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간밤에 이 책을 다 읽고 고민을 했다. 이어서 이 감동을 얼른 적어놓고 싶었는데 옆에서 잠들어 있는 언니가 걸렸다. 키보드 치는 탁탁 소리에 깰 것 같아서 말이다. 책을 다 읽었으니 오늘 출근길에 읽을 새책을 꺼내야 하는데, 새책을 시작해 버리면 이 뭉클한 감동을 한쪽에 밀어넣어야 할 것 같아서 그것마저도 주저했다. 이번 달에는 드물게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가장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준 작품이었다. 소설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기특한 친구로구나!

 

1권에서 스기야마의 죽음을 추적하는 와타나베 유이치의 활약이 그려졌다. 그 과정에서 스기야마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충돌했다. 인간백정이라고 증오의 눈빛을 보이던 죄수들이 있었고,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말한 피아노를 치는 간호사가 있었고, 그가 사실은 '시인'이었다고 고백한 윤동주가 있었다. 세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춘 스기야마였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유이치가 처음 찾아낸 용의자 최치수에게서 자신이 스기야마를 죽였다는 자백도 받아냈지만, 그의 죽음에는 보다 깊은 사정과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깊은 속사정은 2권의 전반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나온다.

 

1권에서 스기야마는 피아노를 조율하면서 미도리 간호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스기야마는 그녀가 추진하려는 합창대회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참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합창 대회. 죄수들은 노역의 부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열심히 참가했다. 초반에는 소리가 아닌 소음의 결합체였으나, 점차 그 소음들은 소리가 되었고 마침내 음악이 되었다. 자신들이 이만큼 해낼 수 있을 거라 감히 생각지 못한 죄수들도 놀랐고,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또 다른 죄수들도 감화되었다. 그 한줌의 노래를 듣게 하기 위해서 유이치가 보여준 온정이 먹먹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수송 중인 유태인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마치 놀이인 것처럼 가장해서 물을 뿌렸던 쉰들러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시인인 만큼 '문학'을 매개로 한 유이치와 윤동주의 교감도 아름다웠다. 문맹이었던 스기야마가 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만큼이나 절절한 부분이 있었다. 군대에 오기 전까지 유이치는 집에서 하는 헌책방에서 일했다. 쌓여 있는 책더미 속에서 유이치는 자유로웠고 평온했다. 먼지 가득한 허름한 책방이었지만 그곳에는 그가 사랑했던 시인과 작가들과 화가들이 있었다. 전쟁터만큼은 아니었어도 참혹한 것에는 큰 차이가 없는 이곳 형무소에서 유이치는 모처럼 영혼의 안식을 느꼈을 것이다.

 

“고흐 화집이 들어오면 연락해 주게.”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두운 서가 틈에서 몰래 고흐의 화집을 펼칠 때마다 가책이 책갈피를 뛰쳐나왔다. 입영 영장을 받은 날 나는 모서리가 닳은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희미하게 닳은 주소를 찾아가 그에게 내 영혼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그날 밤 나는 밀거래 식료품들로 차린 밥상을 앞에 두고 울었다.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이 슬퍼서였다. 기름진 밥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내 그릇에 덜어 주시던 어머니.

“고흐는 별의 화가였어. 별을 사랑했고 별을 즐겨 그렸지.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별에 대해 썼어. 들어 봐!” -149쪽

 

유이치가 아꼈던 책이 어느새 조선인 청년의 품속에 들어갔고, 그 책은 그가 감옥에 오면서 압수품이 되어버렸고, 다시 검열관이 된 유이치에게로 돌아왔다. 책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형태로도 살아 숨쉬며 이들에게 찾아왔다. 고흐 화집에 대한 추억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눈물 뿌리며 보내었던 화집에 대한 기억을 윤동주가 불러왔다. 별을 사랑했던 시인이 마찬가지로 별을 사랑한 화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의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전한 편지글을 얘기해 주면서...

 

이들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 시간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 죄수들은 아주 잠깐씩만 주어졌던 휴식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기 바빴다. 쉬어도 부족한 시간을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느라고 에너지를 쏟았던 것일까. 숨겨진 이야기가 마침내 드러나자 전율이 일었다. 갇힌 몸, 갇힌 영혼을 하고서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 인간 본연의 창조성을 보았달까. 하나의 감방이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수가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순간은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로 보였다.

