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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강 - 2012 볼로냐 라가치 상 수상작 ㅣ Dear 그림책
마저리 키넌 롤링스 지음, 김영욱 옮김, 레오 딜런.다이앤 딜런 그림 / 사계절 / 2013년 2월
평점 :
2012년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문 명예상을 받은 '비밀의 강'이란 작품이다. 원작을 쓴 작가 마저리 키넌 롤링스는 1953년에 생을 마감했고, 이 작품은 사후 발견되어 1955년에 유작으로 발표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그때에 흑인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이 그려졌다는 게 놀랍다. 당연하지 않은 일이 당연하게 취급되던 시절에 작가 마저리는 몹시 앞서갔던 인물이지 싶다. 작가 정보를 보니 어릴 적에 아주 인상깊게 보았던 만화 영화 '아기 사슴 플랙'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 이 만화영화 주제곡을 불렀다가 눈총 받았던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ㅜ.ㅜ
초판본은 레너드 웨이즈가드가 그렸는데 흑인 아이의 얼굴색을 종이색으로 감추기 위해서 커피색 종이를 사용했다고 한다. 우회적으로 책을 출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 결과 이 판본은 1956년에 뉴베리 명예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반세기가 더 지나서 레오 딜런과 다이앤 딜런 부부의 환상적인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책으로 말이다.
플로리다 외딴 곳의 울창한 숲 속에 살고 있는 소녀 칼포니아는 '마차를 끄는 말'이란 뜻을 가진 버기 호스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살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칼포니아는 어린 시인이다. 지저귀는 새와 친구가 되고, 화창한 햇살을 즐기며 노래를 부르는 칼포니아에게 근심과 걱정이란 단어는 몹시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어릴 때는 머릿 속에 담겨 있는 생각들이 무척 단순해서 가끔 고민을 하지만 대체로 늘 즐겁거나 신기해하거나 재밌어 했다. 그러나 어른들이야 어디 그런가! 아버지는 좀처럼 물고기가 잡히질 않아서 가게를 문닫게 생겼다고 염려하신다. 작품의 배경은 세계대공황 즈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고프고 힘들어하던 시절. 칼포니아는 어려운 시절이 어서 지나가서 모두가 즐겁게 지냈으면 하고 바랐다. 그 소망마저도 라임을 섞어 시로 뽑아내는 칼포니아! 시어가 되었던 꿀벌은 칼포니아의 곱슬곱슬 머리카락 속에 꽃처럼 장식되었다. 머리카락 속에 벌이 들어가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건 호러인데, 그림 속의 칼포니아에게는 '예술 작품'처럼 어울린다.
칼포니아는 아빠의 얘기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빠에게 큰 도움이 되고 싶지만 지금까지 칼포니아의 낚시 솜씨는 썩 훌륭하지 않았다. 상상력이 풍부한 칼포니아는 물고기의 마음으로 이입되어 무엇을 물고 싶을까 생각해 보았다. 특별하고 아주 예쁜 것들만 물고 싶다고 말하는 칼포니아. 이 아이가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되는 순간이다.
칼포니아는 예쁜 분홍빛 주름 종이로 장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숲속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알버타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아주머니의 가게에도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말씀처럼 마을 전체가 어려운 게 분명하다. 아주머니의 머리 장식이나 벽에 걸린 그림과 장식에서 '눈동자'를 여럿 발견하게 된다. 지혜롭다 소문난 현자의 '혜안'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어쩐지 아메리카 원주민이 떠오르는 인상의 알버타 아주머니다.
아주머니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비밀의 강'을 소개해 주셨다.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의 강을 찾는 방법은 바로 '코끝'을 따라가는 거라고 놀라운 비법도 알려주셨다. 의심 많은 어른이라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흘려듣겠지만, 칼포니아는 의심 없이 비밀의 강을 찾아나선다. 고기를 잡으면 아주머니께도 드리겠다고 말하는 예의바르고 경우 있는 칼포니아! 정말 반듯하고 예쁘게 자란 아이다.
비밀의 강을 찾는 과정은 운명처럼 술술 풀렸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를 바라보느라 코끝이 돌아갔고, 그 길이 칼포니아가 가야 할 길이었다. 파란 어치가 참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드는 것을 보는 바람에 또 코끝이 돌아갔고, 역시 칼포니아는 그 방향을 따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비밀의 강!
엄청나게 큰 물고기들이 가득한 강물에 발을 담그면서 칼포니아는 충분히 양해를 구한다.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는 우리 마을을 도와달라고. 이 아이의 마음처럼만 우리가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지금처럼 욕심 사납게 변하지 않았을 텐데...
