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 헌종.철종 실록 - 극에 달한 내우, 박두한 외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1월
구판절판


사도세자의 서자 셋 중 은신군은 영조 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죽고 은전군은 정조 1년에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경우 그의 아들 상계군을 홍국영이 누이 원빈의 양자로 삼으려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상계군을 내세운 역모사건이 이어지면서 이후 정순왕후를 필두로 신하들의 격렬한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정조는 끝내 지켜냈다. 그러나 순조 시절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도임이 드러나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 발각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그에게는 군호를 받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자인 상계군은 정조 10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풍계군은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후사 없이 죽었다. 이광은 군호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서자였던 모양. 아비가 사사될 때 살아남아 순조의 적극적인 보호와 배려 아래 결혼도 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원경은 헌종 10년 민진용의 역모사건 때 이름이 거론되어 죽고, 둘째인 경응은 생존해 있었지만 세 살 아래인 막내 원범이 후사로 정해졌다.
-75쪽

헌종이 후사로 결정된 일을 안동 김씨의 음모로 보는 시각이 많다. 조선 왕실의 시스템을 무시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채 임금이 죽으면, 후사에 대한 결정권은 왕실의 큰 어른이 갖는다. 이때 왕실에는 세 명의 대비가 있었는데, 큰 어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순원왕후. 속마음이 어떻든 며느리인 신정왕후가 감히 경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실제로 헌종이 죽기 직전에 대보를 대왕대비전에 전했고, 마찬가지로 뒤에 철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는 대보가 조대비 신정왕후에게 전해졌다. 안동 김씨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종의 아저씨뻘인데도 원범을 후사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 또한 지나친 해석이다. 후사는 가급적 선왕과 가까운 촌수에서 고르는 게 상례.
-79쪽

종친이란 신분은 안 그래도 책을 읽을 이유가 별로 없는데 농사짓는 강화 도령의 처지에서야 오죽했을까? 이제 종친도 농사꾼도 아닌 왕은 경연에 열심히 참여해 공부하고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보며 정치를 익혔다. 나이가 있어서인가? 철종 2년쯤 되니 곧잘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한다. 왕은 제법 중심을 갖고 신하들을 달래거나 혹은 엄하게 제지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 모습에 대왕대비는 그해 말 수렴을 거둔다. 그러나 친정이 시작되었어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신하들이 추천한 인물에 낙점하고 부임지로 떠나는 감사, 수령, 변장을 불러 잘 다스릴 것을 당부한다. 백성의 처지를 잘 아는 왕답게 수시로 삼정의 문란을 지적하고 수령들에게 경고하기는 했지만, 힘을 갖지 못했다. 왕이 그나마 자기 목소리를 내서 관철시킨 것은 죄안에 있는 이들의 사면 문제였다.
-98쪽

각지의 난들은 상당한 유사점들을 보여주었다. 우선 난은 삼정의 문란, 그중에서도 특히 환곡으로 인해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원성이 집중됐던 토호, 아전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관아를 습격해 불을 지르거나 수령을 붙잡아 능욕했다. 난이 진행될수록 백성의 분노는 양반층 전체로 확산되는 경향도 띄었다. 그런데 삼남 일대를 온통 뒤흔들었는데도 지배 세력에게 안긴 충격은 그리 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웃 고을의 소식에 영향을 받고 자극되었지만 적극적으로 이웃 고을과 연계하려 한 움직임도, 여러 고을을 통일적으로 묶어내려 한 시도도 없었다. 전국적인 봉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봉기들의 릴레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 토호들을 거침없이 죽이면서도 수령은 욕보이기만 했을 뿐, 약속이나 한 듯이 한 고을에서도 죽이지 않았다. 그토록 분노가 컸으면서도 문제의 근원은 보지 못한 채 이런 인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수령이 나쁜 놈이긴 해도 우찌 됐든 나라님이 임명한 사람 아이가?"
"하모. 수령을 직이모 나라에 선전포고 하는 거랑 같은 기라."
-127쪽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는 삼정이 모두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외부적 요인 없이도 나라가 망할 충분조건이 구비되었다. 민란이 그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 민란은 집권 사대부로 하여금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집권 세력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익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개혁의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일관성은 있어.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것으로!) 이 사이 세계는 빠른 변화를 거듭했다. 백수십 년 전에 이미 북경이라는 제한된 창구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일각의 지식인들은 다른 세상을 보았고 실학의 발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체제 안으로 수렴되지 못했고 조선 사대부들이 다시 유교 경전을 뒤적이는 사이 외부 세계는 더욱더 빠른 변화를 겪으며 이때에 이른 것이다.
-184쪽

헌종 6년는 가파도에 정박한 영국 배가 포를 쏘고 소를 뺏어갔다. 철종 5년 함경도에 나타난 이양선이 포를 쏘아 백성이 죽은 일도 있었다. 헌종 12년 충청도 서안에 프랑스 배가 정박했다. 해당 변장, 수령은 두려워 찾아와 보지도 않았고, 인근 백성이 접촉해 문답을 나눴다. 그리고 그들이 건넨 문서 한 통이 올라왔다.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들에 대해 항의하는 글. 이듬해 과연 프랑스 군함이 다시 나타났는데 700명이나 실은 프랑스 군함은 좌초되고 말았다. 고군산도에 머문 그들이 보낸 편지는 공손하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상해에서 삯 낸 배가 그들을 싣고 떠날 때까지 한 달에 걸쳐 조선 측은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구호를 다했다. 이때 비변사의 대책은 여전히 외부와의 문제는 중국을 통해 해결한다는 입장. 비록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조만간 더 강력한 외부세력의 접근이 있으리라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험으로 보아도 자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비는 보이지 않는다. 개항에 대한 고려도, 척사에 대한 다짐도 논쟁의 흔적도 없다. 임진왜란 직전처럼, 정묘 병자호란 직전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요행히 넘어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187쪽

삼정의 문란은 세도정치와 결합되면서 더욱 심화되었지만, 사실상 오래전부터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조선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없을 만큼 근본적인 문제였다. 서세동점의 물결에 대한 적절한 대응만큼이나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민생을 편안케 하고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해야 외생적 변수에 대한 대응책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 정조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인 수술을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관리하고 단속하는데 부지런했을 뿐이다. 과연 이 문제를 제쳐놓고 조선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 개혁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필자는 정조의 개혁과 관련한 많은 해석들이 판타지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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