래도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분이시다. '별빛속에'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이후의 작품들도 좋았지만 이 작품만큼 좋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필생의 작품이 너무 젊어서 일찍 나왔던 건 또 나름이 아쉬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림이나 보다 깊은 연출에 대한 아쉬움. 


오랜만에 추억을 보듬어 보고 이 안에서 내가 인상깊어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찾게 되었다. 하하핫, 내가 이 부분에 꽂혔었구나. 이게 그렇게 가슴에 남았구나 싶은 것들. 가끔은 이런 것도 좋다.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았던 추억 한자락을 다시 재생시켜 보는 것 말이다. 별빛속에. 아름답고, 쓸쓸하고, 그래서 위태롭고 그러나 또 그럼에도 소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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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08-1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울면서 봤던거 같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내용이 전혀 떠오르질 않네요.

술좀 고만 마셔야 해마가 정신을 차릴텐데 말입니다~

마노아 2013-08-12 11:49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봤더니 막 낯설었어요. 그러면서도 그 애틋하고 안타깝던 감정은 살아나더라구요.
어휴, 어느새 이 작품이 순정만화의 고전이 되었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