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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ㅣ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1년 10월
구판절판
쉐 막스, 조앵빌, 1947
작가는 이 사진을 의자 위에서 찍었다. 덕분에 작가의 앞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등이 보이고 그보다 먼 전경으로는 한껏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는 세 남녀가 함께 찍혔다. 놀라운 것은 춤을 추는 저 남자가 외발이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의 춤이 멋졌다고 했다. 여자 둘은 유치원 때부터 서로 친구였다고 하나, 청년은 이날 이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춤춘 게 전부였다고! 놀라운 인연에 놀라운 광경이다. 극적인 순간을 잘 포착했다.
끊어진 실, 1950
알자스 지방의 한 섬유공장이다. 사장님이 직접 공장의 이모저모를 설명해 주고 있을 때, 작가는 양해를 구하고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자신이 찍어야 할 장면을 잡아채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오로지 사진에 집중하게 된다. 이 순간도 그랬다. 끊어진 실을 잇고 있는 여인의 자태는 마치 하프 연주를 하는 것마냥 우아하게 보인다. 실 한가닥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총기가 느껴진다.
쥘과 짐, 1947
마른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두 작은 섬을 연결하는 나무 다리 위에 세 젊은이가 모여 있었다.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였다. 소녀는 누워 있는 소년에게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고, 다른 한 소년은 비스듬히 누워 강 건너편을 보고 있다.
이 사진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쥘과 짐'을 떠올리게 한다. 덕분에 나도 영화를 찾아 보았다. 낯이 익은 제목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보고서 사진을 다시 보니 정말로 세 남녀의 교차된 사랑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작가란 멋진 창조자다.
퐁데자르의 연인, 1957
센 강둑에서 두 연인이 입을 맞추고 있다. 배는 노도 없고 강둑에 매달려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강렬한 불꽃이 튀는 순간 방해받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록 사진 작가의 눈에 포착될 만큼 열린 공간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최고의 사랑스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영화 포스터로 써도 좋을 만큼 배경도 구도도 훌륭한 사진이다. 연인들 역시 최고이고!
자전거, 1954년 성탄절
자전거 파는 가게 앞에 한 소녀가 아빠의 손을 잡고서 자전거를 내려 보고 있다. 소녀의 손을 꼭 잡은 아버지의 행색을 보니 분명 주머니 사정이 가난했을 것이다. 소녀는 자전거가 몹시 갖고 싶었겠지만 차마 소리 내어 욕망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 형편에는 무리일 거라고 미리 포기하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아쉬움까지 감출 수는 없다. 소녀가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짠하다.
푸시킨 궁, 1986
아직 레닌그라드라 불리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 꼬마가 할머니와 함께 푸시킨 궁에 왔다.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느라 바쁜 할머니와 달리 소년은 지루함이 가득하다. 빨리 돌아가자고 할머니의 다리를 잡아 끈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은 전시회장 곳곳을 누비는 할머니! 어딘가 조카를 데리고 구경가면은 자주 연출되는 모습이다. ^^
바닥의 곡선 무늬와 배경의 격자 무늬가 조화롭게 어울린다. 직접 가보고 싶은 곳이다.
감자튀김 가게 아가씨들, 1946
1946년이면 파리가 해방되고 일년이 지난 시점이다. 전쟁의 상처는 컸지만 해방의 기쁨도 그 못지 않았다. 감자튀김 가게 아가씨들의 얼굴에선 새 희망이 가득하고 활기가 차고 넘친다. 마음에서 우러난 기쁨과 상냥함이 사진에서 느껴진다. 줄을 서서라도 먹고 싶은 가게였을 것 같다.
오늘의 여왕, 1949
'오늘의 여왕'은 1949년에 한 라디오 방송국이 만든 프로그램이다. 원하는 후보자에게 기회를 주어 여왕 대접을 해주는 내용이었다. 기회를 얻은 사람은 하루 종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후한 대접을 만끽한다. 바로 그 여왕님께 오늘 하루 여왕이 된 기쁨을 표현해 보라고 하자 이런 포즈를 취해 주었다. 온몸과 온맘으로 기뻐하는 내색이 역력하다. 나로서는 말괄량이 삐삐가 떠올랐다.^^
베네치아, 지우데카 섬, 1981
사진 속에는 루이 15세 스타일의 소파를 수선하고 있는 장인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다. 더 재밌는 것은 그 사이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이 모습을 찍고 있는 작가 윌리 로니스가 잡혔다는 것이다. 물론 사진 작가도 그것을 알고서 셔터를 눌렀다. 동시간에 함께 있었다는 절묘한 기록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쇼파를 수선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거울 속에 잡힌 작가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대장간, 1950
르노 자동차 공장 설립 50주년 기념 책자를 위한 사진이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책자에는 이 사진이 실리지 않았다. 관계자들은 이 사진에서 에밀 졸라의 소설 분위기를 읽었지만, 공장의 현대적인 면이 강조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대장간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릴 만큼, 이 사진에서는 20세기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먼저 떠오른다.
규소폐증에 걸린 광부, 1951
광산촌에서 은퇴한 광부를 담은 사진이다. 규소폐증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은 모델은 연신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이미 망가진 폐에 독이 되겠지만, 여생이 얼마 되지 않은 그로서는 피우고 싶은 담배라도 맘껏 피우고 싶었을 것이다. 일흔은 되어 보이는 모습이건만, 사진 속 남자는 이때 47세에 불과했다고 한다. 사진을 찍고 몇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직 눈빛도 형형했는데 안타깝다.
뮐레 가, 1934
1910년 생인 작가는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직 충분히 아마추어로 불릴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은 극적인 느낌이 있다. 비내리는 파리의 밤에 홀로 서 있는 택시의 모습이다. 점점 커지는 조명 불빛이 내게로 다가와 꽂힐 것만 같다. 확대해서 방에 걸어두고 싶은 사진이다.
어린 파리지앵, 1952
윌리 로니스를 무척 유명하게 만들어준 사진이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바게뜨 빵을 들고 신이 나서 달려가는 꼬마 아이의 상기된 얼굴에서 벅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이 사진은 어느 정도 연출되었다고 한다. 빵집 앞에서 줄을 서 있던 아이의 어머니께 아이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요청을 했고, 아이는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같은 길을 세 번 달려야 했다. 모르고 본다면, 아니 알고 보았을 때에도 연출이라곤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생동감 넘치는 사진이다. 꽤 시간이 흐르고 이 소년의 장모님이 작가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 사진을 표지로 쓴 사진집 때문에 반가움을 표시한 것이다. 덕분에 작가는 오랜만에 이 사진을 찍은 거리를 다시 거닐었고, 옛 모습 그대로의 빵집도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시간이 흘러 소년은 결코 소년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는 재밌는 사진집이다. 강렬한 사진에 비해서 이야기는 소박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묘사했다. 무려 99세까지 산 장수 사진 작가는 수십 년이 지난 옛 사진들을 설명하면서, 그보다 또 수십 년 전의 사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기억을 회고한다. 작가가 떠올리는 '그날들'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 하나하나의 날들에서 나의, 우리의 '그날들'을 더불어 추억해 본다. 사진이 주는 멋진 선물이다.
이 사진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사진집 하나를 또 주문했다. 마주칠 그 사진들에서 또 어떤 '그날들'을 보게 될지 몹시 기대가 된다.