칼포니아는 분홍 종이 장미를 낚시밥으로 사용해서 물고기들을 낚았다. 종이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물고기들이 예쁜 것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낸 아이의 상상력이 예쁘고 당찰 뿐이다. 칼포니아는 배 한가득 물고기를 잡았다. 어째 분위기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
이 많은 물고기들을 어떻게 집으로 갖고 갈 것인가. 칼포니아는 머리를 굴렸다. 뻣뻣한 실유카 이파리를 끈 삼아 물고기들을 낚싯대에 주렁주렁 엮은 칼포니아. 비밀의 강을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코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그러나 밤은 깊었고 칼포니아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맞닥뜨린 어마어마하게 큰 부엉이! 칼포니아는 공포 대신 부엉이에게서 굶주림을 읽었다. 마을이 어려운 것처럼 부엉이도 배가 고플 거라고.
기꺼이 물고기를 내어주는 칼포니아. 게다가 큼직한 놈으로 골라서 내놓았다. 착한 마음씨다.
부엉이의 날개를 보면 깃털 하나하나가 다시 또 부엉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숲 속 나무들의 몸통에는 여러 얼굴들이 가득 담겨 있다. 반지의 제왕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딜런 부부의 환상적인 그림 솜씨가 제대로 빛을 발했다.
맛있께 물고기를 먹는 부엉이를 뒤로 하고 숲길을 걷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검은 곰과 마주쳤다. 칼포니아는 곰도 배가 고플 거라고 여기며 가장 큰 메기 두 마리를 내놓았다. 이러다가 물고기를 다 잃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데 칼포니아는 맛나게 드시라고 인사까지 하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세번째로 마주친 것은 검은 표범. 표범에게는 메기를 세 마리나 주었다. 나눔의 장을 계속 마련했더니 이제 이 커다란 야성의 동물들이 무섭지도 않은가 보다. 담력이 보통이 아닌 칼포니아다. 이 와중에 시까지 읊어내는 정말 놀라운 칼포니아!
서둘러 집으로 가고 싶을 법하건만, 잃었던 길을 찾은 다음에도 칼포니아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알버타 아주머니께 먼저 간다. 정말 예의바르고 경우도 있고 도리도 아는 멋진 칼포니아!
이렇게 괜찮은 아이에게는 당연히 근사한 부모님이 계시다. 칼포니아가 잡아온 물고기를 내다 팔러 가신 아빠는 이웃들이 당장 돈은 없고 너무 굶주려서 기운이 없자 외상으로 물고기를 내주었다. 사람들은 물고기를 사가서 맛있게 먹고는 기운을 차려 열심히 일을 했고, 그 보수를 받아와서는 외상을 갚았다. 서로가 서로를 살피며 위해 주는 이 마음이 힘든 시절을 지나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었을 게 분명하다. 그 씨앗을 뿌려놓은 것이 바로 칼포니아다.
어느 날 칼포니아는 강아지 버기 호스를 데리고 다시 비밀의 강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코가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도 비밀의 강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칼포니아는 알버타 아주머니께 비밀의 강의 소재를 다시 물었지만 아주머니는 비밀의 강을 찾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하셨다.
"얘야, 어떤 일은 딱 한 번 일어난 뒤에는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도 한단다."
이 말이 무척 인상적이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지만 언젠가는 오는 법이고,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잡기 어려운 법이다. 칼포니아는 그 기회를 잡았고, 그리고 다시 오지 못한다고 해도 속상해할 필요가 없었다. 알버타 아주머니는 비밀의 강이 마음 속에 있다고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조언대로 눈을 감고 비밀의 강을 마음 속으로 찾아나서는 칼포니아. 역시 욕심부리지 않고 마음으로 강을 재차 찾아내는 칼포니아의 심성이 참으로 곱다. 이럴 때일수록 아이의 시짓는 감성이 잘 어울린다.
비밀의 강은 내 마음속에 있네.
언제든 갈 수 있는 그 강.
알버타 아주머니의 말은 모두 맞았지.
하늘에는 황금빛 물결이 너울너울
강에는 옥빛 물살이 출렁출렁
강, 강, 비밀 속에 감춰진 내가 사랑하는 강.
칼포니아의 마음 속에 자리한 비밀의 강이,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도 흐르게 되었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인정하며,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함께 추구하며 말이다.
초등학생이 읽는 그림책이라고 적혀 있지만 전 연령대가 함께 만족할 수 있는 그림책으로 보인다. 어린이들은 환상적인 이 책의 그림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고, 어른이라면 이 책의 철학적인 메시지들에도 큰 호감을 가질 것이다. 선물로 같이 따라온 엽서와 포스트 잇은 보너스다.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근사한 책을 만났다. 글이 해줄 수 있는, 그림이 해낼 수 있는 신비로운 영역에 독자도 발을 담가 보았다. 이 책은 선물이고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