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2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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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시리즈는 역사를 읽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나쁜 세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먼저 읽어야 함을 강조한다. 있을 것은 있게 만들고 없을 것은 없게 만드는 그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며 책장을 넘겨본다. 이 조차도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작은 노력일 거라고 믿으며.

 

시리즈의 첫 책은 “선조, 나는 이렇게 본다” 였다. 의미 있게 읽었지만 정작 리뷰는 쓰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인 이 책도 그렇게 지나치게 될까 봐 조바심을 내며 얼른 책을 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본다’ 시리즈의 두 번째 대상은 문체반정이다. '문체반정'이란 당시 유행하던 소설 문체를 엄격하게 금하는 문화 정책이다. 사실 정조 시대에는 이 사건을 ‘반정’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 단어는 후대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만큼 이 사건이 문화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정조는 호학군주였다. 학문의 깊이도 깊었고 그 박학함도 누군가의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본시 책읽기를 즐겨했던 성품으로 느껴지지만 아비를 잃고 살얼음 같은 세손 시절을 지나 왕위에 오르기까지 느껴야 했던 지극한 생명의 위험이 그를 더더욱 밤을 새워 책을 읽게 만들었을 것이다. 온 조정이 자신을 죄인의 아들이라며 쫓아내려고 하는 형국에서 그는 그 어떤 꼬투리도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던 그 날 아침까지도 엮어서 펴냈던 소설책과 같은 소품을 정조는 결코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아비와의 차이점도 증명해야 했지만 정조 자신의 성향도 소품에는 취미가 없었다. 오히려 재미도 모르고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소품류의 수입도 금할 만큼 치를 떨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세상에서 소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걸 원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이 문체반정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명백한 사상통제로 보고 또 누군가는 이를 통해서 노론의 공격으로부터 남인을 지켜내기 위함이라고 보았는데, 내 생각에는 둘 모두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소품체를 썼던 관료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내게 했고, 벼슬을 빼앗았다가 되돌려주기도 했다. 명백히 사상적 탄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 이때 정조로부터 꾸중을 들은 인사들이 노론 인사였고, 이가환 등에 대한 공격을 너희 노론들이 고전(성리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더 큰 잘못이라고 받아친 것도 정조였다. 얼마 전에 발견된 그의 비밀 어찰에서는 심지어 그가 그렇게 파르르 떨던 소품 형식의 문체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조가 정이라고 믿는, 바름이라고 믿고 있는 가치 성리학으로 올곧이 나아갈 것을 원했던 이 고지식한 임금님께 문체반정은 꼭 필요했던 수단으로 보인다.

 

자, 임금이 문체반정을 선포했다. 문체가 바르지 않아 세상 풍속이 바뀌었다고 선전포고를 했으니 싸워야 할 대상도 필요하다. 정조는 이 뒤엎어야 할 문체의 중심에 박지원이 있다고 꼭 집어서 이야기했다. 열하일기로 연암체를 선보인 이 거장이 임금의 레이더 망에 바로 걸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 이옥이 있다. 일개 유생에 불과했지만 번번이 임금의 예리한 검열에 걸려 장원에 급제하고도 꼴찌로 밀려나기도 했던 불우한 사나이. 책은 그렇게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 시기에 있었던 치열한 문체 싸움을 전달하고 있다. 그 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은 각자 어떤 창과 방패를 들고 싸웠는지를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정조처럼 문체의 의미를, 곧 글쓰기의 의미를 과대평가한 임금은 없다. 순진하게도 정조는 문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또한, 정조처럼 문체를 과소평가한 임금도 없다. 정조는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얼마든지 문체가 바뀐다고 보았기에 문체반정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문체라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실, 임금 개인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힘과 의지가 들어가야 비로소 변화한다는 사실을 정조는 간과하고 있었다. 문체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 살아 숨 쉬는 힘을 결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다. -206쪽

 

진정 정조는 누구보다 문체를 과대평가했고, 또 동시에 과소평가했다. 그를 가리켜 개혁군주라 일컫는 것에 굳이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그 시대를 극복해내지 못했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자연인으로서의 그에게 가지는 애틋함과 달리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아무래도 봉건 군주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거기까지는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자, 박지원 얘기를 해보자. 문체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지목된 이 사나이는 임금이 써서 올리라고 하는 순정한 문체를 거부한다. 너무 잘못해서 반성문도 쓰지 못하겠다고 능청스럽게 빠져나갔던 이 인물에게 정조는 면전에서 글을 써내라고 명을 내렸다. 거기에 대해서 박지원은 과연 임금이 원하는 글을 써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 괴짜 양반은 오히려 가장 소품스런 글을 써서 올린다. 무인 이방익이 중국에서 표류했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쓰면서 연암은 이방익의 아버지 이광빈의 일본 표류기로 역공을 펼친다. 물론 여기에 대해 정조가 어떤 보복성 징계를 한 바는 없다. 오히려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철즙을 물들이지 않았더라’로 대표되는 이광빈의 이야기는 이 책 속의 또 다른 이야기로 등장하며 독자의 관심을 확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독자의 심금을 울린 것은 '열녀전'이었다.

