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2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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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묘하게도 왕위라는 것은 언제나 전부, 아니면 ‘전무’를 요구한다. .... 이 무시무시한 ‘권력’이라는 저주의 힘이 영조를 짓눌렀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영조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것도 아들에게 잃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40쪽

하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이것은 정말로 열녀를 기록하는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첫 부분부터 열녀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아무개 둘째 딸 신 씨, 아무개 첫째 부인 박 씨" 하는 식으로 그 아버지나 남편의 이름으로 소개된다. 정작 본인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다. 중간 부분도 마찬가지. ... 오로지 얼마나 남편을, 시댁 어른을, 자식과 살림을 잘 돌보는지만 적어 내려간다. 마지막 부분 또한 거의 다 "군자 왈, 이 열녀의 지극한 정절을 깊이 치하하노니......"로 시작되는, 글을 쓴 남성의 평가로 끝난다. 가장 여성답다는 열녀전의 기록이 완벽하게 남자의 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말도 언제나 똑같아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최고의 열녀라고 부르짖으며 끝을 맺는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모두 열녀가 되어 그 한 몸 죽여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자! 그렇게 거창하게 외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글. 이른바 과부의 ‘죽음’을 조장하는 글이 바로 열녀전인 것이다.
-141쪽

그래서 소품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돌의 생김새를 말했을 뿐인데도, 단숨에 잘못된 세상 풍속을 짚어 내는 쪽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아주 작은 것, 사소한 것,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을 나열하고 늘어놓는 것뿐인데도, 바로 거기에서 유교라는 거대한 세계관마저 휘청 흔들리는 한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의도하지 않은 듯, 그렇지만 울림은 크게. 그래서 소품체가 위험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길로 떨어뜨린다고 정조는 걱정하였던 것이다.
-183쪽

박지원이 그 뛰어난 해학과 재치로 우둔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글을 썼다면, 이옥은 그 우둔한 백성들의 하나가 되어서 말없이 묵묵하게 그들의 모습을 ‘기록할’ 뿐이었다. 그 기록에는 양반이라지만 실은 양반답지 않은, 무인에 서얼에 한미한 가문인 이옥 자신의 처지가 녹아 있었고, 그럼으로써 그 어떤 선입견이나 판단 없이 백성들 자체가 되어 그 삶을 충실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7쪽

박지원은 열녀전에서 부당한 인습과 악습을 비판했다. 박지원이 쓰고자 하는 주제는 악습이고, 그 악습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옥은 부당한 악습을 쓰기보다는 그 악습에 맞부딪치는 ‘여성’이 주제였고, 그 악습으로 인한 ‘고통’을 드러낼 뿐이다. 그 여인들과 함께 아파하든, 또는 아예 외면하든 그것은 온전히 읽는 이의 몫이다. 하지만 그 고통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그대로 가만있지 못하고 그 고통을 토해 내게 하는 어떤 것, 바로 그것이 이옥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힘이었던 것이다.
-194쪽

생각해 보면 정조처럼 문체의 의미를, 곧 글쓰기의 의미를 과대평가한 임금은 없다. 순진하게도 정조는 문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또한, 정조처럼 문체를 과소평가한 임금도 없다. 정조는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얼마든지 문체가 바뀐다고 보았기에 문체반정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문체라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실, 임금 개인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힘과 의지가 들어가야 비로소 변화한다는 사실을 정조는 간과하고 있었다. 문체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 살아 숨 쉬는 힘을 결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다.
-206쪽

그러나 여름 벌레는, 비록 차가운 겨울을 보지는 못할망정 내년 여름에는 또다시 그 모든 얼음이 녹는 뜨거운 계절이 올 것임을 알고 있다. 오히려 겨울을 안다고 여름 벌레의 돌아올 여름을 비웃는 것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에 죽는 벌레에게 겨울을 강요하는 것은 자신의 바름(겨울)만이 최고라 주장하는 억지에 가깝다.
-211쪽

정조는 문체를 바르게 바꿔서 세상을 바르게 만든다는 원대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뜨거운 여름 속의 얼음 군왕이 되어 역사의 한 갈피 속으로 사라져 간다. 문체반정은 어쩌면 바로 그 임금 정조의 가장 서러운 자기 긍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정조, 그에게 글은 ‘바른’ 것이었다. 바른 것이어야 했다.
-215쪽

시대는 흐르고 있었다. 정조는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였다. 성리학이라는 얼음 갑옷을 입고 문체반정이라는 칼을 휘두르면서. 그러나 시대의 뜨거운 강 속에서 얼음 갑옷은 이내 산산이 녹아서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그래도 정조는 끝까지 그 무거운 얼음 갑옷을 결코 벗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바름’이었으므로.
박지원은 그 흐름의 정점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니, 눈을 부릅뜨고 제자리에 서서 누더기를 걸친 채 ‘살아 있는’ 햇빛을 즐겼다. 그것만으로도 시대는 요동을 쳤다. 그래도 박지원은 끝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의 눈으로 살아 꿈틀거리며 바뀌는 시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옥은 기꺼이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굳이 맞서지도, 조급하게 재촉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함께 흐르면서 다만 자신이 갖고 있는 뜻만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허름한 홑옷이 쓸려가는 날, 진정으로 ‘멋진’ 비단옷의 가치가 드러날 것을 믿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세월과 함께 흐르면 그만이었다.
-242쪽

말과 글을 일치시켜 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꾸밈이나 허식이 없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거나 지식으로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듯이 글을 쓰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나 다 함께 그 뜻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글인 것이지요.
-253쪽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바꾸거나 개혁할 때 "천명을 받았다", 또는 "혁명을 일으켰다" 같은 말을 쓰지요. 비슷해 보이는 두 말은 그러나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명은 대개 왕이나 천자, 영웅 들이 받습니다. 왕은 하늘의 자식이라거나,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영웅 같은 말들은 다 이 천명을 받아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의 천명은 하늘 천(天)을 써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을 뜻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사람이 고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여기서 혁은 가죽 혁(革)을 씁니다. 가죽은 그냥은 쓸 수 없고 꼭 사람이 손질을 해서 써야 하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 것입니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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