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 목요일, 창비에서 나온 인권만화 세번째 시리즈 '어깨동무' 북 토크에 다녀왔다.
한주 전에는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에 당첨되었는데 무려 다섯 명에게 물어보았지만 다들 일정이 맞지 않았고, 나도 직장 일이 겹쳐서 참석하지 못했다. 아쉬웠던 찰나, 한주 뒤에 어깨동무 북토크 당첨 소식에, 마찬가지로 앞서 친구들은 모두 힘들게 되었고 혼자라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아주 탁월했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인문카페 창비를 찾기 위해서 지도를 출력해 갔다. 길치인 나로서는 늘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서교 호텔'을 묻는 어느 여자분, 미안하게도 내 지도에서 서교 호텔은 잘리고 없었다. 알고 보니 아주 가까웠는데 알려주지 못해서 살짝 미안한 마음. 카페 2층으로 안내받고 올라가보니 이런 풍경이 맞아준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 서재가 떠올랐다. 저 기다란 책장 위에 여백의 미를 갖고 꽂혀 있는 책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저녁 시간 주린 배를 잡고 부랴부랴 도착했을 사람들을 위한 센스있는 간식! 빵도 맛있고 커피도 맛나고, 그리고 오렌지 쥬스는 더더욱 맛나고!!(어디 제품인가요!!)
이어서 네분의 작가님이 들어오시고 북토크가 시작되었다. 유승하, 최규석, 김성희, 윤필 작가님이 참여해 주셨고 사회는 뒷풀이에 빠지는 바람에 떠안게 된 김성희 작가님이 맡게 되었다. 작품에 참여한 작가님이 사회를 보면서 자연스레 작가님들에게서 여러 이야기들을 끌어내는 게 분명 목적이었겠지만, 편집을 맡은 창비 직원분이 사회를 보았더라도 좋았을 것 같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세번째 책 어깨동무. 사실 나는 이 책이 네번째 시리즈인 줄 알았다. 사이시옷이 나오던 시점에서 같이 보게 된 '이어달리기'는 여성노동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똑같이 열 명의 만화가들이 참여하였고, 여성과 노동과 인권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주제 의식도 통했기 때문이다. 다시 보니 출판사도 다르고(길찾기), 기획 주체도 달랐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의 세번째는 엄연히 어깨동무였던 것이다.
네분 작가님 앞의 마이크가 앙증맞고 귀여웠다. 빨간 불이 들어오는데 뭔가 새싹이 돋는 그런 분위기? 유승하 작가님이 마이크에서 멀찍이 얘기하셔서 잘 안 들렸던 게 하나 흠이었을 뿐이다.
(왼쪽부터 최규석, 유승하, 윤필, 김성희 작가님)
전작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작가님은 이중에서 윤필 작가님 뿐이었다. 최규석 작가님 추천으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원고료가 높아서 아주 깜놀했다는 후문! 그러자 여기저기서 자신도 놀랐다는 증언이 방언처럼 터진다. 최규석 작가는 사이시옷 때부터 참여했는데 당시 받은 고료가 무려 일반 원고료의 네배나 되었다고! 그러나 지금도 그때 그 고료라는 건 함정!
아무튼. 당시 유승하 작가님은 만화가들의 인권을 생각해서 책정한 금액이었는데 그게 만화계의 전설이 될 줄 몰랐다고 하셨다. 그림책 작가이셔서 당시 만화계의 고료 사정에는 어두우셨나보다. 그 덕에 원고료의 생수를 담뿍 부어주셨으니 고마운 일!
돌쟁이 선물로 적극 추천해 왔던 '아빠하고 나하고'의 작가님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정말 몰랐지~
김성희 작가님도 높은 원고료에 잔뜩 고무되어서 작업을 빨리 마치셨다고 했다. 원고료 빨리 받고 싶어서였다고...^^
각각의 작가님께 '인권이란?' 질문을 드렸다.
최규석 작가님의 답변이 관심을 끌었다. 숭고한 인권을 지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찌질한 인권 역시도 지켜져야 한다고. 그러면서 사이시옷에 실은 '창'이란 작품으로 설명해 주셨다. 이 작품은 군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어마어마한 민폐 캐릭터가 나온다. 이기적이고 아주 못된... 그런데 이런 성향의 인물일지라도 인권은 지켜져야 하는 게 마땅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무척 은유적으로 표현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도저히 그 캐릭터가 받은 대우가 부당하다고 느껴지질 않는 거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런 인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맞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 찌질한 인물에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아주 백해무익한 어떤 인물을 대입시켜 본다면 여전히 수긍하는 게 참 쉽지가 않다. 머리와 가슴의 판단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시사점을 던져준 작가님이 참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때 독자들의 몰이해에 부딪혔던 최규석 작가님은 이번 작품에서는 '직구'를 던졌다. 이번 작품에서 '맞아도 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참여했는데, 역설적인 제목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얘기한 것이다. 아주 쉽게,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사실적인 질감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담아냈다. 작품을 위해서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그것들을 작업에 반영시키지는 못했다고 했다. 재미가 없어도 주제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그렇다고 취재가 의미 없었던 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주제도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었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최규석 작가님이 더 좋아졌다.^^
김성희 작가님은 인권이 사람에 관한 모든 문제라고 했고, 윤필 작가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권리라고 말했다. '개'에 관한 작품을 많이 쓰신 것 같은데, 그랬기에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도 두루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다. 처음 작품을 만들었을 때는 다이애나 시점에서 얘기하는 빨강 머리 앤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잔잔해서 퇴짜를 맞았다고..ㅜ.ㅜ 그리하여 마감 시간에 쫓겨 고민하던 와중에 일본에서 잦은 고독사로 인해 그 뒷처리를 해주는 업체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작업 시간은 4~5일 정도 걸렸고, 너무 급히 하는 바람에 컬러 그림까지는 못했다고 한다. 음, 고백하자면 배경 그림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그림에 좀 성의가 없다고 여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은 짧고도 굵직했다. 고독사 하니 언젠가 읽었던 데스 스위퍼가 생각난다.
