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 헌종.철종 실록 - 극에 달한 내우, 박두한 외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순조가 효명세자를 앞세워 보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는 손자가 뒤를 이어야 했다. 새로 즉위한 임금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 당연히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그녀는 친정 오라버니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렇게 헌종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  7년이 흘렀다. 열다섯이면 어른 취급 받던 시절, 헌종은 친정을 하게 된다. 안팎의 일은 여전히 안동 김씨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었고 헌종의 입장은 수렴청정 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이름뿐인 왕이었지만 헌종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조용히 정치를 하던 임금은 스무살이 되면서는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왕의 의중은 안동 김씨가 장악한 권력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왕의 신호탄에 신하들은 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역풍을 받는 법. 헌종은 나름 밀당을 시도하면서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침착하고도 차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헌종은 명이 짧았다. 재위 15년, 23세 때이른 죽음이었다. 실록은 헌종을 아름다운 외모에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고 묘사했다. 오호라, 젊고도 아름다운 군주의 이른 죽음이 더 애석해지는 순간이다. 순원왕후는 편지에서 헌종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다른 이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을 좋게 안 보고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요. 눈치 빠르고 시기심이 있어서...”

 

사방이 안동 김씨로 도배되어 있는 상황에서 왕은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이런 왕의 성격은 신중함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좀 더 뜻을 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안동 김씨, 풍양조씨, 다시 안동 김씨로 이어지는 3대 60년 간의 세도정치. 헌종 때는 잠시 풍양조씨가 안동김씨를 누른 것처럼 묘사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안동 김씨 세상으로 보인다. 다만 풍양조씨가 세도정치의 한축을 잠시 발을 담그는 정도로 참여한 정도? 풍양조씨 일문이 좀 더 욕심을 내었더라면 아마 안동 김씨에게 바로 밟혔을 것 같다.

 

 

아무튼 임금은 죽었고, 후사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종친을 찾아야 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왕실엔 대를 이을 왕자가 부족한 경우가 드물었는데, 후기로 가서는 손이 너무 귀해졌다.

 

 

전반적으로 조선 왕실이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임금의 아들이 왕이 되긴 했는데 헌종이 죽고 나서는 왕의 아들로서 임금이 될 사람이 없었다.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로 결정된 것을 안동 김씨의 음모로 보기도 하는데, 조선의 왕실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해석 같다. 임금이 죽으면 후사에 대한 결정권은 왕실의 큰어른이 갖는 것이 맞고, 핏줄상으로도 원범과 원범의 형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원범의 형이 원범보다 세살 많았는데, 수렴청정이 불가피했다면 스물 넘은 형보다는 그래도 좀 더 어린 원범이 더 적당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튼 그렇게 해서 순원왕후는 조선 왕조 사상 유일무이하게 두 차례나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농사짓고 살기 바빴던 원범이 정치를 아우를만큼의 식견이 당장에 있을 리 만무다. 대왕대비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언문 하교를 내렸다.

 

구구절절 바른 조언이다. 글밥이 많긴 하지만 깊이 새겨들을 메시지다.

 

순원왕후의 행적을 살피면 왕실을 꼼꼼히 챙기고 백성을 보살피는 면모들은 훌륭했다. 그러나 자신의 친정 가문이 나라의 가장 큰 해악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못 알아차렸으니 그녀의 죄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진심은 있었어도 구중궁궐 속에서 친정만 의지하며 제한된 정보만 받아들인 그녀의 필연적인 한계일 것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지는 게 권력이고 인간의 욕심인 법. 저 수많은 병자 돌림을 보고 있자니 어질어질하다. 김병연도 조상을 욕한 전적만 없었으면 저 행렬에 포함되었을까?

 

그렇게 안동 김씨의 전면적인 지배는 완성되었다. 마치 총수 일가가 재벌 경영권을 완전 장악하듯 한 가문이 나라를 통째로 삼켜버렸네. 무늬는 이씨 왕조, 실제론 김씨 왕조. -95쪽

 

때는 19세기. 세도정치로 정치가 무너져 내렸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삶도 무너졌다. 의무는 가득하고 권리는 없었던 조선의 백성들. 제도 상으로는 얼마든지 과거 응시가 가능한 나름 '열린 사회'였다지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 구조가 아니었다. 이게 전근대 사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게 씁쓸할 뿐!

 

 

사당오락도 아니고 삼당사락이다. 소는 네가 키워라. 공부는 내가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너의 경쟁자들은 열공 중에 있다....

 

아, 웃자니 또 슬퍼지네.

 

군포 징수에 따른 폐단을 개혁하고자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했었다. 그러나 한 구멍이 막히면 다른 구멍을 뚫어서 또 다시 곳간을 채우는 공무원들이 부지기수. 기본적으로 급여 자체가 없던 고을 아전들은 당당하게 백성들을 털어먹었다. 기본적인 시스템이 문제가 있었고,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으니 본전 찾으려면 부지런히 백성들을 짜먹는 게 수령과 그들을 보좌하는 아전들의 기본 책무였다. 이런 나라에서 반기를 들지 않으면 그게 정상이겠는가.

 

곡식이 많이 나기 때문에 털릴 것도 더 많은 삼남 지방에서 극렬한 저항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민란들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연대하지 못했다. 조선 왕조를 뒤엎을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내가 다 속상할 지경이다.