 

이 책의 주인공이 당연히 윤동주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일본인 간수 두명도 그 중심에 합류해야 마땅할 것이다. 둘은 많이 달랐지만 같은 길을 걸었다. 하나는 문맹이었고, 하나는 문학도였지만 둘 모두 시를 사랑했고, 또 시인을 아꼈다. 그런 그들의 속내를 꺼내게 하고, 그들의 가난한 영혼이 쉼을 얻게 해준 이는 모두 윤동주였다. 순결한 시인, 끝나지 않을 노래를 부를 아름다운 조선인 청년 윤동주. 그는 야수에 불과했던 스기야마에게 그가 인간임을 알게 해주었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유이치에게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으며, 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잊어버리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그래야 좋지 않은 기억을 잊음으로써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감화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육신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아줄 수 없지만, 그의 노역을 좀 더 온기있는 곳에서 감당하도록 작업 장소를 바꿔주는 일, 몇 마디 시어를 벽에 적는 그 떨림을 다른 간수장들 눈에 띄지 않게 굳건히 서서 등으로 가려주는 일, 고작 그 정도의 일이라도 말이다. 이들은 국경을 뛰어넘고,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폭력을 뛰어넘어 인간으로서 서로 교감했다. 그리고 그 떨리는 순간을 독자도 함께 했다. 구원 같은 우정, 해방 같은 영혼의 안식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를 잃는 것을 분해한 유이치의 절망에 독자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240쪽

 

생체실험의 후유증으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윤동주 대신, 검열관이자 간수인 일본인 유이치가 그의 시를 기억해 주었다. 그의 시를 지켜내기 위해 무한히 애를 썼다. 스기야마가 죽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리하여 마침내 윤동주가 그 자신의 시를 떠올리지 못할 때에 유이치는 이 별을 사랑한 시인에게 별의 노래를 들려 주었다. 1권의 마지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장 절묘한 등장이었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238쪽

 

작품에는 스기야마나 유이치 같은 인간애가 있는 간수만 등장하지는 않았다. 형무소의 소장과 병원의 원장 같은 탐욕에 찌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도 대조적으로 등장했다. 그들이 사악하고 나쁠수록 스기야마와 유이치가 빛났고, 윤동주와 그의 시가 더 순결하게 보였다.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그것을 운반해 내는 캐릭터들 역시 매우 역동적이었다.

 

문장들도 아름다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장들은, 한번씩 밑으로 떨어지다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그 파도를 같이 타고 있자니 마치 노래가락을 듣듯이 리듬감마저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무대 뒤에 나는 있었다. 견고한 목소리는 약간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소리들은 일제히 나의 어깨를 밀치며 달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향기로, 움직임으로, 떨림으로 눈과 귀와 코와 모든 감각기관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꽃이라면 나는 그 향기에 숨이 막혔을 것이고, 술이었다면 엉망으로 취했을 것이고, 마약이었다면 파멸해도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아름답고도 슬펐다. 내가 그것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지 망설여질 만큼. 모든 선의가 빛을 잃고 강렬한 사랑에도 냉담해질 만큼. 그 순간 나는 인간이라는 아름다움, 삶이라는 기쁨을 발견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나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심장은 풀무처럼 헐떡거렸다. 나는 나를 달래야 했다. -200쪽

 

마침내 막이 오른 합창대회를 목격한 유이치의 고백이다. 얼마만큼 그 음악에 취했는지, 얼마만큼 감동을 했는지, 그 떨리는 숨결이 독자에게도 잘 전달되었다. 때마침 오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기막힌 우연에 독자는 또 감동 먹고 말았다.

 

 

나는 달아나듯 원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는 왜 내게 연구동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말했을까? 더 이상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생각대로 된 것이다. 엄청난 비밀에 압도당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비밀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사람이 없었다. 말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분노할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설사 분노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까? -282쪽

 

왜 아무도 말하지 않고,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 집필했습니까?

누군가는 그것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절대 망각 속에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다시 곱씹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돌이켜 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7쪽

 

앞의 문장으로만 끝났다면 좌절과 분노와 패배감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이치는 뒤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괴로웠던 사나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었고, 마침내 해내었고,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러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역사는 반드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이 꿋꿋하게 피어날 테니까.

 

1권에서 소제목이 예쁘다고 했는데 2권도 못지 않게 좋다. 아쉬우니 역시 옮겨 본다.

 

2부
절망은 어떻게 노래가 되는가 · 9
위생검열 · 18
책벌레의 사생활 · 37
사라진 책들의 노래 · 48
진실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 66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 71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96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115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 133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 154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 179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 192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 205
무서운 시간 · 227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24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246
미친 개들의 나날 · 259
또 한 줄의 참회록 · 283

에필로그┃후쿠오카 전범 수용소 전범 용의자 심문 기록 · 285
미 공군 B29 비행사 생체실험 관련 일본인 전범 처리에 관한 비밀문서 요지 · 292
윤동주 연표 ·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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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소설이 있었군요. 찜해둬야겠어요.^^

마노아 2013-02-21 19:22   좋아요 0 | URL
소리내어 읽어주고 싶은 그런 책이에요. 꿈섬님도 재밌게 보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