더불어 장례사 이야기가 나온 영화 '굿바이'도. 우리나라에도 남일이 아닐 것이다. 초고령 사회에 맞추어 치매도 늘어나고 노후가 보장이 되지 않는 불안한 삶이 줄곧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ㅜ.ㅜ
유승하 작가님은 십시일반 작업할 때에는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막 생기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금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그 시설물이 그때는 대단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장애인의 인권을 보다 생각해주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복지가 되어야 하는 부분인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였던가? 클론의 강원래 씨가 지하철에서 휠체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와중에 사인 요청을 받고 거절한 것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사과'를 앞세웠지만 그 생각없는 팬심에 대해 둘러서 지적한 것이 아닐까.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의미이겠지만, 그 기구가 움직일 때 나오는 노래도 신경쓰인다. 그 위에 올라선 채로 그 노래가 끝날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 참 길 것 같다.
최규석 작가님은 어떤 부분에서 인권감수성이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 스캔들 기사에는 이니셜로 표기하는 게 당연했는데 언젠가부터 기소 여부와 상관 없이 본명을 바로 쓰고 있다고. 사실 그렇게 묻지마 까발림 기사로 애먼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다. 한명숙 전 대표가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다. 좀 더 올라가서 바보 대통령도 한 분...
유승하 작가님은 탈모로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만화 속에서 나쁜 놈은 '대머리'로 표현되곤 했던 관행에 대해서 지적했다. 하긴, 예전에 조춘 씨였던가? 쌍라이트로 활동하시면서 그런 캐릭터를 컨셉으로 삼았던 것도 같다. 만화 속에서도 그런 편이고... 유작가님은 '대머리'란 말도 쓰지 않고 '탈모인'이란 표현을 쓰셨다. 탈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주 절절하게 느껴졌다...
십시일반, 사이시옷, 어깨동무까지... 인권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쏟고 보태라는 기획으로 만들어졌는데, 사실 이런 책이 만들어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읽혀질 필요가 없어질만큼 인권이 제자리를 찾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세상을 우리는 꿈꾼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 쉽게 오지도 않지만 빨리 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걸 만들어내는 게 인간인 이상. 그래서 떠오른 생각 하나. '인권' 과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국영수만 배울 게 아니라 인권도 배우고 노동도 배우고 정직한 소비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정작 중요한 것은 배우지 않은 채, 모르는 것도 모르는 채 겉껍데기만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는 조바심이 든다.
얼마 전 중학교 어느 교실에서 학급문고로 비치해 둔 책중에 '십시일반'을 보았다.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 읽으라고 본인의 책을 갖다 놓으신 건데, 그밖에도 강풀 작가의 여러 시리즈와 '맨발의 겐'도 있었고, 여러 쉬우면서도 의미있는 책들이 가득했다. 그 바람에 그 반 담임선생님께 잔뜩 호감을 가졌다는 걸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분은 여자...;;;)
서로 마이크를 앞다투어 잡는 분들이 아니었기에 토크 시간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대신 이 자리에 참여한 분들이 질문을 많이 해주셔서 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었다. '습지생태보고서'를 쓴 최규석 작가님께, 어떤 여자분이 자신이 이 작품을 습지생태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읽었다고 했을 때는 온 청중이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핫, 그런 재밌는 우연이!
공룡 둘리에 대한 과제가 있어서 나오게 된 작품이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였다고... 오, 이렇게 극적인 전환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역시 작가들은 남다른 상상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 존경스럽다. 최작가님은 노동문제를 다룬 만화를 연재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것도 네이버에! 그렇다면 '다음'에 연재하는 게 낫지 않냐는 어느 청중의 질문에도 모두가 빵빵~
사인해 주시는 작가님들. 최규석 작가님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실물이 더 근사했다. 영화 포스터 하나 더 찍으세욧!
(영화 '두개의 문' 포스터 주인공인데 너무 가리고 나와서 아무도 먼저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사인 받으며 우리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평소에 작가님들 사인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지만, 이번엔 만화가분들이 자리했으니 그림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놓칠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작가님들이 그리신 작품의 앞 페이지를 열고 기다렸다.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그림들이다. 최규석 작가님의 저 사인은 무척 익숙하다. 이미 받은 것도 있고~
위에 그림이 잘려 있는 건 내 실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하핫....
긴 책장 맞은 편에는 창비의 책들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주방이 있다. 인문카페 창비에 행사 아닐 때에도 가서 커피 마셔도 되는 걸까? 살짝 궁금...
사실 이날은 목요일이었고, 업무가 많았던 한주라서 무척 피곤했던 날이었다. 같이 갈 사람도 없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는데, 이 자리에 참여하지 않으면 무척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은 내가 조금 기특했다. 좋은 시간을 나누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또 깊이 생각할 거리들을 잔뜩 안고 갈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인권에 마침표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우리는 물음표를 가지고 더 많은 느낌표를 찾아가면서 인권 여행을 떠나 보자. 우리가 합승해야 할 많은 친구들이 이곳에 있다.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