 

각지의 난들은 상당한 유사점들을 보여주었다. 우선 난은 삼정의 문란, 그중에서도 특히 환곡으로 인해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원성이 집중됐던 토호, 아전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관아를 습격해 불을 지르거나 수령을 붙잡아 능욕했다. 난이 진행될수록 백성의 분노는 양반층 전체로 확산되는 경향도 띄었다. 그런데 삼남 일대를 온통 뒤흔들었는데도 지배 세력에게 안긴 충격은 그리 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웃 고을의 소식에 영향을 받고 자극되었지만 적극적으로 이웃 고을과 연계하려 한 움직임도, 여러 고을을 통일적으로 묶어내려 한 시도도 없었다. 전국적인 봉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봉기들의 릴레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 토호들을 거침없이 죽이면서도 수령은 욕보이기만 했을 뿐, 약속이나 한 듯이 한 고을에서도 죽이지 않았다. 그토록 분노가 컸으면서도 문제의 근원은 보지 못한 채 이런 인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수령이 나쁜 놈이긴 해도 우찌 됐든 나라님이 임명한 사람 아이가?"

“하모. 수령을 직이모 나라에 선전포고 하는 거랑 같은 기라.” -127쪽

 

 

이게 가장 화가 났다. 가장 윗대가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 답답해도 너무 답답하다. 이게 다 유교 때문이 아닌가 싶다. MB가 아무리 큰 부정을 저질러도 그래도 대통령은 하늘이 내는 것이니 욕하면 안 된다고 하는 우리 엄니를 보는 기분이다. 민중이 움직인 혁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결정적 최후의 한방은 못 먹인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뻔뻔히 잘 살고 있는 전두환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그런 전직 대통령이 또 늘어날 판이니...ㅜ.ㅜ

 

백성의 고단한 삶을 몸으로 체험하고서 임금이 된 철종이다. 삼남에서 일어난 각종 농민 봉기들은 철종에게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안동 김씨 위세에 숨죽여 살아온 그에게 왕으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분과 분위기가 모두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삼정의 개혁은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그걸 잠재우려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뒷날의 흥선대원군처럼. 철종은 개혁의 칼을 빼들어서 그 칼을 안동 김씨에게 주었다. 개혁 대상에게 개혁을 맡겼으니 당연히 성공할 리가 없다. 애당초 사대부 전체와 한판 붙을 각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실망스럽게도 신하들이 올린 존호를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사면령을 내렸는데, 민란을 촉발시킨 부정 수령들이 이때 모두 사면되었다. 근데 이 모습, 과연 19세기의 일인가? 오늘날의 얘기로도 보이는데...

 

때는 19세기. 서양 열강들이 앞다투어 이웃 나라들을 잡아 먹고 있던 시절. 세상의 중심을 자처하며 오만의 극치를 달리던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아편을 앞세워 청나라를 제대로 요리해버렸다. 부끄러운 전쟁이었다. 쇄국을 고집하던 일본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조선은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다. 수시로 이양선이 출몰했고, 그들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세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다른 대응을 보여야 했고, 변화를 가져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에 기대어 사대 외교를 고집했고(너희가 오랑캐 취급하던 그 청나라에게!) 막연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이렇게 일관성 있게 한심하고 무능할 수가! 대체 이순신은 왜 침몰하는 조선 호를 건져 놓은 것인지 갑자기 막 원망이 들려고 한다...;;;;;

 

하여간, 그렇게 조선은 더더더 기울어 갔고, 철종은 또 후사 없이 눈을 감았다. 아들은 여럿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어버렸다.

 

 

서른 셋, 지극히 젊은 나이였다. 죽어서 오히려 자유를 찾은 것일까. 그림 속 철종의 모습이 무척 외롭고 슬퍼보인다. 그림에서 약간 사팔처럼 보이게 나오는데 철종 어진도 그렇게 그려졌던가?

 

 

음, 약간 몰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철종이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수순은 알다시피 조대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 고종이 왕이 되는 것. 19권이 그렇게 시작된다.

 

헌종과 철종실록은 아무래도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이 책도 다른 책들보다 많이 얇아졌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박시백은 책의 말미에 조선사를 쭈욱 한차례 정리를 해주었다. 그 과정은 사실상 사대부의 역사였고, 사대부들이 어떻게 정점을 찍고 분열했으며, 나라를 말아먹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고종실록은 그보다 더 답답했으니 벌써부터 숨막혀하면 곤란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법이다. 개혁의 주체가 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개혁을 하고자 하는 권력자 자신도 개혁해야만 할 때도 있다. 철저하게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는 뿌리부터 바뀌지 않는다. 조선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그렇다. 문득, 민주당 의원들부터 이 시리즈를 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열독하고 열공하고 깊이 반성 좀 하라고...

 

이제 이 시리즈는 딱 한권만 남았다. 그리고 남은 한권은 가장 가슴 아프고 사장 서러운 기록들로 덮일 가능성이 무척 크다. 바닥을 보겠지만, 그 바닥을 치고 일어나는 우리 역사의 가능성도 같이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간 속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덧글) 오타가 하나 있다.

 

49쪽 박남 박씨 >>> 반남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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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1-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워낙 영 정조 시대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순조에서 대원군 등장까지는 무관심하죠.이게 문제입니다.그러다 갑자기 강화도 조약으로 넘어가려니 맥락을 못잡죠.박시백 씨가 그런 점에서 그 공백을 잘 메꿔준다고 봐야죠.그리고 박 씨는 요즘 통속적으로 유행하는 정조 편향적인 사관(그 극단에 이덕일 씨가 있습니다만...)에서 벗어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니 다행이에요.

마노아 2013-01-26 22:04   좋아요 0 | URL
극단적인 정조 빠와 정조 까 사이에서 박시백 씨가 균형을 잘 잡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3-01-2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 까로 마노아님이 간주하는 분은 누구신지 궁금궁금...혹시 정병설 씨?

마노아 2013-01-28 01:16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요.^^ 안대회씨도 그쪽에 가깝다 느껴지고요.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3-01-28 21:08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