 

박지원은 몇 편의 열녀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사대부들이 쓰곤 했던 열녀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초기 열녀전과 달리 마지막에 그가 쓴 열녀전은 놀라운 차이점을 보인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이것은 정말로 열녀를 기록하는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첫 부분부터 열녀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아무개 둘째 딸 신 씨, 아무개 첫째 부인 박 씨” 하는 식으로 그 아버지나 남편의 이름으로 소개된다. 정작 본인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다. 중간 부분도 마찬가지. (...) 오로지 얼마나 남편을, 시댁 어른을, 자식과 살림을 잘 돌보는지만 적어 내려간다. 마지막 부분 또한 거의 다 “군자 왈, 이 열녀의 지극한 정절을 깊이 치하하노니......”로 시작되는, 글을 쓴 남성의 평가로 끝난다. 가장 여성답다는 열녀전의 기록이 완벽하게 남자의 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말도 언제나 똑같아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최고의 열녀라고 부르짖으며 끝을 맺는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모두 열녀가 되어 그 한 몸 죽여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자! 그렇게 거창하게 외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글. 이른바 과부의 ‘죽음’을 조장하는 글이 바로 열녀전인 것이다. -141쪽

 

이름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열녀전의 주인공인 그녀들은 자신의 이야기는 없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오로지 시댁 식구들을 위한 희생양으로 살다가 마지막까지 사대부 남자의 평가로 끝맺음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했다. 그 희생의 악순환을 박지원은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의 한축을 자신이 담당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하여, 박지원은 새로운 열녀전을 썼다. 무려 과부의 ‘욕망’이 등장하는, 온전히 그녀가 주인공인 열녀전을 말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명백하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이어지고 있는 이 인습을, 억압된 관습의 문제점을 낱낱이 고발한 것이다. 그런 글은 임금이 강조하는 순정한 문체로 쓸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명이 다해 가고 있는 고전 경서의 낡은 문체를 끌어안고, 여전히 성리학 질서에서 비켜가지 않는 이상 정치를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임금에게 던지는 반성 아닌 반성문, 동시에 최고의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이 열녀전이 임금께 올려진 글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옥에게로 가보자. 그동안 내가 접한 이옥의 이야기는 그를 시대의 희생양, 가련한 피해자로만 보았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소개된 이옥은 비록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이긴 하더라도 그로 인해 불행해진 사내로 보이지는 않는다. 과거 시험에만 매달리던 젊은 시절에 그가 가졌을 낭패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는 벌을 받아 충군에 동원되었을 때조차 그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고 더더욱 탐닉하는 모습을 보였다.

 

궁한 사내, 남쪽 동네에서 남몰래 한탄하고

나이 많은 처녀, 북쪽 대궐에 알려졌네.

여러 재상들, 서쪽 성에서 혼례 일을 맡고

정겨운 부부, 동쪽 평상에서 은혜에 감격하네. -166쪽

 

나라가 나서서 가난한 처녀총각들을 혼인시켜주었는데, 그만 실수록 누락된 노총각이 드디어 장가가게 된 장면을 ‘희곡’으로 그려냈다. 사방위가 대구를 이루며 그날의 경쾌함을 눈에 선하게 그려내었다.

 

“이 달이 무슨 달인가? 눈앞에는 아지랑이가 흔들흔들, 푸른 사초 둑에는 새 잎이 뾰족뾰족, 물억새는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종달새는 세 발까지 날아오르는 달. 그런데 삼 년 묵은 말가죽만 오호롱 지호롱. 늙은 도령의 심사, 이에 참기 어렵구나.” -167쪽

 

이쯤 되면 이 노총각이 얼마나 마음이 달떴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노총각만 그랬겠는가. 마침내 시집가게 된 노처녀의 마음 또한 왈랑거려 참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멍멍이를 붙들고 내일모레 시집간다고 자랑을 했을까.

 

이옥의 글은 생명이 있었다. 벼룩에게 물리는 순간을 읊은 다음 글을 보시라.

 

마치 은바늘로 터진 솔기를 꿰매는 듯

재빨리 살갗을 파고드는데,

장미꽃에 잘못 부딪혀

붉은 가시에 살갗이 찔린 듯

피와 신경이 놀라고 자지러져

사람으로 하여금 배겨내지 못하게 한다.

 

이에 손톱으로 쳐 누르자

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창자는 볼 수 없고

다만 한 떨기 복사꽃 같은 피가 보였다.

이옥, ≪경금소부≫, <벼룩을 읊은 부> -234쪽

 

진짜 눈앞에서 벼룩이 살갗을 물어뜯는 현장을 목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마지막에 한 떨기 복사꽃으로 피어난 핏방울까지,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자극하는 글솜씨다. 이런 글쓰기에서 자부심을 느낄, 재미와 만족을 느낄 사나이에게 고전 문체로만 글을 쓰라고 하니, 그야말로 생고문이 아닐 수 없다.

 

정조가 고전 문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이옥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롭고 창의력이 넘치는, 생명이 돋아나는 그런 새 문체를 갈고 닦은 이옥, 그리고 그 중간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했던 박지원까지.

