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따라와, 멋진 걸 보여 줄게 - 너트와 고리와 병뚜껑과 나사의 여행
수비 툴리 윤틸라 글.그림, 류지현 옮김 / 낮은산 / 2013년 4월
평점 :
"따라와, 멋진 걸 보여줄게."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마어마한 자신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은, 보통 더 어릴 때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는 내가 좋아하는 책과 음악과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내가 추천한 사람에게는 별 반응을 못 끌어내는 것에서 속상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어릴 적에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작은 것들에도 크게 감탄하고 감동하고 또 열광하지 않던가. 보다 순수하고, 보다 계산이 적던 시절의 우리들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소소한 것들에서 출발했다. 그렇지만 어린이 눈높이에서만 멋진 것들은 아니다. 이미 충분히 다 자란 어른인 내게도 멋져 보이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림책은 매번 그렇게 독자를 놀래키고 감탄사를 터트리게 한다. 이 놀라운 색감이라니!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안에서 은하수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행성 하나. 작지만 뚜렷한 족적을 가진 이 아름다운 행성의 또 작은 도시, 그 안에 자리한 이곳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바닥에 깔아놓은 직물 천이 우주가 되고, 골판지는 지붕이 되었다. 솜뭉치는 둥실둥실 구름이 되었다. 이제 집 안으로 들어가 보자.
마루 위에 놓인 저 자그마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천으로 이루어진 벽면과, 우표 한장이 충분히 아름다운 액자가 되어주는 이 공간 안에서 반짝이는 저것은!!! 아핫, 너트였다. 빛나는 삶을 꿈꾸는 너트는 이 좁은 공간을 떠나 먼 여행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모름지기 여행에는 동반자가 있기 마련! 고리가 합류하기 무섭게 노란색 병뚜껑도 이들 일행과 뜻을 모으기로 했다. 지루했던 병뚜껑으로서는 아주아주 반가운 일이다.
자그마한 이들 친구들이 넘어야 할 산은 높고도 험했다. 유리로 된 산을 넘고 곧게 떨어지는 폭포를 지나야 했던 것이다. 유리로 된 산의 정체는 뭘까? 아마도 세면대? 떨어지는 물줄기가 이들에게는 나이아가라 폭포보다도 거대하고 거친 물살로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여행을 계속했다. 주방에서 만난 피망과 파프리카는 강렬한 색감으로 일단 기선을 제압하는데, 이들의 여정은 주방 안 식탁 위에서 끝낼 수 없었다. 과감한 도약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점프!!! 이들이 뛰어내린 곳은 파랗고 차가운 바다! 반짝이는 직물은 푸른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뱃멀미를 일으킬 만큼!
파도가 높아지고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더니 이윽고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어째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밤을 맞이한 인도 소년 파이가 떠오른다. 거대한 바다는 느닷없이 블랙홀이 되어서는 세 모험가를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시커먼 구멍을 지나서 마침내 떨어진 곳에서는 환한 빛이 이들을 맞이했다. 대체 이들이 통과한 것은 무엇일까? 세탁기 배수관? 싱크대 관??? 아무튼 이들은 물방울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급작스럽게 맞이한 자유는 늘 위험을 동반하는 법! 빗자루가 슥슥 밀쳐대자 쓸려버린 너트는 바람이라고 착각했다. 낭만적인 반응이다!
낯설고 겁도 나는 여정이었지만 셋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아마 바람도 살며시 불어왔을 것이다. 셋은 함께여서 힘이 났고 도전은 끝이 없었다. 평범한 화단도 이들에게는 깊디깊은 숲속이고 정글이었다. 그리고 녹이 슨 관 안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나사를 만났다. 오래도록 혼자 지내왔던 나사라면 이제 갓 모험을 시작한 세 친구들에게 특별한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가장 멋진 표현은 이것 아닐까?
"따라 와! 멋진 걸 보여 줄게!"
나사는 산 위로 올라가서 세 친구들에게 멀리 보이는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들 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낮은 곳, 좁은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그런 장면들을...
하지만 멋진 장면만 넋을 잃고 볼 수는 없다. 산을 올라갔으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 법. 이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나사를 포함해서 넷으로 늘어난 인원으로! 작은 꽃송이 하나도 이들과 함께 있으면 거대한 숲으로 변신한다. 마법 같은 일이다. 어스름이 깔리는 저 노란 배경은 압도적인 색을 자랑한다. 검게 뒤로 물러난 풀잎이 밀림처럼 보인다. 이윽고 밤이 깊어왔다. 저 둥근 보름달을 배경으로 우뚝 선 네 친구들이 참으로 늠름하다.