 

여기, 18세기에 가장 치열하게 문체를 두고 고민한 세 사람이 놓여 있다. 얼음 갑옷을 입고서 뜨거운 태양빛에 제 몸을 내던졌던 임금 정조. 얼음이 녹아 내려가도 결코 포기할 줄 몰랐던 강철 사나이에게 글은 ‘바른’ 것이었다. 바른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박지원은 누더기를 걸친 채 살아있는 햇볕을 즐겼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이옥은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자신의 뜻을, 자신의 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언젠가 자신이 입은 허름한 홑옷이 쓸려가는 날, 진정으로 ‘멋진’ 비단옷의 가치가 드러날 것을 믿었다. 그러니 그는 불행하지 않은 사나이였다.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세 사람을 둘러싼 문체반정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했다. 지금 왜 우리가 그 시절의 문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앞서 이 역사 시리즈의 출간의 변을 언급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다면 어떤 문체를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이렇게 풀어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바꾸거나 개혁할 때 “천명을 받았다”, 또는 “혁명을 일으켰다” 같은 말을 쓰지요. 비슷해 보이는 두 말은 그러나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명은 대개 왕이나 천자, 영웅 들이 받습니다. 왕은 하늘의 자식이라거나,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영웅 같은 말들은 다 이 천명을 받아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의 천명은 하늘 천(天)을 써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을 뜻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사람이 고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여기서 혁은 가죽 혁(革)을 씁니다. 가죽은 그냥은 쓸 수 없고 꼭 사람이 손질을 해서 써야 하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 -256쪽

 

천명에 가까웠던 정조는 문체를 바꾸려 하였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문체를 바꿔낸 이들은 가죽을 손질할 수 있는 사람들, 곧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조금씩 문체를 바꾸고 현실을 바꾸고, 그렇게 더 나은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게 우리의 소명이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책임이자 기쁨이다.

 

제법 딱딱할 법한 주제건만 기대 이상으로 이 책은 재미있다. 소개되는 인물들이 워낙 입체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입과 손을 빌려 읽게 되는 글들이 또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창조해 냈다. 적절히 문답법을 섞어서 쓰는 저자의 글솜씨도 재미에 큰몫을 담당했다. 부록으로는 문체반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정조가 노론 신하와 나눈 대담이 소개되고 있다. 이 말발도 좋고 글발도 좋은 임금님이 작정하고 덤벼든 신하 하나를 어떻게 요리해내는지 그 솜씨 한 번 구경해 보시라. 두 번째 부록은 ‘빨간펜’ 선생님 정조가 자신의 글을 밑줄 그어가며 수정하고 풀이하는 가상의 글잔치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과연 정조는 자신의 날카로운 검열을 어찌 피해갈 것인가. 세 번째 부록은 ≪조선왕조실록≫ 속 문체반정에 관한 기록들을 발췌한 것이다. 은근히 실록을 읽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그 방대한 양을 다 읽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관심 가는 부분을 뽑아 읽는 정도의 노력이라면 말이다. 아시아 1위, 그리고 세계 5위에 빛나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 번 도전해볼 법한 노력이라 하겠다.

 

이 책의 시리즈는 10권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선조와 정조의 문체반정이 출간되었고, 근간으로 동학과 김삿갓이 대기 중이라고 한다. 관심 가는 내용들이다. 다음 시리즈도 충분히 기대해 본다.

 

덧글) 무척 즐거운 독서였지만 원문 인용의 녹색이 눈을 피로하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색도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책이 많이 팔려서 다음 쇄에는 폰트 수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역사책도 아주아주 잘 팔리는 우리네 책문화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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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26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와 박지원이 있었다지만,
모두 '한문'으로 하는 문체반정이었을 뿐,
삶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어요.

박지원이 농민을 안타까이 여기는 시를 쓰기는 했어도
스스로 농민이 안 되었을 뿐더러
농민들이 쓰는 '한국말'로 글을 쓴 적도 없어요.
언제나 한문으로 '권력자'와 '지식인'한테 보여주는 글만 썼지요.

문체반정이란 무엇일까요.

마노아 2012-10-26 23:09   좋아요 0 | URL
정조보다는 박지원이 앞으로 나아갔고, 그보다는 이옥이 훨씬 더 많이 나아간 것 같아요.
자신의 계급을 극복해내지 못한 한계성은 그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 같고, 그래도 그 중에서 박지원은 좀 나은 편 아닐까요? 적어도 그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애썼잖아요.

숲노래 2012-10-2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민들을 가엾게 여기는 글을 쓰기는 하되
농민이 읽을 수 없는 한문으로 쓰던 예전 분들은
처음부터 아예 농민이 읽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던 임금들보다
조금 더 나은 편이라 할 테지만,
'좀 나은 편'이라고 해서 백성과 함께 살았을까...는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계급을 털지 못한 한계는 '대다수'가 아니라 '모두'이지 싶어요.
맹사성 같은 사람을 빼고는
아마 '모두'가 아니랴 싶어요.

왜냐하면, 스스로 농사지어 밥먹던 지식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마노아 2012-10-29 20:3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었어요. 옳은 말씀이에요.

2012-10-30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30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