성냥갑은 이들에게 최고로 안락한 잠자리였다. 하룻동안 머나먼 여정을 소화한 이들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다시 태양이 솟아올랐을 때, 풀숲에서 이들 네 친구가 담긴 성냥갑을 찾은 노란 장화의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슬을 머금고 햇볕에 반짝이는 이 친구들이 얼마나 눈부셔 보였을까?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아이에게는 이 소소하고 사소한 것이 충분히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방으로 옮겨진 너트와 나사.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난 고리와 병뚜껑이 있다. 다시 만나면 이들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해주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을 것이다. 모험은 이들을 더 성장시킬 것이고, 여행은 이들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너트와 고리와 병뚜껑과 나사의 멋진 여행! 어쩌면 이것은 자신만의 보물을 발견한 어린 아이의 상상력이 빚어낸 놀라운 모험담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어릴 적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자라고 나서 보면 이런 걸 왜 모아두었을까 싶었던 물건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애착을 가졌던 그 물건들을 만났을 때, 혹은 모아두었을 때 가졌던 그 기쁨의 크기는 분명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눈에는 아이가 만든 소소하고 볼품없는 것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내게는 아이가 없으니 조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뿌듯해 하는지 생각해 봤다. 요새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만들어오는 녀석들은 그때마다 자랑하기 바쁘다. 방문마다 그림이, 액자가 걸려 있고, 책장 위에도 소소한 작품들이 나름의 실력을 뽐내면서 자리를 빛낸다. 먼지 타서 청소하기 아주 애먹지만, 그래도 쉽사리 치울 수는 없다. 작품에 어린 애정과 정성, 그리고 노력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을 좋아하는 세현군은 자신의 방문에 저런 액자를 걸어두었다. 벌어지기까지 한 볼품없는 명패 같지만, 아이에게는 슈퍼히어로 문지기다. 다현양도 밀리지 않는다. 찰흙으로 빚어서 색칠까지 마친 명패엔 좋아하는 별님도 있고 호랑이 친구도 있다. 그런데 저 보라색 동글이는, 설마... 설마... 똥은 아니겠지??? 아, 똥일지도 몰라...ㅠ.ㅠ 애들은 원래 똥이랑 친한 법이니까~
방문마다, 냉장고마다, 그리고 칠판에까지 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어떤 건 테이프로 붙이고 어떤 건 자석으로 고정시켰다. 재료도 다양하다. 도화지도 있고 비닐판도 있다. 다각형 모양의 저 상자는 여러 개의 종이접기가 동원되었다. 여름이라고 부채에 무지개도 그렸고, 엄마 사랑해요 꽃도 만들어왔다. 뭘 해도 예쁠 나이, 뭘 만들어도 대단해 보이는 그런 어린이들이다. 물론, 남의 집 아이가 이렇게 만들었으면 큰 감흥이 없을 것이다. 내 조카, 내 가족이어서 예쁘고 즐겁다. 그러니 우리 아이 작품 좀 보라고 카톡으로 사진 날리며 남을 귀찮게 하지는 않겠다. ^^
나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그런 상상 해보지 않던가. 집에 불이 나서 당장 몇 가지만 들고 나갈 수 있다면 뭘 가져갈 것이냐고! 통장 없으면 돈 못 찾는 시대도 아니고... 불 났는데 무겁게 컴퓨터를 들고 갈 수도 없고...(그걸 생각하면 노트북이 필요할 것도 같지만...) 수많은 책을 들고 갈수도 없고... 그래서 내가 떠올릴 것은 나의 학창시절을 밝혀주었던 소설 공책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험난한 환경으로 도저히 맘 붙이고 뭘 할 수 없던 시절에 나는 열심히 소설을 썼다. 내가 엇나가지 않고 그래도 집에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건 즐겁게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도 이야기를 전하는 걸 참 좋아했다. 몇 장의 글을 쓰고, 다음날 짝꿍에게 어제 쓴 이야기를 전하며 까르르 웃던 게 고3 시절의 스트레스를 풀던 우리의 방법이었다. 내가 그린 전조 얼굴이다. 하하핫, 저때만 해도 나는 장차 만화가가 될 줄 알았다. 같은 얼굴을 두번 못 그리는 실력으로 만화가를 꿈꾸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긴 일이지만, 그때는 진지했었다. 아래쪽 사진은 그 한해 뒤에 쓴 글이다. 저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마노아'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닉네임은 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소설 속 마노아는 남자고, 지금은 나라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왕자고, 아주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게다가 초능력도 가진! 뭐 그런 순정만화같은 캐릭터였다. 내 취향을 반영한 결과다. 지금 생각하니 참, 유치하구나. 그래도 뭐 소중하다.^^
스크랩북도 소중하다. 나의 스크랩북은 이승환과 그 밖의 것들로 구분되어 있다. 이승환은 나에게 우열을 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이므로 따로 티켓을 모았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억원짜리 저 지폐가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뭐 이런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다. 오늘 카페에서 100억 복권에 당첨되면 뭐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100억과 비교하니 1억은 참 소박하구나.^^ 그 아래 사진은 그밖의 문화 행사에 참여한 흔적들이다. 며칠 전에는 이슬람 문화전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차도르를 걸치고 히잡도 써보았다. 즐거운 경험이다. 저 스크랩 북들은 그렇게 내가 즐거워 했고, 내가 많은 걸 배워왔던 순간순간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기록은 그래서 소중하다. 귀차니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둬야지. 앞으로도 쭈욱!
마지막 사진은 아까 그 '전조'가 나오는 소설을 연재한 페이지다. 마지막 연재가 2005년이었는데 벌써 몇 년이 흐른 것인가. 조금만 더 쓰면 완결이었는데 끝을 못 맺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내 버킷 리스트에는 내 작품의 완결을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불이 난다든지, 무인도에 가져갈 거라든지 하는 상상에 꼭 포함되는 나만의 소중한 것들은 바로 이 책들이다. 남들에게 내보이기는 꽤 창피하기도 하고, 나만큼 애착을 가질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이지만 스스로에게는 "따라와, 멋진 걸 보여줄게!" 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 보았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책은 아기자기한 상상력과 예쁜 그림들로 나를 즐겁게 했고, 더불어 추억 속을 서성이며 소중했던 시간들을 되새기게 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같이 읽으면 좋을 책으로 백희나 작가의 책들이 떠오른다. 이 책처럼 상상력을 멋지게 발휘한, 소소한 것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소품들이 한참 뽐을 내는 즐거운 책이다. 그림책의 세계는 이렇게 넓고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